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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인 Oct 09. 2024

속이 꽉 차는 저녁 식사

5장 경계선(2)






확실히 새로운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노오란 댕기가 붙은 앞섶을 들고 만지작거리는 성준을 본 성진이 얼른 그의 곁으로 달려 들었다. 이거 뭐야? 너무 예쁘다아. 그도 손을 들어 저고리 소매 부분을 조물딱거렸다. 엄마, 이거 우리 짤콩이 주려고 만드신 거예요? 아이의 태명을 부르며 감격에 찬 성준의 얼굴을 본 희주는 괜스레 딱딱하게, 그래. 하고 말았다. 엄마.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성준이 무언가에 북받혀 울먹거리자, 성진이 옆에서 야, 너 왜 그래? 안 그래도 난 이런 거 못 받아서 시샘 나는데, 너 그렇게 오버하면 나 잠 못 자. 해버렸다. 성준은 그럼에도 멈추지 못하고, 거의 눈물이 흐를 것 같은 눈망울로, 사실 지금 지연이 병원이야. 조산기가 있어서 같이 못 온 거야. 고백해버렸다. 성진은 놀라 방방 뛰기 시작했다. 얼른 올케한테 가라고. 이럴 정신이 어디 있어서 여길 와서 이러냐고. 희주는 그런 성진의 등을 살짝 치고, 조용히 좀 해 봐라. 준아, 그래서 아가 상태가 얼마나 안 좋니? 조산기가 언제부터 있었어? 하고서는 차분하게 얼렀다. 성준은 자신도 그에 대한 특별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지 우물거리다가 몰라요. 우리 지연이는 원래 힘든 거 잘 내색을 안 해. 내가 아무리 살피려고 해도 내내 그러기는 어렵잖아요. 하고는 시무룩해졌다.


“울 희주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쳐지나가는 구먼.”


“그래서 처음에 며느리감을 보자마자 걱정했잖아. 애살스럽게 앵겨도 속은 무던히 깊어서 자기 힘든 건 절대 내색 안 할 거라고.”


결혼할 사람을 데려오겠다던 성준의 말에 제상과 희주가 맞이한 이는 웃는 입매가 사랑스러운 지연이였다. 고급 한정식 집에서 저녁 식사를 즐겁게 마치고 아이들의 배웅을 받아 집으로 돌아온 희주는, 그날 밤 제상과 함께 침대 맡에 앉아 에센스를 나눠 바르며, 운명처럼 제가 시어른들을 처음 봴 때 입었던 진주빛 투피스를 똑같이 입고 왔다며, 자신이 묻는 말에 수줍게 웃던 게 자꾸만 어른거린다며, 더러 어려워 하며 쩔쩔 매던 모습도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르겠다며, 들뜬 목소리로 오래도록 종알거렸었다.


“서러븐 세상 살아 본 세월이 있어서 그른지 새 식구 오믄 잘해줄거라구 을매나 그럈어. 딸램은 워디 가서도 쉽게 휘둘리지 않었음 허는 게구. 며느라기는 오믄 어쨌거나 별 것은 읎어도 잘해주구 싶었을 거여. 자기헌티는 서룬 맴 안 들도록. 이이.”


재봉틀과 가죽 지갑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잠잠히 생각에 잠겨 있던 희주가 입을 열었다. 준이 너 담부터는 아가가 나 걱정한다고 티내지 말라고 하는 거 있어도 싹 다 숨김 없이 보고하고 그래라. 그렇게 애 혼자 버티게 두는 거 아니다. 그렇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성준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근데 지연이가 엄마 미역국은 꼭 먹고 오라고 해서 그것만 먹고 갈게요. 라고 대답했다. 그 사이에 잠시 화장실에 가서 볼 일을 보고 나온 성진이 자신의 발바닥에 쩌억 달라 붙은 무언가를 떼어내며 주의를 끌었다.


“엥? 저거 삼춘한테 있다던 네잎클로버 아니에요?“


“이이, 저거? 저거슨 순도 100%의 싸랑~ 이여. 은제 일기장에서 빠졌는 가벼.”


“허면, 저것은 뭐가 다른 것이냐?”


“아. 저거슨요. 제상이 형님이 올림픽 대공원을 샅샅이 뒤쟈가꾸 하투 모양이 쪠일 분명허구 이뿐 것으루다가 고르고 골라서 희주헌티 준 것이여요. 부적으루다가.”


“부적이라 하였느냐?”


본윤 에센스가 의아해 했다.


