- 진리를 깨달은 철학자가 해야 할 일
철학자의 삶이라는 것이 그리 대단하지 않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다. 논문이나 책을 통해 대단하신 업적을 내고 그렇게 뿌듯해하고 우쭐하기도 한다. 돈이 없는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었다고 둘러댄다. 자기방이나 연구실에 잔뜩 쌓아놓은 책의 절반은 펼쳐보지도 않은 책들이다. 학교나 사람들 앞에서 철학을 조금 아는 척을 할 뿐이다. 아는 척은 정도가 심해져서 방금 철학을 시작한 철학도 앞에서는 마치 자기가 칸트나 헤겔이 된 것처럼 으스댄다. 그들 앞에서는 몰라서 허허 웃는 것조차도 가끔은 뭔가 도통한 사람의 아우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는 척을 했으면 오늘 하루 나는 수준 낮은 이 세상에서 나름 철학자답게 살아준 것이다. 내일 하루도 만만해 보인다. 핸드폰이나 보다가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잠이나 잔다. 그런데 이 한심한 철학자에게도 다행히 한 가지 쓸모 있는 더듬이가 있다.
철학자는 내 경우 하루에 한두 번 그것도 2-3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만 철학자로서 사는 것 같다. 생각없이 편히 사시는 경우에는 며칠에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아무튼 평균 2-3일에 한 번 정도 짧은 몇 분의 시간 동안 진짜 내 모습과 진짜 삶의 무게가 준비 없는 내 머리를 스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나는 놀라 숨죽여 그 생각들을 붙잡으려 한다. 책에 없는 진짜 철학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내용인지 아직 모르지만 아이의 본능처럼 손을 뻗어 휘젓는다. 다급한 마음에 뭐라도 붙잡으려고 한다.
사람의 체온은 식탁 위 마시다 만 컵의 물처럼 그냥 그렇게 있는 온도가 아니다. 체온은 상온이 아니라는 말이다. 체온은 인간이 아직도 다 알 수 없는 몸속 수많은 것들이 충돌하고 싸우면서 버티고 있는 온도이다. 아프거나 병에 걸렸을 때 체온이 낮거나 높으면 우리는 평상시 체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게으른 철학자가 2-3분 짧은 시간 동안 찾으려는 것은 이런 종류의 것이다. 산다는 것이 그 자체로 충분히 대단하고 숨가쁘고 거대한 싸움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면 철학자는 그 앞에서 순응한다. 별것 아닌 체온이 흔들리게 되면 사람이 쓰러진다. 나중에 꺼내보면 별것 아닌 작은 종양으로 사람이 죽거나 실명하거나 한다. 단순히 몸 속의 변화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는 아이의 일상에서도 같은 질서를 본다.
착하고 건강하게 잘 크고 있는 아이가 소파에 마음대로 누워 내 핸드폰으로 게임을 한다. 자기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면 또 엄마가 보고 많이 했다고 혼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들키지 않은 아이와 나만의 비밀이다. 4학년 아이는 아직 모를 것이다. 아빠가 왜 자꾸 자기 얼굴을 보면서 아무 말 없이 웃고 있는지 말이다. 진심으로 행복해서 웃는다는 것을 아이 부모들은 정확히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 행복과 웃음은 마냥 즐거운 것이 아니다. 부모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다치지 않고 사고 없이 스무살까지만 잘 커줬으면...’ 그리고 또 생각한다. ‘혹시라도 이 아이가 갑자기 나를 떠나게 되면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게임 아이템을 얻었다고 벌떡 일어나 엉덩이춤을 추는 아이를 보면서 부모는 이렇게 속으로 행복해 한다. 몇 번이고 볼을 쓰다듬고 기분이 울적한 날에는 아이 볼에 갑자기 뽀뽀도 한다. 아이가 다 컸다고 아빠의 뽀뽀를 싫어해도 상관없다. ‘지금처럼만 같이 오래 살자’라고 또 마음속으로 말한다.
학자로서 성공하고 좋은 차와 큰 집에서 사는 것. 티셔츠 하나 사러 갔다가 폴로와 헤지스 매장을 들락거리는 동안 나는 또 이 사실을 놓치고 바보처럼 살아간다. 이 사실은 수학문제가 아니기에 이해할 문제가 아니다. 아내가 기분이 좋아 ‘나 예뻐?’라고 물어볼 때 연예할 때처럼 사랑스럽게 쳐다봐 주는 것, 아이가 조심스럽게 내 방문을 열고 같이 게임하자고 닌텐도 조이스틱 두 개를 들고 올 때 만화 속 아빠처럼 실컷 오버하며 같이 게임을 해 주는 것, 그것이 진리를 깨달은 철학자가 해야 할 일이다. 거대한 진리 앞에서 순응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