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것은 실수를 더욱 나의 것이 되도록 만들라는 뜻이다
철학자들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성적으로 심사숙고해서 판단하라’ 사람들이 중요한 결정의 순간, 무얼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울 때 철학자에게 물어보면 철학자들은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해결책과는 다르다. 하나의 정답을 원하는 우리로서는 그냥 ‘잘 생각하라’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잘’을 몰라 묻는 것인데, 철학자들은 별 도움이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철학자들도 별거 없구나.’
철학자들이 깊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라면 어떤가? 저 말이 그저 ‘잘 생각하라’는 말을 길게 늘인 것이 아니라, 특별하고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실제로 아주 오래 전 한 위대한 철학자가 올바른 삶, 탁월한 삶을 그렇게 정의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당장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최대한 심사숙고한다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나는 어린 시절 만화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나를 도와주는 작은 요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모를 때 혹은 내가 나쁜 일을 하려고 할 때 나를 혼내기도 하고 가르쳐주기도 하는 요정이 있다면 나는 실수 없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정말 그런 요정이 있다면 나는 ‘후회 없는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나 말고 다른 무엇이 있다면 나는 편할 것이다. 머리 아프게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고 실제로 실수하는 일도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후회 없는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지켜본 사람들은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정말 나는 이러한 삶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니 왠지 누군가의 도움으로 나의 삶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 찝찝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나쁘지는 않지만 뭔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사는 것 같아 싫기도 하다. 그런데 철학자들이 동의할 수 없는 더 찝찝하고 불쾌한 것이 있다. 실수 없는 삶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렇다.
막 걸음마를 뗀 어린아이는 걷다가 또 넘어진다. 하지만 걸음이 불안정한 아이는 자꾸 넘어져야 하는 것이다. 자기가 아직은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넘어질 것이기 때문에 안전하게 잘 넘어지는 법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넘어졌을 때 무언가를 손으로 잡고 일어서는 법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넘어지면서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나는 성장한다. 잘 걷는다는 것은 잘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스스로 내 힘으로 걷는다. 내가 넘어지고 내가 실패하고 내가 실수했기 때문이다.
걸음을 내 삶으로 바꿔 생각해 보자. 내가 실수를 하지 않고 내가 실패를 하지 않아 넘어지지 않는 삶을 철학자들은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고 내 책임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일들 안에서는 부끄러운 일이겠지만, 그런 일들은 내가 내 삶을 책임지며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은 그 책임을 다하거나 다하지 못하거나와 상관없이 적어도 내가 무의미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심사숙고한다는 것은 그 판단을 이제는 온전히 내가 내린다는 것, 그래서 그 일의 결과에 대해서도 온전히 내가 책임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수를 더욱 나의 것이 되도록 만들라는 뜻이다. 물론 나는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리고 후회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내가 스스로 실수하고 후회하고 만회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다. 내 삶을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자유는 부담스럽지만 나를 살게 하는 유일한 힘이다. '후회하는 좋은 삶'이 아니라면 그건 삶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