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 속 기적에는 그곳이 있었다
2022년 7월 27일, 김한민 감독의 신작인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이 개봉됐습니다. 2014년에 개봉한 '명량' 이후 무려 8년 만에 내놓은 후속작인데요, 개봉 이후 전체 누적 관객 수 7,264,934명을 기록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었죠.
그런데 여러분, 이 영화 보시기 전에 요런 시시콜콜한 TMI 하나쯤 알고 가면 여러분의 지적 수준이 더 높아 보이지 않을까요?
'이순신 장군이 그때 전라좌수사였다는데 그게 뭐지?'
'전라좌수영? 그게 어디 있던 건데?'
이번 글에서는 누군가가 혹시라도 이런 질문을 꺼내 들었을 때 '그건 말이지~'라며 자신 있게 스피드왜건이 되실 수 있도록 해드릴 내용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전라좌도'를 이해하면 나머지는 일사천리!
전라좌수영이라는 키워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라좌도'라는 키워드부터 이해하셔야 합니다. 지금 전라도가 전라북도, 전라남도로 나뉘어 있던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전라도가 전라좌도와 전라우도로 나뉘어 있었는데요, 두 지역을 지도로 표시하자면 대략 이렇습니다.
지도로 보시는 바와 같이 전라좌도는 '전라도 전체 지역 중 동부에 있는 지역'을, 전라우도는 '전라도 전체 지역 중 서부에 있는 지역+제주도(조선시대에는 제주도가 '전라도 제주목'이었습니다!)'를 일컫는데요. 아마 이걸 보신 분들은 대부분 이런 생각을 하실 겁니다.
"아니! 왜 좌우가 거꾸로 돼있죠? 조선시대 사람들 바보 아냐?"
하지만 이유를 알고 나면 방향이 이런 이유가 이해되실 겁니다. 예로부터 동양에서 궁궐을 지을 때, 임금의 자리는 늘 '남쪽'을 바라보게 하여 지었습니다. 이를 일명 '남면(南面)'이라고 하는데요, 낮에 태양이 떠있는 남쪽을 바라보며 항상 올바른 정치를 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지역을 구분 지을 때도 임금이 자기 자리에서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구분했는데요, 그렇게 하면 각 지방의 왼쪽과 오른쪽이 뒤집어지게 됩니다.
이렇다 보니 동서남북을 기준으로 했을 때와 방향이 달라져서 전라도 동부 지역이 '전라좌도', 전라도 서부 지역과 제주도 지역이 '전라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라좌수영은 이 개념에서 조금만 더 확장하면 됩니다.
전라좌수영 = 전라좌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병영
이라는 의미인 것이죠.
전라좌수영의 소속 지역은 시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임진왜란 시기에 전라좌수영의 소속 지역은 지금의 전라남도 보성군~광양시 까지였습니다.
전라좌수영에는 어떤 장수들이 있었을까?
당연하게도 전라좌수영 소속 장수는 이순신 장군 혼자만 있던 게 아니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소속의 수군 편제는 정조 시기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기록하고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조정에 보낸 장계가 상당수 수록되어 있는데요, 그중 임진왜란 초반인 1592년 4월 27일자(음) 장계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 수군에 소속된 방답·사도·여도·발포·녹도 등 5개 진포(=수군기지)의 전선만으로는 세력이 심히 고약하기 때문에, 수군이 편성되어 있는 순천·광양·낙안·흥양·보성 등 5개 고을에도 아울러 방략에 의해서 거느리고 갈 예정으로...
- 이충무공전서 권2 장계1 -
이 기록을 통해 위에 나와있는 5개의 고을과 5개의 진포가 전라좌수영에 소속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데요, 실제로 난중일기나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해당 지역을 맡고 있는 장수들이 전라좌수영 휘하의 병력으로 전장에 나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래에 나와있는 장수들은 전라좌수영 소속의 장수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장수와 관할 지역을 지도로서 다시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 장수 중 대부분은 한산도 대첩에도 참여해서 전공을 세운 것을 볼 수 있는데요, 난중일기를 보면 당시 전투에 참여한 전라좌수영 휘하 장수들의 활약이 나와있습니다.
'순천부사 권준(權俊)이 제 몸을 잊고 돌진하여 먼저 왜의 층각대 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열 급을 베고 우리 나라 남자 한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도 먼저 돌진하여 왜의 층각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쏘아 맞혀서 내 배로 묶어 왔는데, 문초하기 전에 화살을 맞은 것이 중상이고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즉시 목을 베었으며, 다른 왜적을 비롯하여 머리 열두 급을 베고, 우리 나라 사람 한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사도첨사 김완(金浣)은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열여섯 급을 베었고,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이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여덟 급을 베고 또 많이 익사시켰다.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네 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두 척을 쫓아가서 쳐부수어 일시에 불태웠다. (중략) 낙안군수 신호(申浩)는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일곱 급을 베었으며, 녹도만호 정 운(鄭運)은 층각대선 두 척을 총통으로 뚫자 여러 전선이 협공하여 불태우고 머리 세 급을 베고 우리 나라 사람 두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여도권관 김인영(金仁英)은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세 급을 베었고, 발포만호 황정록(黃廷祿)은 층각선 한 척을 쳐부수자 여러 전선이 협공하여 힘을 모아 불태우고 머리 두 급을 베었다.'
- 난중일기 임진년(1592년) 7월 초8일(을축) -
또한 이들 장수와 이순신 장군과는 서로 간의 유대관계도 좋았는데요, 실제로 난중일기 곳곳에 이순신 장군과 휘하 장수들이 서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마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동안 놀라운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데에는 서로 간의 끈끈한 전우애도 한몫했으리라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참고문헌>
『이충무공전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4,『조선시대 수군진조사 Ⅱ 전라좌수영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