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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ctor flotte Nov 08. 2024

가짜들을 모두 제거한 후 남겨진 행복의 진짜 모습

그렇게 있다 보면 그게 크게 아쉽거나 두렵거나 하지 않는다

태어난 이유도 없으니 살아갈 이유도, 아니 심지어 죽을 이유도 없는 인간,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 인간상이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 역시 삶을 꾸미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란 모든 의미와 상관없이 꿈틀거리는 순수한 힘과 의지일 뿐이다. 이런 그가 행복에 대해 얘기했다는 것은 놀랍다.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이유도 없을 텐데 그는 왜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까?


그가 말하는 행복이 만족과 즐거움일 리는 없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은 우리 인간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이 사실을 감추고 왜곡시키려는 모든 시도에 차가운 시선으로 맞서는 것, 쇼펜하우어에게는 이것이 인간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행복이다. 즐겁진 않지만 그래도 거짓된 삶은 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기에서 출발했고 결국 우리가 돌아갈 단 하나의 사실 ‘삶이란 단지 우연한 사고’였다는 사실의 주위를 맴도는 것이 그가 말하는 행복이다. 이런 인간은 하루 종일 한 번도 웃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한 번도 후회하거나 화를 내거나 슬퍼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는 이것이 가짜들을 모두 제거한 후 남겨진 행복의 진짜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서양인에게 행복은 ‘좋은 상태’를 뜻한다.


행복이란 좋은 상태, 다시 말해 삶이 원래대로 아무 문제 없이 기능하는 상태이다. 좋든 싫든 삶의 원래 모습이 차가운 금속성이라면 우리의 삶은 쇳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적인 삶이란 무엇일까? 그 안에서 아주 약간이라도 행복이란 것이 가능하긴 한 걸까? 철학에는 이렇게 우리가 생각해 본 적도 시도해 본 적도 없는 삶이 있다.


사람보다 개를 더 좋아했던 쇼펜하우어는 인간혐오주의자가 아니다. 개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에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다. 생각이 없는 개 이지만,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인간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는 인간보다 자신의 삶에 충실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과 산책하는 개를 수없이 쓰다듬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자꾸 세상의 잡담에 흔들리는 자신을 반성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라면 자신의 개에게 기꺼이 선생님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개는 태어난 대로 죽어가는 대로 참 잘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행복은 나나 당신이나 지금 이 정도의 생명활동에 수반되는 지금 이 정도의 생각과 지금 이 정도의 판단이 결국 삶의 전부라는 사실을 수용하는 태도의 문제이다. 어디선가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세상을 지옥으로 간주하고, 그 안에서 열을 피할 수 있는 작은 방을 만들어 그 안에 안주하는 것이 행복이다.’ 불타오르는 지옥이라면 그 안에서 불을 피하기 위한 은신처를 만드는 것은 삶과 세상에 무언가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다. 플라나리아가 빛을 피하는 것은 빛 때문이지 플라나리아 때문이 아닌 것과 같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은 아마 이 지점에 있는 것 같다. 살아 있기 때문에 움직여서 해야 하는 일들, 그런 일들 안에서 우리는 마지막 행복을 찾아야 하는 모양이다.


계절이 바뀌면 나는 예전에 찾았던 한적하고 조용한 장소를 다시 찾는다. 거기서 하는 일이란 그저 ‘일 년이 다시 지났구나’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나로서는 살아갈 날들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연습과 같은 것인데, 그렇게 있다 보면 그게 크게 아쉽거나 두렵거나 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가 했을 그 생각을, 그 회한과 그 평온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 괜찮아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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