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하루

레인쿠버 비앤쿠버

by 아궁이

비 오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대자연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상 같다.


저 높은 하늘에서 빽빽한 나무 숲에 하나님이 물을 주시면 그 비를 흠뻑 맞고

찬란한 녹색을 빛내기 위해 이 시간을 묵묵히 견디는 대자연의 장엄한 사명을 한참 넋을 잃고 본다.

10월 중순부터 본격 시작된 밴쿠버의 우기가 겨울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 년에 반은 이렇게 비만 온다니 신기하다.

이렇게 오랫동안 비가 많이 와서 나무들이 키가 큰가? 어디서도 보지 못한 높이로 솟아 있다.


어떤 날은 시커먼 먹구름 아래 빗줄기가 이어 내리고 누가 가로 지퍼를 열듯이 한쪽 하늘에 해님이 빼꼼 얼굴을 내밀며 찬란한 빛을 비춘다. 이 장면은 보는 이 누구라도 철학을 이야기할 것 같다.

'시몬, 너는 아느뇨. 인생이 어느 순간은 먹구름 아래이지만, 곧이어 하늘에 쨍하고 해 뜬다는 것을.'


아프리카의 우기는 땅을 뚫어낼 기세로 세찬 비가 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적도의 태양이 순식간에 지면을 달구며 수분을 다 날려버린다면, 이곳은 우거진 숲이 촉촉이 젖어 들어 땅을 밟으면 물이 쑤욱 뿜어 나올 정도로 계속 비가 온다. 그렇다고 한국의 장마처럼 불쾌한 습도량도 아니다. 그래서 신비롭다.


잠 못 이룬다는 시애틀에서 한 2~3시간 북쪽으로 올라오면 밴쿠버다.

원래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나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시커먼 분위기에 차분해져서 좋다가도

역시 햇빛이 없는 날이 오래되니 점점 우울해져 잠을 못 이루는 날도 있는 것 같다.

추석 연휴 이후로 들려오는 회사 소식이 아슬아슬해서 생각이 많아져 더 그런 것도 같고......


경이로운 이곳의 자연을 오래오래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를 알게 되었다.

캐나다는 나무를 베어 팔면 부강 해질 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후손에게 아름다운 자연을 물려주기 위해서 절대 훼손하지 않는다고 한다. 미국에 비하면 발전이 더디고 모든 시스템이 느려 욕을 먹기도 하지만,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보존하는 그들의 지조에 존경을 표하는 바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는 더욱 느려터진 이곳이 좋다.

비와 나의 하루.jpg <하루종일 회색 하늘>




아침 7시 30분에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고 정수 물을 한 컵 마시니, 간밤에 쌓인 독소가 싸악 씻기는 듯하다.

11층 높이에서 끝없는 밴쿠버 전경이 보이는 확 트인 거실 통창 앞 내 책상으로 출근을 한다.

가끔은 내가 하지만, 유부초밥, 샌드위치 등 대부분 남편이 빠르게 도시락을 싼다.

이곳의 많은 부모들에게 도시락 싸기는 하루 일과와 지출에서 큰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매일 도시락 메뉴 장을 보고 아침 일찍 요리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니 어른들은 힘들지만, 한국에서는 맛보지 못한 엄마 아빠 손도사릭을 잡수는 아이들은 행복해한다. 도시락용으로 스팸김치볶음밥이나, 냉동 야채와 함께 굴소스베이스로 볶은 볶음밥, 아주 가끔이지만 김밥도 싼다.

그리고 최근 첫째의 요청에 따라 샌드위치 메뉴가 개발되었다.


그리고는 평소 먹고 싶었던 메뉴를 주문하기 바쁘다. 미역국을 제일 좋아하는 둘째는 락앤락에 미역국을 싸 가고, 김치를 싸가는 날에는 친구들이 너도나도 달려와 먹어봐도 되는지 묻는단다.

그 재미로 계속 김치를 싸가고 있다.

1980년대에 북미로 이민한 자들은 K-food시대를 상상이나 했을까?


사랑하는 김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김치는 부모님이 직접 담그신 김치나 전통시장 내에 맛있는 김치가게를 단골로 정하고 종류별로 사 먹어서 비싸다는 생각을 못했던 늘 풍족한 반찬이었다.

한국을 떠나오니 김치는 금치가 되었다. 비싸고 맛이 복불복이다.

이렇게 사 먹는 김치는 처음이라, 입맛에 맞는 김치를 찾으려면 한 동안 경험치를 쌓거나 직접 담가봐야 할 것 같다. 같은 양에 가장 저렴한 것부터 대기업 브랜드 비싼 것까지 먹어보는 중이다.

