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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인 Oct 08. 2024

아가, 출산 축하한다

5장 경계선(1)





성준이 이거 누나가 아끼던 거잖아. 엄마. 하고서 희주의 손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돼지토끼 알람 시계를 빼앗아 들었다. 그 틈에 따라온 성진이 이젠 아닌데? 하는 바람에 여기저기에서 경악에 찬 반응이 흘러나왔다. 물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아직까지도 노래를 멈추지 못하는 돼지토끼 알람 시계 당사자였다. 성준은 어떤 버튼을 눌러도 진정하지 못하는 시계를 놓고 결국 건전지 두 개를 빼내버렸다. 전쟁 같은 난리통에 겨우 고요를 찾은 집안이었지만, 그게 결코 편안하다 볼 수는 없었다. 누나. 엄마 좀 소파에 앉혀 드려. 나 방에 가서 건전지 좀 찾아볼게. 성준은 파랑 원앙 목각 인형을 죽여버린 리모컨이, 그 또한 건전지가 빠진 채로 중상을 당해 나뒹군 흔적을 보더니 심란하게 중얼거렸다.


“집에 새 건전지가 있을까?”


“없으면…… 뭐, 당분간 혼수상태겠지. 둘이.”


그나마 피해가 적은 소파와 액자가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성준이 안방에 들어서자, 방에 있던 모두가 건전지가 어디에 있었는지 서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몰르것다. 무신 대책을 세우등가 혀야지. 이래 가지구는 없는 간이 다 떨어져블 것어. 이이. 참말로 이산지 뭔지 허게 되믄, 현재 정 든 동무들과도 영영 빠이란 말이지. 그르케 되믄, 뭔 재미가 또 있것냐 이 말이여. 나 말은. 으응. 다덜 요로코롬 갑자기 요단강을 건너는 일은 읎어야 허는디. 참…… 어렵네. 어려버. 이이.”


“그러게요. 어떻게 하다 보니 운 좋게 지금은 살아 남았는데, 며느님 뜻에 따라서 아마도 가차 없이 폐기처분 당하겠죠.“


에쎄 담배가 뻔한 미래임을 확신하며 말했다.


“그대들이 말하는 거처럼, 우리 내외도 그럴 것이다. 왕자마마께서 그리 처분하시겠지. 군자의 도란 냉혹하기도 한 법.”


“그리 된다 하여도. 이젠 정말로 여한은 없습니다. 소첩 이 생에 해보고 싶은 것은 모두 해본 것 같아요. 폐하.”


“하휴, 무신 좋은 방도가 있을 것인디. 아, 오늘 따라 왜 이르케 아이디아가, 베뤼 굳헌 아이디아가, 한 놈도 떠오르지 않는 것인지 몰르것네. 답답허게. 이이.”


“임자두 이제 늙긴 늙었네. 옛날엔 온 세상 재간 다 들구 다니는 주머니 같더니.”


“잉? 재봉틀 자네. 혹시 무신 기똥찬 방도가 생각나기라도 한 거시여? 딱 보니 고런 거 같은디. 맞어? 이이. 맞네. 맞어! 이르케 덥썩 뭔지 말두 안 허구, 진짜루 자네 뭐가 굳한 아이디아가 있는 것이로구먼? 이? 고렇체 또 보믄, 여그서 자네랑 나가 아니믄 울 희주 맴이 뭣에 싸르르 녹는지 아는 이가 어디 있겠남? 그니께, 나 헌티만 언넝 말 혀 봐. 이? 아이, 묵직헌 자네가 뜸을 들여부리니 더 중후혀서 못 참 것어어어. 허허.”


그러고 보니 가죽 지갑이 오래 되어 여기저기 실밥이 터져 나와 있을 법도 한데, 의외로 그런 구석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때마다 희주가 손수 말썽이 날 자리를 미리 손 보고, 곱게 광택이 나도록 바세린을 발라 문질러주던 덕택이었다. 시어머니 애순에게서 물려 받은 브라더 미싱기를 발로 밟아 굴리던 젊은 희주의 골똘한 얼굴은 이 둘 만 아는 추억이나 다름 없었다.


“역시. 눈치가 백단, 아니, 천단이야! 별 건 아니구. 자네 그냥 성준이 좀 이리로 가까이 데려고 와 줘.”


