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경계선(3)
“우시는 건가?”
뜰채가 걱정스럽게 묻자, 경황 없이 희주를 달래던 성준도 똑같이 물었다. 양쪽 눈을 손으로 가린 희주가 또 웃음 소리를 내자, 성진이 엄마가 울긴 왜 울어 웃는 거지. 하고 말았다.
“소리나 입술을 보면 웃으시는 거 같긴 한데…….”
“근데 또 눈을 계속 가리고 계셔서 저게 흐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단 말이죠.”
“아, 내가 너무 국을 뜨겁게 끓여서 충격 받으셨나? 아니……, 그치만 제가 원래 국을 끓이면 그렇거든요? 어머니도 아실 텐데…… 왜 하필 가스 불 끄기 직전에 가장 뜨거운 국물을 떠 드셨을까요……?”
낮은 스텐리스 냄비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중얼거렸다. 그때 희주가 드디어 얼굴을 드러냈다. 눈가가 촉촉해진 그는 잔뜩 젖은 속눈썹을 깜빡이며 아이 같은 눈빛으로 생글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성진이 엄마, 그렇게 웃다 울다 하면 엄마 똥꼬에……, 하고는 성준에게 입막음을 당했다. 누나는 무슨 로희한테 하듯이 그래. 짭짤한 성준의 손맛을 정통으로 맛 본 성진이 오만상이였다.
“아이고. 우리 어무이 웃겨 죽네. 죽어.”
원목 도마가 이제는 걱정을 내려 놓고 장난기를 보탰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다들 보기 좋구나. 엄마 허전함도 가신 거 같고.”
스텐리스 들통이 한 방울 남은 물방울을 마저 떨어뜨리며 말했다. 뜰채가 그런 그를 힐끗 보더니 말을 걸었다.
“강원도 너, 이제 곧 자리로 들어가겠네?”
“어. 나 인제 다 말랐다.”
희주가 마침 은은하게 감도는 가스불에 적당히 마른 들통을 발견하고서 앞으로 끌어 왔다. 그 옆에 있던 성진이 자신이 하겠다며 손을 들었다. 순식간에 정리가 시작 됐다. 원목 도마는 성진이 들통을 싱크대 아래 수납장에 넣고 곧바로 스텐리스 뜰채를 집어드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아마도 그 둘은 다음 쓰임이 있을 때까지 꼭 붙어서 지낼 것이다.
“좋을 때다.”
도마가 히죽거리는 모습을 본 과도가 그제서야 스텐리스 들통과 뜰채의 분위기를 알아챘다. 성준이 기세에 맞춰 빈 그릇을 몽땅 끌어 와서 설거지 통에 담았다. 그는 기름이 묻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간해서 구분해 놓고 수세미에 세제를 적당히 풀어 거품을 냈다. 고무장갑이 자신이 쓰이는 걸 기대했지만, 성준은 아직 손이 느리고 서툴러서 장갑을 끼면 그릇이 잘 닦였는지 알기 어렵다며 사양했다. 희주는 남매가 싱크대 통 앞에 나란히 서서 한 쪽은 세제를 묻히고 한 쪽은 깨끗한 물에 그릇을 헹궈 건조기에 올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제 뭐하시려나?”
희주가 원목 도마의 관심을 받으며 윗 찬장을 열어 실리콘 반찬통을 꺼냈다.
“며느리 주실 거 챙기시려나 봐요.”
비워진 식탁 위에다가 서랍 한 쪽에 고이 접어 둔 황금색 보자기를 깔고 지연을 위한 찬과 국을 싸는 희주의 손길이 편안했다.
“다복하고 좋다.”
냉장고가 멀리서 그 모습을 감상했다. 희주는 이제 다용도실에 넣어 둔 과일 박스에서 배와 단감을 꺼내고, 냉장고로 가서 시원하게 보관해 둔 오렌지를 몇 개 챙겼다. 성준이 마침 세제가 묻어 미끌한 손을 헹궜다. 지연이가 시원한 오렌지는 좀 먹지? 원래 그거 좋아하잖아. 오렌지 더미를 건네 받으며 성준이 환하게 웃었다. 희주가 그의 옆으로 바짝 다가가 싱크대 선반 위에 있던 베이킹 소다를 꺼내고 성준에게 과일 씻는 법을 일러주었다. 설거지는 금방 끝났다. 성진은 적당히 손을 털고 희주가 싼 음식들을 보며 멀뚱히 있었다.
