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라는 걸 기억해.
**본 게시물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2002년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50분에서 1시간 10분까지 분석해 쓴 것으로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제 와 밝히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처음 봤다. 크크크. 그동안 안 본 눈이었는데, 드디어 개안함!
작법을 배우고 나서 그런지 이야기 형태도 잘 보이고 좋았다. 가끔 어디서 예쁜 이미지로 많이 봤던 장면들을 제대로 만날 때면 오오, 이게 이런 장면이구나. 하면서 감탄도 마구 해댔다. 특히 영화 시작에 치히로를 비추며 나오는 오리지널 사운드가…… 오, 여기에서 이 음악이 나오는 거였어?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여운을 주는 음곡이라 주인공들이 꽃밭에서 꽃바람을 맞으며 아련해지는 순간에 나오는 건 줄로 알았다. 그만큼 내게 있어서는 이 음악은 연분홍 꽃잎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곡 제목은 또 ‘어느 여름날’이라서 약간의 인지부조화가……. 넘모 아련행..
어쨌건 꽃밭이 나올 때까지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도시 생활을 하던 치히로는 부모님과 함께 한적한 시골 동네로 이사를 온다. 이사 갈 집으로 향하던 중 치히로의 아버지가 길을 잘못 들어 신들이 사는 이세계(차원이 다른 세계, 저승, 신계, 타임 슬립의 과거 등)로 들어가게 된다. 이상함을 느끼는 치히로의 말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뭔가에 홀린 듯, 또는 그러는 치히로가 유난스럽다는 듯 관성에 젖어 이세계를 누빈다. 그러던 중 하쿠와 마주친 치히로. 그의 경고를 듣고 부모님을 찾지만 그들이 돼지로 변해버린 것을 보고 혼비백산해 강으로 달려든다. 하쿠의 지시대로 강을 건너려고 해 보지만 얕은 개울은 이미 가슴께까지 물이 차올라 유람선이 뜰 정도가 되어버렸고, 치히로의 육신은 흐릿하게 소멸될 위기에 몰린다. 바로 그때 다시 나타나 그를 돕는 하쿠. 그는 마녀 유바바의 눈을 피해 치히로를 자신이 지내는 온천으로 이끌고, 치히로에게 가마지 할아범을 찾아가라 말한다. 여기까지가 이들의 <만남>이다.
치히로는 살아남기 위해 신들을 위한 온천을 운영하는 유바바와 고용 계약을 맺는다. 계약서 서명에서 치히로를 꺼내 ‘센’만 남겨 봉인한 유바바는 하쿠를 불러 센에게 일을 주라 이르고, 하쿠가 나타나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알은 체를 하려던 치히로는 그에게서 전과 다른 차가움을 느끼며 백여시 링에게 맡겨진다. 너무나 암담해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절망스러운 밤을 보낸 치히로는 다음날, 아침 다시 자신을 찾은 하쿠에게서 어떻게 해야 부모님을 되찾을 수 있는지, 그리고 절대로 잊어버려선 안 되는 게 무엇인지를 배운다.
여기가 그 아련한 오스트가 처음 나올 법한 꽃밭이다. 하쿠는 치히로가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리면 스스로가 무얼 위해 존재하는지도 잃어버릴지 모른다며 그에게 이사 올 때 친구에게서 받은 작별의 쪽지(치히로라는 이름이 적힌)와 입고 왔던 옷을 건네주고 주먹밥도 멕이구... 눈물도 따까주구... 콧물도...... 훌찌럭…. 여기까지 하겠다.
이렇게 <밀착>까지 완벽하게 끝낸 치히로는 모든 걸 제자리로 되돌리기 위해 온천 일에 적응해 나간다. 이건 러닝타임 50분에서 1시간 10분 사이에 벌어지는 일인데, 이 파트에선 보통 <주인공이 가진 캐릭터에 맞게 그의 능력치를 신나게 보여주시오.>로 서사가 흘러간다.
이러한 <성장> 서사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주도성과 관계없이 주인공이 팀을 이룬다.
어쩌다 보니 캐릭터에 맞게 능력치가 발휘된다.