“이이? 그라믄 뭐가 되야?”


“자네 지금 있는 자리 바로 뒤에 노란색 선물 박스 보여? 거기 위에 있는 글귀 보면, 분명히 성준이가 분위기를 풀게 될 거야.”


용케도 성준은 그 잠깐 사이에 새 건전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냈다. 그는 AAA가 적힌 건전지 두 세트를 들고서 제조일자가 언제였는지 확인해 보더니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렸다.


“나가기 전에 재봉틀님이 주신 미션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지금 뭐라도 해볼까요?”


마음이 급한 에쎄 담배가 크게 소리쳤다.


“이이. 그런 것이라믄 걱정마러. 삼춘이 타이밍 좋게 다 알아서 헐 텐게.”


성준이 상황을 모르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 즉시 검은색 가죽 지갑이 온몸에 모든 힘을 끌어 모아 관리 잘 한 가죽피가 가진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광택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준이 괜히 방 안을 싸악 한 번 훑어보더니 지갑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가만히 시선을 두었다.  


“남자는 말여. 그 으그은허게 풍겨나오는 간지 같은 것에 환장허는 뭔가가 있는 거시여. 그 뭐라구 혀야 허냐. 오래 묵어서 오히려 더 멋이 흘러 넘치는 그런 거슬. 이?”


“빈티지.”


“이이! 고렇지. 고거시여. 나가 출신 공장이 쫌 구수혀서 글치. 암말두 안 허거나, 아니믄 내 말이 안 들려불믄 이이, 꽤 괜차녀.”


“엄마야! 진짜! 염희주씨 아드님께서 홀린 듯이 다가가네?”


에쎄 수 0.1이 정말이지 놀랍다는 투로 호응했다.


“막내도 한 멋쟁이 하니까, 역시, 우리집 재간둥이 어디 안 갔네?”


재봉틀이 작전에 성공한 것이 기쁜 듯 웃었다. 성준이 그들  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건전지를 미싱판 위에 대충 올려 놓고서 가죽 지갑을 요리조리 뜯어 보기 시작했다. 우리 아부지, 지갑 관리 참 기막히게 잘 하셨네? 홈쇼핑 MD로 일하며 여러 종류의 의류를 다룬 경험이 있던 그는 단박에 알아챘다. 이것은 보통의 애낌으로는 절대로 낼 수 없는 고급짐이다.


“어이, 아들램. 나랑 이르케 오래도록 가까이서 보는 것은 또 첨인 거 같어어. 긍디 말여. 지금은 고런 것 보담두. 쩌어 것을 눈치 채부러야 허거든? 저기 저 노오란 개나리 같은 상자 함 봐줄 수 읎을까나? 이?”


성준은 가죽 지갑이 하는 말을 얌전히 듣고서 그대로 시선을 옮겨 곱게 뚜껑이 닫혀 있는 노란색 선물 상자 위에 시선을 두었다.


아가, 사랑하는 우리 지연아. 출산 축하한다.


단정한 글씨로 짧게 남긴 메세지. 성준은 그 글귀를 보자마자 자신의 어머니 희주가 곱디 고운 필체로만 골라 쓴 것임을 알아챘다.


“왕자마마께서는 참 섬세하기도 하시지.”


윤조 에센스가 그의 변화를 찬찬히 관찰하며 흐뭇해 했다.


“얼른 열어 봐.”


재봉틀이 권하자 성준이 상자로 손을 옮겼다.


“와아—! 뭐야, 저거? 아기들이 입는 배냇저고리 아니에요?”


“이이, 너 참말루 모르는 거시 없댜. 똑순이.”


“꽤 오래도록 저 작고 고운 것을 준비하셨더랬지.”


“아바마마께서 출근하시면, 어마마마께서는 저 저고리만 내내 붙들고 계셨다. 헌데, 저고리를 다 짓고 난 다음 날, 아바마마께서 갑자기 붕어하셨지. 어찌 명이라는 것이 그리도 절묘한 것인지는 몰라도 하필이면 저 저고리가 생기니 그러한 일이 일어나나 싶더랬지. 그후로 우리도 돌아가신 아바마마 생각에 배냇저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고.”


성준은 저고리를 말갛게 들여다보다가 희주와 성진을 급히 불러 모았다. 확실히 새로운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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