“언니! 먹을 과일 깎아야죠!”
과도가 제 차례를 알고 재빨리 재잘거렸다. 성진이 싱크대 선단 한쪽 위에 성준이 씻어 내려 놓은 과일 쪽으로 다가갔다. 희주와 성준은 그 사이에 지연이 요즘은 뭘 가장 잘 먹는지 바뀐 취향은 없는지에 대해 묻고 답하며 간단한 요리법을 얘기하는 중이었다.
“입맛 없을 땐 누룽지도 괜찮은데. 엄마도 산모일 때, 그거 많이 드셨다면서요.”
밥솥이 이전에 있던 밥솥에게 전해 들은 내용을 기억하며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보다 고소한 누룽지 밥을 만들 때에는 어떤 쌀을 써야 하는지, 냄비에 고르게 밥을 누르고 싶을 때는 어떻게 밥을 펴야 하는지 등등. 그에 양념 통들이 고운 죽을 먹는 것도 괜찮다며, 간장 간은 어떻게, 참기름은 또 어떻게, 같이 나서서 너도 나도 신나게 떠들어댔다. 어느새 홀로 거실 소파에 앉아 과일을 깎던 성진이 희주와 성준을 불렀다.
“모두 앉기에는 좀 좁겠지?”
가죽 소파가 걱정을 내놓자, 가족 사진 액자가 준이 오빠가 바닥에 앉으면 될 걸? 하고 말았다. 거실에 있던 물건들 사이에 왠지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뭔가 씁쓸해요.”
스투키 화분이 먼저 그랬지만, 그 말에 누구도 이렇다 할 말을 붙이지 못했다. 성진이 로희가 요즘 빠진 티니핑이란 장난감이 얼마나 위험한 장난감인지를 성준에게 말했다. 깔깔 웃는 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건들은 그들의 웃음 소리에 같이 동화될 수 없었다. 물론 할 말이야 많았다. 예를 들자면, 정말로 합가를 할 건가요? 같은 것들이었다.
부서지자마자 굴러 떨어져 가죽 소파 밑 어딘가, 오래도록 쌓인 먼지 구덩이에 처박혀 있을 파랑 원앙 목각 인형의 부리는, 마치 처음부터 이 공간에 없었던 것처럼 그 누구에 의해서도 거론되지 못했다.
“잊혀진 거지. 그 사이에.”
만일 누군가가 그것의 존재를 안대도, 다시 몸체에 부리 조각을 이어 붙인다고 해도, 그는 결코 소생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까진 거지.”
가족 사진 액자와 낡은 가죽 소파가 딱히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를 말로 상황을 갈무리했다. 희주는 이제부터 은행원으로 근무했던 옛 경력을 살려 금융 경제 공부를 시작하고, 일종에 노후 대비 자금을 마련해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비록 성준의 1억 3천이 주택 조합원 분담금으로 잡힌 채, 그 구간이 개발 되는데 여러 규제가 설정되어 곤란한 상황인 건 맞지만, 그건 날린 게 아니라 묶인 것에 가깝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모두가 긴가민가한 얼굴을 하면서도 뭐가 맞다 틀리다 평할 수 없던 차에 성준의 스마트 폰이 요란하게 빛났다. ‘장모님’이라는 글자에 놀란 그가 통화를 시작했다. 성준의 말 한마디, 작은 표정 하나, 그리고 반대편에서 가느다랗게 새어나오는 나이 든 여성의 다급한 목소리가 집 안 모두를 곤두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화를 끊은 성준이 지연이가 지금 막 진통을 시작했대요. 라고 내뱉는 순간, 어둡게 가라 앉아 먹먹해진 베란다 창문 밖으로 눈 바람이 세게 부닥쳐 왔다.
새봄이 오기 직전, 겨울의 아이를 맞이 하기 위해 이 씨 집안 사람들이 서둘렀다. 그들이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현관문이 차갑게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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