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이 먼저이고 질문은 그다음이다. 순서를 헷갈리면 안 된다.
물고기가 헤엄을 칠 때 물은 물고기를 방해하는 것일까, 도와주는 것일까? 아무리 헤엄을 쳐도 더 빨리 나가지 못하는 건 물의 저항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의 유선형 몸은 분명 물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물고기에게 물은 방해가 되는 것일까, 도움이 되는 것일까? 헤엄을 잘 치는 물고기에게는 물의 저항이 문제가 되지 않고 그렇지 못한 물고기에게만 그런 것일까? 단지 능력의 문제일까? 물고기라면 뭐라고 대답을 할까? 내 생각에 물고기가 생각 비슷한 걸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 분명하다. ‘미안하지만, 질문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물을 자신과 따로 떼어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고기에게 물은 따로 있을 수가 없다. 물고기이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물을 따로 생각할 수 있다면 물고기가 아니다. 더 정확히 하지만 그래서 더 이해하기 어렵게 말하자면 이렇게 된다. ‘물고기는 한 번도 물에서 헤엄을 쳐본 적도 없다.’
사람도 마치 물고기처럼 헤엄을 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 말을 만들어 보았다. 걱정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 슬퍼한다는 것, 병에 걸리고 늙어간다는 것 그리고 언제 찾아올지 모를 죽음이 무섭다는 것 우리는 이런 일들이 나와 상관없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하필 나를 괴롭히는 나쁜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은 조금 다른 것이다. 우리는 과연 ‘슬퍼할 수는’ 있는 것일까? 우리는 과연 죽음을 ‘두려워할 수는’ 있는 것일까? 아까 말한 그 물고기의 신세를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낙담하고 슬퍼한다. 특히 욕심에 가까운 일들을 오랜만에 간절히 원했다가 그렇게 됐을 때 우리는 더 그런다. 며칠 식욕도 없고 우울하다. 하지만 또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지고 알게 된다. 욕심이었구나. 오랫동안 준비하고 간절했고 나에게 중요한 일이었지만 욕심이었구나. 내 안으로 딱딱히 말려 들어간 상태에서 간절함과 욕심이 뒤섞이고 있었는데 내가 모른 체하고 있었구나.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또 슬퍼하겠지만, 그게 정말 슬퍼할 일이었을까. 실은 욕심이 간절함의 모습으로 나를 괴롭혔던 것인데 슬퍼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그리고 마지막 질문이 툭 남는다. 그럼 나는 슬퍼할 수는 있는 것일까?
슬퍼할 이유만 보이겠지만, 그 뒤에는 나중에서야 알게 되는 슬퍼할 필요가 없는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중에 깨닫게 될 그런 이유들이 원래 얼마나 많았던 것인지도 나는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 문제는 더 커진다. 지금은 슬퍼할 이유만 커다랗게 보이지만 사실 그 뒤에 내가 슬퍼할 필요가 없는 이유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나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세 번 네 번 자꾸 묻는 것이다. 살면서 우리는 슬퍼할 수는 있는 것일까? 나는 과연 후회라는 것은 할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은 슬퍼하지만 슬퍼할 필요가 없는 이유들을 다 헤아려 본 적이 없다. 물고기가 물을 따로 생각할 수 없듯이 우리 인간도 슬픔이라는 것을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좋아하거나 즐거워하거나 걱정하거나 무서워하거나 모두 다.
다시 그 물고기에게 가 보자. 자신이 물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물이 자신을 방해하고 있는지 도와주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물 속에서 살아가는 물고기가 있다. 그렇게 물고기가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저만큼이면 된 것이다. 물고기에게는 다 쓸모없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저렇게 알에서 태어나 저렇게 살다가 더 큰놈에게 잡아먹히거나 나중에 때가 되면 알을 낳고 죽는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질문에 있었다. 삶에 어울리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질문들을 가려내야 한다. 삶이 먼저이고 질문은 그다음이다. 순서를 헷갈리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