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 수는 없나.
**본 게시물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1997년 작품 원령공주를 1시간30분부터 2시간까지 분석해 쓴 것으로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세상에…… 이렇게 대서사시인 줄도 모르고, 하필 이 파트에다 이 영화를 넣은 나 자식…… 무모하다 못해 대단하다. 오늘은 다시 월요일. 너무 늦어 면목이 없다. 하지만 자세한 변명과 사죄는 댓글에 달도록 하고 바로 시작해보겠다!
에미시 부족에 들이닥친 재앙신을 대응하다 저주를 입은 아시타카는 한을 품고 죽은 태고적 멧돼지의 자취를 따라서 서쪽 숲으로 떠난다. 부족을 이끌 청년이 마을 주민들을 살리려다 불가피하게 저주를 입은 상태에서 족장을 비롯한 남자들은 참담함을 느끼고, 대무녀는 점을 치며 아시타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저주의 근원을 알아내는 길 밖에 없음을 조언한다. 아시타카는 불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신이 활을 쏘기로 한 바로 그 순간에 반드시 화를 입을 것이라 예상했다고 말한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지브리는 아시타카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마찬가지로 아시타카가 <만남>을 가질 인물은 여주인공이 아니라 왕의 영생을 위하여 시시신의 머리를 가져갈 임무를 진 승려 지코다. 그는 저주의 근원을 찾으려는 아시타카에게 시시신이 있는 숲을 알려준다.
아시타카의 <밀착>은 숲의 변화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들개신의 품에서 자라 숲과 자연을 상징하는 산과 마주친 후 그들을 죽이려다가 절벽에서 추락해 다친 제철 마을 사람들을 구해 에보시를 찾아간다. 에보시는 성의 우두머리로 남자들이 나무를 베어 산에 있는 사철을 캐면, 여자들이 그것을 녹여 제련시키게 만들고, 후에 한센병 환자들에게 총기나 포 또는 탄을 만들도록 지시한다. 아시타카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인 방에서 자신에게 저주를 입힌 멧돼지가 이들의 총으로 죽음을 맞이 했다는 사실을 알고 분개한다. 그는 이들이 가진 무모함을 경고하지만, 한센병 환자들 중 가장 연로한 누군가가 자신들을 거둬 보살핀 에보시의 선한 측면을 봐서라도 그를 이해해달라 부탁한다. 이후 이곳에 사는 여성들이 사창가에 팔렸던 사연까지 알게 된 아시타카는 에보시가 저주를 입은 자신까지 거둬줄 의향이 있음을 알지만, 마침 산이 나타날 것이란 직감을 느끼고 그를 찾는다.
산은 에보시의 성을 습격해 그와 겨루고, 아시타카는 그들 사이에서 싸움을 멈추도록 중재하며 <성장>이 이루어진다. 하는 수 없이 두 여인을 기절시킨 아시타카는 산은 자신의 어깨에 들쳐 매고, 에보시는 부하들에게 넘겨준 후 성을 떠난다. 남편을 잃어 산에게 원한을 가진 여인에게 총상을 입은 아시타카는 숲을 망치는 에보시의 목을 땄어야했다며 몰아세우는 산에게, “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라는 명대사를 한다.
산이 놀라는 틈에 성성이(유인원)들이 나타나고, 그들이 아시타카를 먹어 인간의 힘을 가지겠다는 걸, 산이 만류한다. 그는 성성이들에게 시시신이 숲을 지킬 것이라 달래지만 그들은 시시신은 더이상 태고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며, 산 너 또한 인간이기에 태고신으로 사멸하지 않는다며 산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결국 들개들의 위협을 받으며 사라진 성성이들. 산은 야쿠르를 불러 아시타카를 시시신의 호수로 옮긴다. 위독한 그가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호수 가운데 섬으로 이동시키고 야쿠르의 고삐를 풀어준 후 그는 곧 사라진다.
