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도시 울산 그 이전의 기억

[二輪紀行] ep. 09 경주에서 울산

by 최기훈
그렇게 인간의 시간과 바다의 시간이 잠시 겹쳤다가 다시 갈라진다.


길은 경주 강동에서부터 시작된다. 돔 형태의 원자력 발전소를 지나 해안으로 내려서면, 풍경은 달라진다. ‘굴뚝의 도시’ 울산을 떠올리면 늘어선 공장지대와 굴뚝연기가 먼저 떠오르지만, 이 길은 의외로 한적한 제주 시골 앞바다처럼 고요하다. 바다와 집들이 겨우 길 하나를 맞대고 이어지고, 마을 위로 갈매기가 떠돈다. 잿빛 공단 대신 바다의 푸른빛이 번진다. 나는 그 아이러니한 조화에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주전 몽돌해변에 이르자 파도가 몽돌 위로 구르며 소리를 내었다. 해변가 텐트에서는 숯불 위에서는 고기가 구워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파도소리에 섞였다. 해봤자 내 또래로 보이는 어른들은 맥주잔을 부딪히며 즐거워했다. 나는 그 장면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괜히 마음 한켠이 시렸다. 그러나 나는 떠나야 하는 사람이다. 나에게는 오토바이가 있다. 오토바이는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린다. 나는 급히 말에 채찍질하듯 스로틀을 쥐며 다시 길을 나섰다.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순간, 풍경은 일순 바뀌었다. 거대한 크레인과 공장지대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철골의 팔들이 바다를 향해 솟아올라 하늘을 찌른다. 공장 굴뚝은 쉼 없이 연기를 내뿜는다. 바다와 숲 대신 철과 불이 이 길을 지배한다. 내 고향에서는 볼 수 없었던 거대한 풍경 앞에서 나는 압도당했다. 도로는 넓고, 그 위를 대형 화물차와 트레일러가 쉼 없이 오간다. 옆을 스쳐가는 거대한 트레일러에 오토바이가 순간 휘청거렸다. 그 무게와 기세가 이 길 위에 있었다.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잘될 수 있는 길이다.”


오래전 이 도시를 수식하던 구호는 아직도 공장 담벼락과 사람들의 삶 속에 남아 있었다. 울산은 한국 산업의 심장이었고, 그 박동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길은 굴뚝과 철골을 지나 바다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순간 시야가 열리며 대왕암이 눈앞에 나타났다.


울기등대에서 바라본 바다는 한없이 깊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얼굴에 소금기가 튀었다. 대왕암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무왕의 왕비, 자의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며 바위 아래 묻혔다고 했다. 어떤 이는 용이 승천하다 떨어져 굳은 바위라 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이곳을 ‘용추암’이라 불렀다. 이름은 시대마다 달라졌지만, 정작 바위는 그 자리에서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오토바이를 세우고 생각한다. 산업의 도시, 굴뚝의 도시라 불리던 울산이 이토록 바람 좋고 푸른 곳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굴뚝이 세운 시간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 바위는 남아 바람과 파도를 맞으며

다음 세대의 바다를 보고 있을 것이다. 굴뚝의 연기와 파도의 물보라가 한 화면에 겹쳐졌다. 떠나는 나의 뒷모습을 바위는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길 위에서 흘러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남는다. 그렇게 인간의 시간과 바다의 시간이 잠시 겹쳤다가 다시 갈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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