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이렇게 나는 '나의 글'을 썼다
어제까지 덥더니 갑자기 추워졌다. 너무 더웠던 여름이라 아직 가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먹어야 할지 그냥 따뜻한 커피를 먹을지 모르겠다. 오늘부터 가을이다. 사람들이 다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쓸데없이 기분이 가라앉는다. 사람 없는 한적한 곳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정하지 않고 여기저기를 걸어다니는 것이 싫지 않은 계절이 가을이다. 그리곤 무엇인가 읽고 쓰고 싶어진다. 하지만 철학자는 생각을 한다. 갑자기 나는 왜 읽고 쓰고 싶어지는 것일까?
철학자는 마음의 변화에 민감하다. 매번 겪는 감정이지만, 놀랍고 신기한 것으로 다시 느낀다. 이런 감정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갑자기 읽고 쓰고 싶어지는 마음은 나와 세상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려는 것일까 생각한다. 내가 지금 무엇을 쓴다면 그건 내가 쓰는 것일까, 가을이 쓰는 것일까? 가을이 먼저고 내가 다음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가을이 나를 지배하게 해야 할 텐데, 가을이 나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와중에 나는 어떻게 ‘나의 글’을 쓸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어떻게 가을에 우선권을 주고 가을을 헤치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아직 철학자의 생각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시작이다.
철학자는 하나의 세상을 가지고 있다. 모든 물음이 결국 흘러들어오는 곳이다. 아무 말도 없이 내가 마음대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허용하는 이 세상은 무엇일까? 그냥 공간일까? 그저 큰 상자와 같은 공간이 아니라면, 나의 매일 매일의 일상, 나의 크고 작은 감정들 내가 태어나고 결국 죽게 될 이 세상은 나에게 무얼 말하고 무얼 원하는 것일까? 세상이 살아 있어 실제로 나에게 무얼 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원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안다.
그저 가져와 마음대로 다룬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무엇이 나를 원한다는 것은 나를 보호해 주고 지켜주고 싶다는 것이다. 보호해 준다는 것은 그 안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무얼 원한다는 것은 그것이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때까지 기다려준다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기대어 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해 보면 세상은 이렇게 나를 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세상의 뜰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하고 싶은 일들을 한다. 세상이 나를 지켜주고 나는 뛰어논다. 내가 세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여기 있을 수는 없다. 나에겐 끝이 있겠지만, 세상은 나를 그 끝까지 지켜줄 것이다. 세상이라는 것이 이러하다면 나는, 나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다 큰 어른이 세상을 놀이터로만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우선은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어쭙잖게 생각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짧게 바다를 다녀왔다. 바닷가에 캠핑의자를 놓고 바다를 보고 여름의 마지막 햇빛을 마음껏 즐겼다. 더운 햇빛이 아니라 뜨거운 햇빛이었다. 몸이 아니라 머리에서 뜨거운 땀이 나는 것이 좋았다. 바닷가였기 때문이다. 내가 차를 타고 여기 바다를 왔지만, 바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바다가 자기를 보여주었던 것이고 바다가 나를 원했던 것이다. 바다가 원했기 때문에 나는 바닷가에서 바다와 해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바다가 원했기 때문에 내가 여기 온 것이다. 내가 바다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바다 앞에 서면 우리는 자연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게 된다. 바다를 받아들이기는 너무 쉽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뿐인데 나는 남김없이 모든 일을 다 해버린 기분이다. 가만히 바다를 보는 일이 내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다. 바다 앞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편안하다. 바다가 원하는 대로만 나는 그냥 있다가 오면 된다.
그리고 이렇게 나는 '나의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