원령공주는 하야오의 영화 중에서도 가장 많은 적대자들이 존재한다. 조연을 포함해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완벽한 욕망을 가지고 결코 물러설 수 없는 분명한 입장을 고수하기 때문에 사건으로 삼을 라인이 풍부하다. 적대자들은 주인공에게 고난도의 시험 문제를 낸다. 그래서 네 선택이 뭐야? 이래도 그 선택을 하고야 말거야? 내가 이렇게 네 반대편에 서서 욕망을 꺾지 않겠다고 하는대도?
아시타카의 욕망은 그저 ‘저주를 풀고 싶다’였다.
그런데 그의 앞에 있는 건, 에보시와 제철 마을 사람들/ 지코와 왕의 전사들/ 원령 공주 산과 들개신/ 옷코토누시와 멧퇘지신/ 성성이들이 내보이는 또 다른 강한 욕망들이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조합해 각각이 가진 첨예한 입장 차이로 팽팽하다. 아시타카는 이 사이에 말려드는 <시험>에 처하고 저주를 푸는 일에 적극적일 수가 없다.
시시신에게 총상을 치료 받고 다시 깨어난 아시타카는 나고신이 옮긴 저주는 끝내 풀릴 수가 없음을 인지한다. 마침 숲으로 모인 멧퇘지신들의 우두머리 옷코토누시는 나고의 마지막을 아시타카에게서 전해 듣고 자신의 일족 중 재앙의 신이 탄생한 것에 통탄한다. 문명이 발달하며 태고를 잃고 신령함이 사라지는 동족들을 이끌며 옷코토누시는 시시신의 숲에서 치룰 마지막 전투를 예고한다. 아시타카는 다시 정신을 잃고, 산은 그가 시시신의 생명을 받은 자라며 서식지로 옮겨 돌보기 시작한다.
아시타카는 고작 몸을 회복하는 기간으로 시험을 지나친 것 같지만, 실은 몸을 추스르며 마음을 정하는데에 온 힘을 다 한다.
“모로, 모두가 더불어 사는 방법은 정말로 없는 건가요?”
들개들의 서식지를 떠나기 전 날, 아시타카는 자신의 뜻에 커다란 화두를 가진다. 우리 모두 함께 살 수는 없나? 각자 바라는 그 입장에서 벗어나서 더 생각할 수는 없나? 특히 산, 넌 인간이잖아. 그러나 모로는 오래 전, 숲에 나타난 인간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미끼로 던진 갓난아이가 바로 산이었다는 비극적인 사연을 전하며 아시타카의 낙관을 비웃는다.
전투가 시작되는 날, 비가 내리는 장면이 바로 미드 포인트다. 몸을 회복해 들개들의 은신처에서 떠나던 아시타다는 산이 옷코토누시 무리와 함께 에보시의 성을 돌격하는 장면을 예지해 보며 미래를 직감한다. 이후 아시타카는 돌이키기 어려운 선택들을 막아내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뛰어들어 인간들과 태고신을 말린다.
시험 성적은 발표를 앞두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모두가 예상했겠지만, 캐릭터들의 욕망이 한 곳으로 모여 분출된 결과는 몹시 참혹하다. 옷코토누시는 재앙의 신이 되고/ 모로는 재앙의 신에게 빨려 들어가 정신을 잃은 산을 구하다 죽고/ 에보시는 시시신의 머리를 총으로 쏴서 떨어뜨린 후 한쪽 팔을 잃는다.
<결과>는 욕망의 끝을 보는 파트다. 여기에서는 어떻게 해야 적당한 무게감을 가지고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1. 승리인지 패배인지/ 비극인지 희망인지/ 죽음인지 생존인지 아무튼 상대성이 아주 강한 결정 중 하나로 빨리 이야기를 고정하라.
2. 고정 값을 잊지 말고! 모든 이들의 욕망을 모아 한 지점으로 터트릴 만한 거대한 사건 하나를 만들어라.
3. 주인공에게 사건을 수습할 여지도 같이 부여해 설계해 둬라.
이 세가지를 잘 잡아 이야기를 짜는 일은, 이어 다음 편으로 가져가겠다. 마침 붉은 돼지에서 <결과>까지만 보여주는 바람에…… 차기작 구상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해볼 수 있을 거 같다.
몇 시간 안으로 곧! 다음 편도 올리겠습니다. 만나요! 우리!
이 브런치북의 처음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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