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만나서
**본 게시물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1986년 작품 천공의 성 라퓨타를 15분까지 분석해 쓴 것으로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웃집 포뇨의 움직이는 성이라니. 이런 혼종이 또 어디 있나.
2024년 10월 29일. 약 오후 3시 30분경. 친구와 카톡 하던 중에 이런 맛 소설을 좀 써 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다가 나온 콘텐츠가 바로 이 브런치 북이다.
아직 제목조차 완전히 정해 놓지 않은 미래의 나 녀석이 쓸 소설은 자그마치 장르는 로맨스 판타지요. 남자 주인공은 상 호랑이 같고, 여자 주인공은 상 여우 같은, 뭐 그런 거다.
여기까지만 보면 뭐, 그래. 그런 아이디어를 낼 수는 있지. 싶으실 거다. 그런 동시에 야, 그래서 너 그걸 어떻게 지브리스럽게 확장해서 쓸 건데? 하고야 말 것이고.
내가 아는 스토리란 일종에 규칙과 일련이 있고, 그걸 8개의 조각으로 나눠서 얼마나 새롭고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주느냐로 사랑받을지 그러지 못할 지가 결정된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그중 맨 처음 조각, <만남>을 아주 잘 그려 뒀고, 또한 탁월하다.
하늘을 나는 전설의 성 라퓨타의 보물을 물려받았음에도 자신이 왕녀임을 모르고 살았던 시타는 같은 왕족이지만 다른 혈족인 무스카에게 납치되어 비행 크루즈에 붙잡혀 있다가, 해적 도라 일당의 습격을 틈 타 도망쳐 지상으로 추락한다. 같은 날, 야간 근무 도중 심부름으로 야식을 사 오던 파즈는 광산으로 떨어지는 푸른빛을 보고 달려와 하늘에서 내려오는 시타를 구한다.
위 장면은 파즈의 캐릭터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후에 시타가 눈을 뜨고 둘이 만나는 장면을 기다릴 수 있도록 만든다. 저 높은 채굴장 거대 도르래 전망대 위에서 극악의 난이도로 스쿼트를 한 파즈에게모두들 도대체 힘이 얼마나 센 거야? 둘 다 갱도로 떨어져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의문을 만들 수 있다. 그런 후에 다시 하긴 영화 주인공이니까. 쉽게 죽일 수야 없지 않나? 하고 으레 넘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니다. 지브리는 이런 지점까지 완벽하게 고려했다.
거꾸로 밟아 올라가보자. 여주인공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그를 무사히 받아낼 정도로 힘이 무지 센 남주인공이 필요하다면? 근육질을 가진 한창 때의 소년이면 된다. 그 소년이 근육질을 가지려면? 광산에서 노가다를 하며 자라면 된다. 어린 그가 왜 노가다를 해야 하는가? 그는 부모를 잃어 일찍이 돈을 벌어야 했다. 어떤가? 이만하면 시타를 공주님 안기로 만날 만하지 않은가? 사실 이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이들이 만날 수밖에 없는 확실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조금 더 공통분모를 만들어 놔야 한다.
약 10분 후, 아침이 밝고 파즈가 사는 집이 나온다. 파즈는 협곡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언덕 집을 택해 사는데 대체 왜 하필 이런 장소일까? 보는 입장에서는 그저 아름다운 자연 광경을 눈이 부시게 표현한 장면들이라 놀랄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 또한 지독한 설계다.
파즈는 비행기와 비행에 진심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 또한 비행기 덕후로 자란 케이스다. 그러니 당장이라도 상공에 닿아 비행기를 띄울 수 있는 집이야말로 그가 살 수 있는 최적의 보금자리가 아닐까?
마찬가지로 파즈의 집에서 깨어난 시타는 또한 그렇다. 그는 나팔 소리에 깨서 지붕 위로 올라가 파즈와 인사를 나눈 후 그런다. 어머? 그런데 나 어떻게 살았지? 분명히 비행기에서 떨어졌는데? 일종의 자기 자신이 가진 비상한 능력이나 출신을 몰라하는 반응인데, 전날 시타의 가보가 빛났던 걸 기억하는 파즈는 그에게 목걸이를 달라 말한 후 목에 걸고 아래로 뛰어내려 버린다.
