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최대한 나중으로 미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아무런 질서도 아무런 목적도 없다는 것을 철학자들이 모르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내 주변 그리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는 일들이 이를 매일같이 증명한다. 삶에는 아무런 질서도 아무런 목적도 없다는 사실을 철학자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철학자들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삶의 시작과 운동 그리고 끝이 모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철학자들은 수천년을 확인하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 왜 철학자들은 삶에 대해 그리고 의미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약간의 철학적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우리 각자는 사람으로서 인간으로서 아무것도 아닌 이 모든 것들 앞에 직면해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계획해서 노력한다는 것은 언젠가 지나가 버려 결국 나와 관련이 없게 될 일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에 불과하다. 아무리 그것들을 붙잡고 있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들이 사라져 없어질 날이 온다는 것은 한낮의 태양처럼 분명하다. 철학자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은 별 문제 없이 돌아가는 이 세상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데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살펴야 할 일이 다행히 적어도 한 가지는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 사실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잘 돌아간다면 혹시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 사실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무’는 생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무가 문제가 되는데 무는 없다. 철학자들은 아무런 목적도 질서도 없는 이 세상에서 한 가지 마지막으로 생각할 거리를 찾아 마지막 생각을 시작하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자꾸 나타나고 눈에 보이고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사라진다. 우리의 하루가 그렇고 우리의 삶이 그렇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없다. 신과 종교에 귀의하지 않는 한 철학자는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내 앞에서 그렇게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그 어디에도 없다면 ‘나’, 내가 바로 그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의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이 세상에 그저 휩쓸려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이 세상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있고 살아간다는 사실은 이 세상이 아무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잘 돌아가도록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된다. 내가 논문을 쓰다가 갑자기 든 생각이어서 나도 모르게 어렵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복잡한 내용이 아니다. 나와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로부터 나와 세상이 필요 없거나 쓸모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또 하나의 사실이 아직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도달한 것은 여기까지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는 마음을 조심하는 것이다. 세상의 문제들이란 답이 있겠지만, 이 문제는 특이해서 답을 찾는 것보다 그냥 문제로 온전히 남아 있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린 질문이 자라서 때가 되어 성숙하게 될 날을 기다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매일 같이 아무런 질서도 아무런 목적도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이렇게 자꾸 살다 보면 조금씩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아직은 대답을 찾았다고 생각하지 말자. 삶이 무의미하다는 말을 마침내는 하게 되겠지만, 우리는 최대한 나중으로 미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