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octor flotte Nov 01. 2024

내 사랑하는 약한 것들

- 내 약한 것들이 힘을 발휘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한 가족 안에서 가족이 가족에게 느끼는 특이한 감정이 있다. 실은 내가 내 아내와 아이에게 그리고 고생만 하다 늙어버린 어머니에게 느끼는 감정인데, 내가 외계인이 아니기 때문에 아마 다른 사람들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이제 천천히 그 이야기를 시작할 텐데 특별히 그 감정을 미화할 생각은 없다. 철학자는 꾸며내는 사람이 아니다.


우선은 이런 것 같다. 나를 지켜주는 나약하고 어린 것들, 아이, 아내 그리고 어머니. 내가 보기에 저들은 너무 어리고 약해 보이는데 그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폭력적인 세상에 쉽게 억울한 일을 당해도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이 없어보이는 사람들, 기껏해야 쓰러지거나 울거나 할 것 같은 너무 약하고 순수한 것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없으면 안 될 것 같다. 이따금 그들이 생각나고 그립고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저들이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살지라는 생각이 가슴을 깊게 스치고 지나갈 때가 있다. 그럼 나는 지금 내가 어리석은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저들은 분명 내 몸의 일부이다. 내가 신경 쓰지 않고 있지만, 나에게는 팔이 있고 다리가 있고 가슴이 있다. 저들이 나를 떠나게 되면 나는 팔이 없고 다리가 없고 가슴이 없어질 텐데 살 수는 있을까. 뭉뚝한 몸뚱이로 어떻게든 굴러가겠지만 그건 사는 게 아니다.


분명 어느 정도는 길들여진 것 같기도 하다. 아이와 아내를 만나기 전에도 나는 살았다. 졸린 눈으로 일어나면 엄마는 아침밥만 차려놓고 생선장사하러 버스터미널로 나가셨다. 밥을 먹으며 나는 잠이 깨고 그렇게 나는 아침부터 혼자서 지냈다. 난 이렇게 혼자서도 잘 지낸 씩씩한 어린이였다. 그래, 하나씩 생각이 난다. 학교가 멀었다. 4학년 어린이가 버스를 타고 3-40분을 서서 가야 학교가 있었다. 집에 올 때는 그 버스를 타고 터미널 종점에 내렸다. 저기 어머니가 생선좌판을 하고 계셨다. 그런 어머니가 점점 부끄러워졌다. 혹시 친구들이 볼까 어린 마음에 무섭고 두렵기도 했다. 나를 발견한 어머니는 생선냄새가 나는 몇천 원을 주셨고 나는 그 냄새 나는 돈을 들고 빵집에 가서 팥빵도 먹고 여름이면 빙수도 사먹었다.


아내를 만난 건 대학 4학년 때였다. 아마 우리는 각자 하루 만원 정도의 용돈으로 생활했던 것 같다. 이천오백 원짜리 학교 식당 밥을 먹고 저녁이면 아내 집 근처에 있어 매일 가던 동네 분식집에서 참치김밥과 떡라면을 먹었다. 손잡고 그냥 걷기만 해도 괜찮았다. 저녁에 걸으며 먹었던 비비빅 아이스크림 두 개. 다른 데 보다 커피가 싸서 자주 갔던 동네 교회 1층 까페는 여름이면 시원해서 더 좋았다. 그래서 우리는 데이트 비용이 모자란 적이 없었다. 그랬던 두 남녀가 결혼을 해서 부부처럼 그리고 아이의 부모처럼 살아가고 있다.


아이를 가지고 열 달을 기다리고 아이를 낳고 덜렁 아이를 병원에서 데리고 우리가 살던 작은 방에 아이를 처음으로 눕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둘이서만 아이를 키워야 했던 독일유학시절 우리는 그저 새벽에 자주 일어나 아이가 잘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안심하던 어리숙한 부모였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겪게 되는 긴박하고 위험했던 상황들 그 모든 걸 잘 이겨내고 자라준 아이가 고맙다. 자기 방이 따로 없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속 깊은 초등학생이 되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이 약한 사람들. 생각해 보면 내가 약했던 옛날 그들이 나와 함께 있었다. 약했던 내가 약해지지 않도록 내 곁에 있어 주었다. 아련하다는 말은 아마도 아리다는 말에서 온 게 아닐까. 아련한 것들은 왠지 다 내 가슴을 아리게 한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것들은 원래 약해야 하는 것일까. 내 약한 것들이 힘을 발휘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나를 아련하게 하고 그래서 나를 아리게 하는 그들은 내게 '약해져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다. 분명히 우리는 옛날에도 다 괜찮았다고 말해 주면서.

이전 03화 후회 있는 좋은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