역시나 평범하고 힘이 센 파즈는 괜히 집구석이나 부셔 먹고, 시타에게 목걸이를 돌려준다. 그런데 이때 캐릭터가 가진 이야기의 방향을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신비한 능력을 가졌지만, 사는 동안 그 힘이 진짜 있는지 한 번도 발현해 본 적 없는 시타. 그게 곧 무얼 의미하는 걸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함을 뜻하지 않을까?
이처럼 영화의 러닝 타임 비율에 따라 10분인지, 15분인지, 그 만남의 순간은 다 다르겠지만, 그저 각각의 캐릭터가 서로에게 인사하며 나는 누구요. 너는 누구구나. 하는 정도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는 않는다. 똑똑한 창작자라면 종래엔 주인공들의 만남이 전체를 얼마나 잘 포괄하고 있느냐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 퀄을 탄탄하게 올리기까지 한다.
오프닝을 포함해 3분 45초에서 7분 30초. 시타가 하늘에서 내려온 시간이다. 지브리가 그들 나름대로 캐릭터끼리 처음 붙었을 때 나타나는 강력하게 뿜어져 나올 화학 작용을 어떤 명장면으로 뽑아낼까 깊이 고민한 흔적인 것이다.
어디 고요한 천사나 선녀처럼 창공을 이불 삼아 찬란히 내려오는 시타, 그리고 그런 그를 한 품에 안아 구해낸 파즈! 볼수록 낭만이 가득한 장면이다!
사실 영화 라퓨타 속 만남은 두 주인공의 만남으로 그칠 게 아니다. 도라 일당이 광산으로 들어와 시타를 찾는 사건이 벌어지기 전, 시타가 세수를 하러 가다가 파즈의 아버지가 찍은 라퓨타 사진을 보고 멈추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두 주인공들이 오랜 과거의 일, 그러니까 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연결성을 가지고 앞으로의 이야기를 끌어 갈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선대에서 벌인 실수를 해결한다거나 하는 뭐 그런?
어쨌건 이런 운명 또한 긴밀한 설계를 통해 구현되는데, 캐릭터들이 공통된 한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각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저마다의 동선을 짜보면 좋다. 예를 들어, 비행이란 개념이 시타에게 주어졌을 때의 의미와 파즈에게 주어졌을 때의 의미가 각각 다를 것이라고 인식하고 그 차이가 어떤 차이인지를 보여줘야 한다.
비행 => 시타는 비행 섬의 왕녀
파즈는 비행기를 만듦
여기에서 더 확장해 구체화시키면, 라퓨타가 실재하는지도 몰랐던 왕녀 시타와 아무도 라퓨타의 존재를 믿지 않는 광산에서 유일한 목격자인 아버지의 말을 철석 같이 믿고 자란 파즈가 비행기를 만든다 정도로 밀도 있게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주인공 둘의 대비는 결국 함께 라퓨타로 향해서 라퓨타를 멸망시키는 데에까지에 이르고, 그들의 남은 앞날이 새로이 펼쳐지는 걸 기대하도록 만든다.
그러니까, 만일 후에 내가 쓸 소설에서 호랑이와 여우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면, 그들이 어떻게 생겼고 어떤 성격을 가질지를 연구하는 건 그 차후의 문제다. 우선은 그들 서로가 어떤 식의 강렬한 만남이 가능한지 결정하고 나서부터 생각해도 된다.
이렇게 해가 뜨는데, 비가 내리는 날에는 호랑이는 장가가고 여우는 시집가는 거래.
이게 호랑이 남주와 여우 여주를 만나게 할 강력한 마법의 주문이라면 여러분은 반드시 해가 맑게 뜬 어느 오후에 생뚱맞게 내리는 가랑비 줄기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어떤 호랑이와 어떤 여우가 서로 보며 있게 된다.
그래, 그럼 그다음은 과연 어떻게 될까? 아마도 다음 편에서… 정해져 나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