“아이구. 둘이 뽑뽀혔따고 직장에 소문이 나브러서 희주가 여사원들헌티 왕따를 당허니께, 싸랑의 힘으루 극복허라구 준 것이지요.”


“엄머, 엄머. 눅진하니 달다 달아!”


“고때는 뭐, 인간 밤양갱이가 따루 읎엇지. 이이.”


성진은 희주에게 네잎클로버를 내밀었다. 자기가 대청소하다 말고 엄마, 아빠 연애시절때부터 쓰던 교환 일기를 모조리 다 읽었다고 실토하면서 말이다. 희주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깔깔거렸다.


“역사를 지우는, 영원히 용서 받지 못 할 만행을 저지를 뻔 했는데, 다행히도 깨닫는 바가 있어 위기를 넘겼군.”


교환 일기장이 오래된 종이에서 나는 달달한 먼지 냄새를 풍기며 한마디 던졌다.


“저 입 무거운 냥반이 첨으루 말을 다 허네. 딸램이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헐까봐서 영 답답했는가벼. 이이. 여보슈. 일기 냥반. 나가 그 짝이 비밀 교환 일기장이라서 대신 햐서 동무들헌티 라뷰 스또뤼를 말혀 봤눈디. 워쩌 괜찮었나 몰라. 이?”


그러나 이후부터는 일기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희주는 성진에게서 돌려 받은 순도 100%의 사랑~을 이리저리 살펴 보다가 일기장 한 권을 골라 어디에 끼워 넣었다. 엄마, 그건 그렇게 그냥 넣어도 돼? 성진이 궁금해 하자, 희주는 싱긋 웃으면서, 야, 본지가 30년도 더 됐다. 척하면 척이지. 하고 말았다. 성준이 제상의 지갑 안에 있던 순도 100%의 행운~을 발견하는 바람에 방 안이 아주 왁자지껄 했다.


“더 지나면 다 불어터질 텐데.”


멀리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잡채가 그대로 담긴 접시가 투덜거렸다.


“오실 거야. 곧.”


그나마 한술 떠 먹힌 국그릇이 다 식은 미역국을 담고서 말했다. 얼마 안 있어, 희주와 남매가 부엌으로 다시 들어섰다. 이거 다 식어서 먹겠나……. 희주가 중얼거리자, 남매는 뭐 어때 하고는 대결하듯이 아까는 건들이지도 않은 반찬들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희주는 국이라도 좀 덜 차게 먹어야 한다면서 가스불을 켰다. 엄마! 이거 잡채 어떻게 했어? 나 레시피 좀! 하고 소리지르는 성진의 옆에서 밥을 볼 한 가득 넣고 나도! 나도! 우리 지연이 주게 하는 성준이 있었다.


“둘 다 먹고 싶으면 엄마한테 와서 얻어 먹구 가. 귀한 음식 망쳐서 버리지 말고.”


“에이, 우리 도마님. 괜히 찡하고 좋으시니까. 심술 맞게 말씀하신다.”


“흥. 미운 놈들. 지 엄마가 무슨 생각으로 밥을 하셨는데. 그 마음 하나 몰라선 지지고 볶고. 아주 다들 미워 죽겠어.”


“그래도 말이다. 다신 안 본다 어쩐다 안하고 잘 풀렸다 아니가. 내 보이 그거면 된 거 같으다. 식었다 해도 저래 며칠 굶은 아들맨치 잘 먹기도 하고 말이지.”


“맞아. 이 분위기 나쁘지 않아. 지금도 봐. 이 끓는 국 냄새. 엄청 좋잖아.”


“이제는 허전한 마음이 좀 나아지셨을까?”


냉장고가 내내 그 생각 뿐이었다며 덧붙였다.


“당연하지! 내가 최정예들로만 골라서 낙하시켰는 걸!”


통참깨 통이 자신만만하게 답하자, 그 뒤를 따라 많은 이들이 희주의 허기를 달래려 최선을 다 했음을 어필했다. 그리고 그들의 파이팅을 들은 것처럼 남매는 식탁 위를 깨끗이 전멸시켰다. 희주는 배가 부르다면서도 자신이 만든 음식들을 마저 먹어치우는 남매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그 깊던 허기가 가시고 자꾸만 눈두덩이 쪽이 뜨끈해지며 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주책이다. 희주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얼른 끓는 국을 한술 떠 먹어보았다. 앗 뜨거!


“엄마아! 엄마, 괜찮으세요?”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희주에게 달려 들어 그의 안부를 물었다. 희주는 결국 비집고 나와버린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것들 때문에 어깨를 한참동안 들썩거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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