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덜 열심히 살고 싶은 워킹맘의 이야기
아이를 키우며 동갑인 친구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동네 맘카페에 아이 동갑 말고 엄마 동갑을 찾는다는 글이 올라와서 동년배들끼리 모여서 한창 추억을 되새김질 했던 경험이 있다. 굉장히 많이 모였었는데, 역시나 급작스럽게 친해지는 사람들은 급작스럽게 와해된다. 몇번의 갈등과 싸움이 있더니 제각각 갈라져서 이제는 만날 수 없게 된 친구들도 있다.
그러면서 이름과 번호만 간신히 알아서 야 자 호칭은 하고 SNS 친구긴 해도 막상 친하진 않았던 친구가 있었다. 동네에서 한 번은 마주칠 법 한데 단 한번도 마주치지 않다가, 갑자기 소아과에서 마주쳤다.
"어! 야!" "어! 너!" 약 30초 정도 서로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각자 아이 이름을 얘기하며 어색했던 것도 잠시 "아이가 아픈 워킹맘"이라는 공통 소재 하나만으로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게다가 아이가 동갑이라 순식간에 이해와 공감이 쌓이는 게 많았다. 최근 들어 뜬금없이 그 친구에게 연락이 오기도 하고, 내가 먼저 그 친구에게 연락해 푸념하기도 했다.
오늘 그 친구의 SNS글에 또 다시 아이가 아프다는 글이 올라왔기에, 연락해서 아이는 어떻냐고 물어보는데 아이가 장염이라며 입원해야 할 것 같다는 소식과 함께 자기는 삼진아웃당할 것 같다고 했다. 삼진아웃이 뭐냐고 묻자, 처음에는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다쳐서 한 번, 두번째는 아이가 집에서 앓아서 한 번, 이번까지 입원해서 휴가 쓰게 되면 합쳐서 세 번 직장에서 아웃당할 것 같다는 거다. 어떡하냐, 워킹맘들 왜이렇게 힘드냐, 서로 위로만 해주다 대화가 끝났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이번 주말에 아이가 아팠다가 극적으로 낫게 되면서 아이고, 효자다 했던 월요일,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와서 당장 아이가 화장실을 몇 번이나 갔다고 했다. 화요일에는 계속해서 아이가 화장실을 가고싶어 한다며 혹시 직장에서 일을 좀 일찍 끝마쳐줄 수 없냐고 했다. 다행히 오전 나절만 좀 컨디션이 안좋았던 모양으로 오후에는 괜찮아졌다고 연락이 왔지만, 아이에게 너무 미안하기도 했고 혹시나 악화되는 건가 싶어 수요일에는 재택근무를 신청해 아이와 함께 있으려고 했다. 그런데 수요일 아침에만 열 번은 넘게 싸웠고, 윽박질러 낮잠을 재우며 내가 뭐하자는 짓인지 한숨이 푹푹 쉬어졌다. 심지어 남편은 직장을 옮기게 되어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곧 전직장이 될 회사에 최선을 다해주는 중이라 늦는다고 했고 결국 아이가 자고 집에 들어왔다.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한 여파 덕에 오늘은 출근해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근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점심시간도 반납하며 일했지만 아쉽게도 일이 끝나지 않아 근무시간을 초과했다. 그래도 다행히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고, 아이도 괜찮은 듯 해보여 열심히 일하다 해야하는 일까지는 마치고 퇴근했다. 적어도 6시를 넘기지 말아야지, 하며.
가는 길에 남편이 전화가 와서, 왜 자꾸 야근을 하냐고 그것도 자꾸 하면 습관이라고, 아이가 기다리고 있다며 평소처럼 내게 장난을 치는데 순간 화가 치솟았다. 자기는 회사 일에 따라서 심한 퇴근 기복을 보이면서 나는 1시간 더 근무하는 것도 안되는 건 왜 안되는데? 싶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또 나도 알지~ 그런데 여보 힘드니까 그러지 식의 달래려는 말투가 자동재생됐다.
사실 내가 진짜 바라는 건 남편의 뻔한 위로나 같은 처지에 놓인 친구의 공감이 아니다. 위로나 공감은 그 상황에 놓인 내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지만, 정작 추운 내 손과 발은 따뜻하게 해줄 수 없다.
내가 정말 바라는 건 더 이상 사람들에게 공과 사를 구분하라고 하지 않는 사회가 되는거다. 공과 사가 적절히 뒤섞여 성공을 더 이상 최고의 목표로 삼지 않는 사회, 그래서 모두 살아가는 것에 집중하면서, 너무 애쓰지 않으려고 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내 아이가 아프고, 내가 아플 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여유있는 근로시간과 충분한 돌봄시간. 그리고 아이가 아플 때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는 보조보호자가 존재할 것. 그래서 내가 아이가 아플 때 회사를 쉬기 위해 끌어올려야 하는 뻔뻔함을 그리고 자연히 따라붙는 죄책감과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 것, 그리고 이런 양육의 부담이 한 쪽에만 치우치게 되지 않는 것. 당연히 아이가 아파? 그럼 부모가 옆에 있어줘야지. 하는 분위기를 조장하는 사회가 되는 것. 더 이상 애는 너만 키워? 하는 말은 듣지 않아도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러한 분위기가 아이가 없는 사람이나 미혼, 고령, 언급할 수 없을만큼 많은 다양한 사람에게도 퍼져나가는 것. 본인의 컨디션이 바닥을 칠 때나, 개인적으로 정말 슬픈 일이 있었을 때 친한 직장동료에게 공감이나 위안을 얻기보다 제도적으로 책정된 상담사에게 찾아갈 수 있게 하는 것. 내 감정상태에 따라 지나친 기복을 보였을 때 권고사직을 내미는 게 아니라 혹시 무슨 일이 있나 먼저 검사를 받아보게 하는 것. 더 이상 너만 힘들어? 라는 말을 듣지 않게 하는 것이다.
공과 사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로봇이지, 사람이 아니니까.
누군가의 작은 바람들과 한숨들을 단지 사적인 부분이라고 무시하게 되면, 그 사적인 바람들과 한숨들이 모이는 집단은 더 이상 이 사회에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게 이 사람이 도태되고, 저 사람이 낙오되면, 단지 사람이 도태되고 낙오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이 도태되고 낙오된다는 것을, 그래서 도태되고 낙오되지 않은 집단은 결국 외로워진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했으면 한다. 그를 기억해주지 않아서, 오로지 도태와 낙오를 피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고자만 해서, 다들 너무 열심히라서 덩달아 열심히 살아버려서. 그래서 우리가 요즈음 외로움에 몸살을 앓으면서도 누구 하나 약한 소리할 수 없는, 아주 쓸쓸하고 고독한 길을 걷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돌아오는 길에 해보았다.
아이를 하원시켰다. 아이는 해맑게 오늘 장난감이 배달왔냐며 즐겁게 집에 돌아갔다. 이 녀석의 장난감을 사주려면 좀 더 열심히 일해야지. 또 열심히 하자는 얘기를 습관처럼 덧붙인다. 열심히 살고, 열심히 해서. 그런 열심인 하루라 오늘도 조금 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