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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인 Oct 12. 2024

경계선의 탄생기

라 적고 아무 말이나 할 거 같음






작년 시월부터 진짜 제대로 써 보고 싶었다. 소설이든 뭐든. 내가 만든 걸 누군가에게 보여줄 때 결코 부끄럽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려면 나는 목 마른 이가 되어야 했다. 다행히도 그 시기에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어떤 이야기든 그 이야기가 가지는 있는 고유의 형태감과 그 형태에 탁월하게 들어 맞는 요소들을 기가 막히게 소화해서 꼭꼭 씹어주시는 분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스승이 주는 물을 흠뻑 받아도 채 빨아 먹지 못하던 콩나물 시루는 어느새 경계선을 완성할 만큼 단단히 자랐다. 잘했고 아니고는 밀어두고 일단 브라보다! 히히.


  

24년 3월 3일 일요일. 경계선의 시작.


나는 뭔가를 쓰려고 머리를 짜기 보다는 우연히 뭘 보다가, 말하다가, 듣다가 소재를 잡는다. 마녀빵집도 우리 죽은 댕댕이가 내 꿈에 나왔어. 믿어져? 라는 인터넷 게시글에서 번져 나왔다. 경계선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작가로서 내 관심사는 온통 죽음이기 때문에 당연히 연결지을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이 시기에는 이 소설이 우선적으로 집필될 차례는 아니었다. 스승님이 이끄는 시나리오 팀에서 자살자가 저승에 간다면? 이라는 소재로 OTT 8부작을 쓰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4월 23일에 첫 소설 마녀빵집이 나왔다. 얼마 안 가 러시아, 대만 대형 출판 그룹과 출간 계약을 맺었다. 6월 경에 초판이 다 나가고 나서 이래저래 더욱 신나고 재밌는 일이 있나 기대에 차 있었다. 여기서 신나는 일이라는 건 별 건 없다. 그저 이 일을 비롯해서 다음이라는 기회가 보다 더 안정적으로 다가오길 바란 것. 그런데 인생이란 건 그리 극적이지 않다. 대충 직장 다니고 대충 먹고 자고 하다 보니 시간만 흘렀다. 쓰는 극본도 길을 잃고 진전 없이 뱅뱅 돌았다. 원래 뭐든 이렇게 애쓰다가 어느 날 능력치가 비약적으로 성장해버린다는 걸 나는 안다. 난 어릴 적부터 그런 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내 불만스러웠다.


성장통이라는 건 그렇다. 내가 온전히 마디마다 지니는 열감을 다 느끼고 앓아야지만 비로소 그 통증이 가신다. 그래도 뭐 시발이지. 앞은 하나도 안 보이니까.


그러던 중에 약 15일 후가 마감인 공모전을 하나 만났다. 전부터 같이 일할 기회를 옅보던 곳이었지만, 빛나는 신예 작가들과의 협업이 줄줄이 있는 프로덕션이라서 갓 나온 나는 좀처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불안할 때에는 그냥 날 링 위로 던져 놓고 어떻게 싸우는지 지켜 보는 게 최고다. 굴 파고 들어가다가 보면 결국 도착하는 곳은 늘상 내 마음을 건드리고 있던 대체 왜 살지? 같은 질문일 테니까. 때문에 일단 모든 감각을 이 공모전 앞으로 정렬했다. 경계선은 그렇게 얼렁뚱땅 탄생했다.


 

작업 루틴: A4 용지를 세로로 반 접어서 상단 왼쪽에 날짜를 적고 제목 소제목 컨셉을 적는다.


나는 이야기를 구상할 때 번호를 매겨서 장면을 쓰고 계산한다. 이를 시나리오에서는 씬 넘버링이라고 부른다. 소설임에도 지면을 최대한 경제적으로 쓴다. 글자 수를 계산해 서사 덩어리를 정리하다 보니 대체적인 형태가 금방 갖춰지고, 공모작으로 제출은 가능했다. 물론 광탈 예상은 덤.


이후에 나는 명작을 쓴 여러 감독의 영화를 보며 구조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게 많아서 공부 삼아 보다 보니 뒤늦게서야 명장의 정수를 만난 경우가 태반이었는데, 이때 운명처럼 만나게 된 작품이 기생충이다. 시나리오를 먼저 읽었던 나는 이 작위적이고 빠른 속도감을 어떤 식으로 설득력 있게 화면에 담아냈을까 싶었다. 특히 기우가 과외 선생님으로 면접을 보는 날, 저 책상 씬을 대체 어떻게 연출해서 어색하게 뜨는 지점들을 무마했을까? 너무 궁금했다. 마침 부산으로 휴가를 가서 친구를 꼬셨다. 보자. 이거.


우와아아아아아— 짱이다.


