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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ctor flotte Aug 18. 2024

옅은 바탕색이 있는 가족여행

- 휴게소에서 밥을 먹든 차에서 과자를 먹든. 어딜 가든

휴가라고 하기도 하고 여행이라고도 한다. 별 상관 없다. 여름이 되면 아내와 아이와 차를 타고 아무튼 바닷가로 간다. 동해 강릉으로 많이 갔던 것 같다. 요즘은 서해로 간다. 트렁크는 짐으로 가득 차 있다. 내 바로 옆 오른손이 닿는 곳에는 커피가 담긴 텀블러가 있어야 한다. 조수석 아내는 과자를 먹어야 하고 뒷좌석 아이는 아빠 엄마 몰래 틈틈이 핸드폰으로 게임을 한다. 휴게소는 우리 모두가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다. 내리자마자 화장실을 갔다가 기분 좋게 스낵코너에서 각자 한 개씩 간식거리를 산다. 휴게소 만물상 가게 앞에는 항상 삑삑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하얀 강아지 인형이 있다. 다시 차를 탄다.


아내와 아이가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듣겠다며 한 참 싸우고 난 뒤 둘 다 잠이 들고 나는 그제야 가만히 운전을 한다. 다행히 운전을 싫어하지 않아 이렇게 조용히 혼자 운전하는 것이 좋다. 남들 다 가는 휴가철 남들 다 가는 숙소로 여행을 한다. 돈도 많이 쓴다. 숙소에 도착하면 무거운 가방을 다 옮기고 나서 더워서 찬물을 실컷 틀고 샤워를 한다. 아내는 그사이 주방을 살펴보기도 하고 가져온 물건들을 정리한다. 아이는 또 구석에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다가 엄마한테 한 소리 듣는다. 나는 숙소 바닥 에어컨 바로 밑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하지 않는다. 


숙소가 심심해질 때쯤 숙소를 나선다. 아내는 유명한 까페나 빵집을 찾았다고 신나서 가지고 한다. 나는 그곳 주차창 걱정을 하며 따라나선다. ‘거긴 또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이런 일로 아내와 싸우고 싶지 않아 표정 없이 운전을 한다. 시골 편의점이 보여 잠깐 멈춰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다. 자동차의 여기저기 작은 틈새들은 구겨진 과자봉지, 롯샌 종이상자, 휴지들로 채워진다. 아이스크림 봉지에서 흘러내린 끈적끈적한 몇 방울이 손에 뭍어 핸들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운전을 한다. 아무튼 차 에어컨은 시원해서 좋다.


저녁이 되면 아이는 치킨이 먹고 싶다고 한다. 아내는 맨날 치킨이냐고 혼내다가도 결국 근처 치킨집을 찾아본다. 우리나라 숙소 한 쪽 벽에는 왜 이렇게 큰 TV가 걸려 있는 건지 결국 TV를 켜고 집에서 보던 프로들을 보게 된다. 작은 방이라도 하나 더 있으면 혼자 거기라도 가 있을 텐데 도망갈 곳이 없어 바닥에 앉아 같이 TV를 본다. 여행 와서까지 TV를 보는게 싫어 싫은 표정을 짓고 있을 때쯤 아내가 한마디 한다. ‘여행오면 오빠가 혼자 방에 안 들어가서 좋아’ 그리고 아이도 한 마디 한다. ‘나도!’


그냥 흘려들은 척했지만 속으론 미안했다. 그리고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아, 그래서 가족여행을 하는 거구나.’ 나는 시간과 돈이 드는 만큼 특별하고 의미 있는 여행이 되어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렇지 못한 시간들이 아까웠는데, 아이와 아내는 생각이 달랐다. 그냥 며칠 정도 내가 아무 일 하지 않고 항상 뭐든 같이하는 게 좋은가 보다. 휴게소에서 밥을 먹든 차에서 과자를 먹든. 어딜 가든 지금까지 내가 계속 우리 가족과 함께 있었구나.


이번 휴가여행 동안은 그래서 핸드폰을 보지 않았다. 시시하고 귀찮고 돈만 쓰는 여행이 그래도 우리가 같이하는 시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하고 싶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다 괜찮았다. 아내의 잔소리, 자꾸 심심하다고 투정하는 아이. 어딜 가면 줄을 서야 하고, 까페를 먼저 갈지 밥을 먼저 먹을지 정하지 못해 싸워도 나쁘지 않았다. 매년 똑같았던 시시하고 평범한 여행에 이렇게 바탕색이 칠해지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건강히 별일 없이 지금 같이 있는 거구나’. 굵은 선이나 화려한 색이 아닌 옅은 바탕색이 있는 가족여행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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