센과 치히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하며 적절한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때 나오는 치히로의 캐릭터가 참 귀엽다. 그는 특유의 요즘 것들처럼 보이다가도, 누군가 작은 것 하나라도 제대로 알려주면 진심으로 그것을 잊지 않고 실천하며, 의외로 편견까지 없어서 겁도 없이 누구에게든 최선을 다 하는 기특한(?) 면모까지 보인다. 바쁘게 돌아가는 온천 안 고인물들 중에서도 유독 참된 눈을 가진 이들에게는 그의 그런 진솔한 자세가 꽤나 ‘예쁨 받을 포인트’로 남을 것이다. 결국에는 치히로를 지켜보는 우리들의 마음까지도 함께 사로잡으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류의 서사는 어떻게 해야 탁월해질까? 뻔한 맛이지만 결코 눈을 뗄 수 없는 <성장>의 맛. 그걸 잘 살리기 위해선 어떤 기본기를 갖춰야 하는가. 그 답은 프레임을 제대로 잡는 것이다. 주인공이 어디에서 누굴 만나 어떤 방식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로 약 20분 이상 장면을 끌고 가야 한다. 그래서인지 작가들은 판타지를 쓸 때 유난히 세계관 작업에 열중한다. 그렇게 이 작업을 오래 하다 보면 아까운 마음에 세계관 서술을 장황하게 늘어 두고서 서사를 잘 끄집어내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세계관 작업을 빼놓고서는 결코 놀라운 장면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센과 치히로는 ‘탐욕스러운 마녀가 운영하는 온천으로 신들이 찾아온다.'는 프레임을 갖췄다. 모든 서사는 이 틀 안에서만 가능하고 우리가 창작이라고 칭하는 기발한 장면도 이 틀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여러분이라면 치히로에게 어떤 상황을 마련해주고 성장을 택하게 만들 것인가?
사실 서사 자체는 굉장히 뻔할지도 모른다. 성장이 있으려면, 아무래도 주인공에게 골치 아픈 일이 생겨야 하고, 더불어 대부분의 순간에서 상대에게 무시 당해야 하고, 이래저래 입장이 곤란해야 한다. 그러니까, 뭐, 온천이라고 한다면 씻기기 어려운 손님 한 분 쯤은 나와줘야 된다는 거지. 크크.
결국 치히로는 모두가 기피하는 지독한 오물신을 성공적으로 모시며, 최상급 아이템을 획득하게 된다.
이번 편을 쓰면서 차기작에 나올 두 주인공이 어떤 나잇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 고민이 많았다. 우선은 좀 풋풋한 로맨스가 쓰고 싶어서 대학생으로 잡아둔다. 여주인공인 여우는 대학에 입학한 후 1학년을 1학기를 마치고, 성인이 된 기념으로 홀로 제주도 여행을 떠난다. 근데 왜 제주도냐고? 남주인공과 여우비를 맞아도 그게 여우비인 줄 모를 곳이니까. 워낙 기상천외한 날씨로 변덕이 당연한 곳이니까. 특별한 만남임에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그러나 아주 아름다운 장면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난 번에 정해 뒀던 오름은 치우고 한라산 등반으로 설정을 바꿨다. 아무래도 게스트 하우스 가는 버스를 탈 때 호랑이를 만나는 게 좋을 거 같다.(아직 라인이라 차후에 장소는 변경될 수도 있다.)
두 주인공들이 여우비를 맞는 장면이 보다 특별했으면 좋겠다. 잘 될까는.. 해 봐야지. 뭐. 아무튼 호랑이는 그 순간 여우를 알아보고 여우는 호랑이에게 약간의 두려움을 느낀다. 잡아먹힐 거 같다거나, 뭔가 무섭고 섬뜩하다거나 하는 감각으로. 아, 이때 뭔가 호랑이만의 특별한 물건이자 둘을 잇는 징표 같은 게 여우의 눈에 띄어도 좋겠다.
다음 날, 늦잠을 잔 여우는 빠듯하게 한라산을 오르다가 하산 못할 위기에 처한다. 서둘러 내려오려고 시도했지만, 산은 금세 어두워지고 하필이면 어릴 적부터 무서워하던 호랑이 울음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 결국 호랑이 형상까지 보고서 놀라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진 그는 정신을 잃고, 깨어나 보니 병원에 누워 있다. 묘하게 조금 더 건강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여우는 다친 곳, 아픈 곳 하나도 없이 멀쩡한 채로 집에 돌아온다.
그러나 이때부터 본격적인 시련이 시작된다. 여태껏 평범한 인간인 줄로만 알았던 자신이 어쩌면 완전히 여우로 변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것. 실제로 밤마다 이상한 일을 겪고 학교 생활도 부모님과의 관계도 엉망이다.
이런 식의 프레임을 세웠다면 여주인공은 과연 어떤 <성장>을 해야 할까? 우선은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좀 다뤄야 하지 않을까? 자꾸만 본의 아니게 여우짓을 해대는 자신. 남들은 맡지 않는 냄새를 맡아 어떤 일에 휘말리기도 하고 꼬이기도 하고, 혹은 사람들 앞에서 영웅이 되기도 하고. 뭐 그런? 하지만 가장 중요한 흐름은 아마도 호랑이와 사랑에 빠질 준비를 하는 것. 그것일 것이다. 운명의 상대를 완전히 기억해 내고, 혼인을 하면 죽는다는 금기까지 떠올리게 되면서 숙명을 마주해 낼 결심 말이다.
근데.. 아직 두 주인공들 이름을 못 정해서 큰일이군.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 다음에 정해보는 걸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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