브랜드 명이 따로 없는 커다란 통에 겉절이처럼 양념도 진하고 너무 맛깔나 보이는 걸로 골랐다. 게다가 가격이 저렴해서 만족했는데, 보기와 달리 씁쓸하면서 맵기만 하고 실온에 둬도 익지 않았다. 이름이 기억이 안 나지만, 김치통에 브랜드명이 없는 것은 일단 제할까 한다.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이 추천한 종류들로 시도하다가 H사와 P사가 꽤 맛있다는 중간 결론에 이르렀다. 양념이 고춧가루뿐인 김치가 대부분이고, 부추라던가 풍성한 한국의 김장김치 속은 찾아보기 힘들다.

썰어진 김치는 애들 이유식처럼 잘게 썰어져 있어서 포기김치를 사고 싶은데, 더 비싸고 양이 적으니 할 수 없다. 아이들이 먹기엔 딱 좋은 크기니까.


중요한 건 평소 비싼 김치, 세일할 때 충분히 사두기.


김치.jpg

<최근 정착한 본가 김치>



여기 와서 인상적인 것은 인종도 다양하지만 마트에 진열된 생필품 아이템의 종류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시락을 싸기 위해 식빵을 산다면, 몇 군데 프랜차이즈 베이커리나 편의점을 가면 몇 가지 중에 고르면 됐다. 그것마저 때로는 어딜 갈까 고민했던 결정장애로서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나열된 식빵을 보고 있으니 입이 떡 벌어진다.

어디를 가나 아시안 한, 중, 일, 베트남, 필리핀, 태국, 인도, 중동, 러시아, 동유럽, 남미 등 다양한 음식재료, 식료품, 한국의 컵라면과 라면 종류도 다양해서 한국음식에 대한 향수가 전혀 없다.

우리 가족은 주로 집에서 가까운 Save on foods를 이용하고, Waltmart나 Fresh mart도 종종 간다. 아이들이 크면서 간식을 찾고 먹는 양이 늘어나니, 코스트코 회원 가입을 하는 게 시급한데 거기는 또 얼마나 방대한 옵션이 있을지 기대된다.




매일 아침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하고 마스크를 챙기던 서울의 아침이 저 멀리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간다. 빼곡한 숲이 뿜어내는 맑은 공기 덕분에 나와 아이들의 비염이 확실히 좋아졌다. 아예 사라진 것도 같다. 거의 약을 먹을 일이 없으며 차가운 공기에 마스크를 하지 않아도 멀쩡하다.

이렇게 좋은 공기와 물을 사용할 수 있어서 참 감사하다.


도시락과 우산을 챙겨주면

첫째가 8시 25분쯤 집을 나서고 남편이 둘째를 데리고 8시 45분쯤 집을 나선다. 남편은 동네 도서관을 자주 애용하는데 건물 전체가 통창인 데다가 책도 많고 랩탑도 할 수 있는 공간이라서 이 계절에 발 시린 den(베란다를 리모델링한 작은 골방) 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인 것 같다.

돈벌이 중이라는 이유로 집에서 가장 환한 거실 한쪽 공간은 내 차지가 되었다.


얼마 전 시내에 나가 들렀던 Breeze coffee에서 사 온 원두를 내렸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식빵 한 조각을 구워 그 위에 썬라이즈 프라이 하나를 올렸다.

메이플 시럽을 한 바퀴 휘 돌리고 빵 한 입에 라테 한 모금.

캐나다에 왔다고 안 먹던 아침을 챙겨 먹으며 풍경 감상하는 여유를 즐긴다.

거실 벽 한쪽 면 전체가 커다란 유리창인 이 집은 처음 보러 왔을 때부터 정말 마음에 들었다.

확 트인 풍경을 보자마자 이 집으로 정하고 싶었다. 첫눈에 반한 집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창문의 왼쪽 모퉁이에서 오른쪽 하늘을 오가는 비행기도 볼 수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그것과 맞닿은 넓은 하늘 거기에 펼쳐진 커다란 구름.

그 아래에 빼곡한 나무 숲이 보인다. 캐나다에서만 볼 수 있는 키가 높은 침엽수가 그림처럼 빼곡히 채워져 있고 그 아래 작은 상자 같은 아파트들이 단정하게 들어서 있다.

그리고 조금 멀리 시선을 두면 우리가 매번 장을 보러 가는 마트와 몰도 보인다.

그 너머로 호수도 보이고 이 거대한 풍경 속 작고 작은 내 존재를 매일 체감할 수 있다.


이 넓은 자연에 기대어 마음에 안식을 얻고

잠시라도 어깨에 짊어진 삶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기에 행복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밤이 되면 빛나는 작은 별들이 창가에 모여들고 함께 잠든다.


아름다운 곳이다.

야경, 달.jpg


올해가 지나면 11년 후에나 풍성한 오로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얼마 전에 밴쿠버에도 오로라가 있었다는데, 그날이었다. 저 초록 빨강 신비로운 빛이 예뻐 사진에 담아 둔 것은 우리가 그토록 보고 싶던 오로라였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