여행 내내 짱 연발. 나도 저렇게 쓰고 싶어 연발. 그런데 뭐 그렇게 쓰고 싶다고 해서 다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그렇게 쓸까만 내도록 고민했다. 캐릭터. 캐릭터가 움직여야 하는구나. 집안에 있는 물건들이 훨씬 더 능동적이게 변해야 하고 자기가 죽고 사는 문제를 더욱 신중하게 골라야 해. 놀래키자. 읽는 사람들이 놀라야 재밌지. 어? 여기서 이렇게 나온다고? 하도록 지뢰를 숨겨 두는 거야. 그런데 그런 일을 대체 어디에서 해야 하는 거지? 그러다 보니 다시 또 답답증이 도졌다.


      

구글에 개인 홈페이지를 작성하면서 도메인을 사는 방법을 찾던 8월



만나는 방법. 내가 재밌는 걸 보여줄게 하고 꼬셔서 읽게 만들 방법. 그런 것들을 또 연구하며 골치를 얻었다. 한 때 뮤지컬 계에서 아이돌을 주연으로 세워 티켓 파워를 보여준 시절이 있었다. 찐 뮤덕들은 분개했다. 그런데 그 당시에도 나는 산업이라는 건 저렇지 않나? 산업에서 팔리냐 팔리지 않느냐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고려될 지점이잖아. 하고는 누가 보면 대문자 T인 견해를 내심 뒀다. 그리고 그게 갑자기 내 인생으로 들어왔다. 어째 뭐 소설 하나 냈더니 아는 사람들은 그동안 그런 꿈이 있었냐며 놀라워들 하시는데, 사실 여전히 그게 꿈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냥 쓸 만 하니 쓰고 써 보니 할 만 해서 쓴다. 아직까지는 글 쓰는 내가 어떤 자아인지 정돈하지 못한 상태라서 일단 상품 제작자 정도의 마인드다. 그리고 그런 마인드가 여실히 내 소설을 읽는 이들에게 가 닿을 거란 것 쯤은 예상한다.


간단히 말해 역량 부족이다. 다만 노력하고 채우고 다듬어 가고 있을 뿐.


도메인을 사서 개인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까지는 좋은데, 독자 유입은 어떻게 시키지? 그 지점에서 나는 뾰족한 수를 잡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우선은 홈페이지 개설을 중단했다. 후에 필요하면 바로 열 수 있도록 데이터는 남겨 두고서. 그러던 찰나, 대형 플랫폼들이 일반인 연재가 가능한 블로그나 매거진을 어떤 식으로 운영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렇게 8월 말, 카카오 브런치로 자리를 튼다. 그 가운데 공모전 결과도 알게 된다. 단 1명의 수상자를 뽑던 그 프로덕션은 시상을 진행하지 않았다. 논란 사이에서 본선작 14편을 공개했고, 그 중 내가 있었다.


친구가 그런다. 야, 너 뭐냐. 될 놈이냐? 마침 출판 프로젝트에서 소설 공모 부문이 신설 된 것까지 발견한 나에게 그는 평했다. 그의 말처럼, 나도 될 놈 될에 될을 맡은 놈이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미지수다. 내가 쓴 경계선이 파트너로 선정된 출판사에, 정확히는 내 글을 같이 보고 단행본으로 편집해 판매까지 해야 하는 입장의 실무자들에게 매력적인 걸 넘어 서서 사내 기조 정신에 부합하는 찰떡의 소설이냐 하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6장 무명을 붙여 연재하지 않고 남겨 두었다. 성준이가 장모의 전화를 받고 전환이 이루어진 채로 숨 고르는 시간을 잡아둔 것이다. 결국 캐릭터는 각각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찾아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자유의 지점을 잘 골라 잡아서 생사고락 앞에 여러분을 세울 것이다. 그런 훌륭한 장면이 나올 수 있도록 그동안 잡아 둔 시간을 촘촘히 쓰고 있겠다.


약간 넘겨 짚어 보자면, 브런치 스토리 팀이 소설 파트에도 관심을 보인다고 느낀다. 기업이 어떤 사업 부문에 뛰어 든다는 것이 한시적일 수야 있지만, 일단 판은 깔린 게 분명하니까.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사는 나같은 인물은 지금을 고마운 기회로 여기고 발 맞춰 갈 뿐이다. 이 또한 생사의 문제니까.





긴 글이었네요.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도 무사하셨습니까? 어떤 경계선이 여러분들을 살게 끔, 혹은 못 살게 끔 합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택해서 나아가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요.


저는 부지런히 움직여서 차기작을 들고 오겠습니다. 여러분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무심결에 놓칠 생각이 없거든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잊히지 않으려고 애쓰다 넘어지지 않도록 찬찬히 준비해서 무사히 올게요. 건강하시고, 다시 만나는 날까지 웃으실 일이 제법 있으시길!








 

이 글의 시작이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hansui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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