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워진 거야.
**본 게시물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1992년 작품 붉은 돼지를 1시간25분부터 1시간 30분까지 분석해 쓴 것으로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만남, 밀착, 성장, 시험, 결과.
이제껏 글을 연재하면서 포인트 키워드를 만들고 해당 영화 러닝 타임이 어느 포인트에 일치하는지 안내해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이란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도 이해 되게끔 써야 한다는 생각에 거의 모든 내용을 스포일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내내 불안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나? 키워드로 잡은 해당 포인트에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는 없나? 더 확실한 인사이트를 내놓아야 일반적인 리뷰와는 다른 라인을 걷는 게 아닌가? 그리고 내가 쓸 차기작 구상에 더 힘을 줘야 하는 거 아닐까? 키워드로 잡은 포인트를 담아내 새 이야기가 쓰여지는 과정을 좀 더 정교히 보여줄 수는 없나?
글은 계속 나오지 않았다. 뾰족할 수 없는 글이라면 어쩌면 리뷰를 좀 섞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흐리멍덩한 것에는 성에 차지 않는다. 나는 나를 안다. 나는 ‘주제’라는 게 있고, ‘목적’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다. 누구든 설득해내야 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 진지하게 여기고 있음이다.
다만, 구현할 역량이 덜할 뿐이다.
어떻게 해야 주제가 하나로 모여 선명하게 떠오르는 글이 나올까?
정말이지 어렵다. 마음처럼 되질 않는다. 읽는 재미가 있게 쓰는 거야 뭐 그렇다치지만, 그래서 이 이야기를 왜 써? 우리는 왜 읽어야 해? 라는 질문에 들어서면, 어…… 음…… 하고 자꾸 얼버무리게 된다. 지금 이 브런치 북 뿐만이 아니다. 내가 손 댄 글, 모든 곳에서다.
그래. 알아채는 것 자체로 성장이겠지.
영화 붉은 돼지의 주인공 포르코는 화두를 키우다 못해 자신이 가진 인간성 마저 부정해버린다. 그는 파시즘으로 떨어지는 조국의 전쟁귀들과 함께 좋은 사람들을 죽음이라는 댓가로 잃고, 자신에게 남은 삶을 전부 묶어 놓고 산다.
돼지가 되어버린 그에게 남은 기쁨은 이제 없다. 더 좋은 선택을 할 리도 없다. 고작 낡은 비행기 한 대가 곁에 남아 함께 떠다닐 뿐이다. 아무것도 그에게 선사되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 만들었고, 그렇게 살기로 결정한 상태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만큼 성장한다.
포르코는 비행기를 타고 해적질을 하는 공적단들을 습격해 현상금을 받는 이로, 그에게 당한 공적들이 미국 조종사 커티스를 용병으로 데려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오랜 친구이면서도 흠모하는 여인 지나의 호텔에서 커티스를 만난 포르코는 그가 지나에게 청혼한 사실을 듣게 된다. 이미 세 명의 파일럿 남편을 잃은 지나는 포르코가 인간, 마르코였을 때를 기억하지만 포르코는 전부 옛 일이라는 톤이다.
커티스와 <만남>을 갖고 헤어진 다음 날, 자신의 비행정을 수리하던 포르코는 엔진을 갈러 밀라노 행을 계획하던 중 대형 크루즈를 털고 자신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커티스의 라디오 방송을 듣게 된다. 그리고 곧 밀라노로 향하다 커티스에게 격추 당하고 만다.
지나에게 극적으로 살아 있음을 알리고, 간신히 피콜로사로 넘어온 포르코는 17살 소녀이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프로의식을 갖추고 당돌하기까지 한 피오를 인정해 자신의 새 비행기 설계를 맡기게 된다. 여기까지가 <밀착>이다.
이래저래 있는 돈을 다 털어 피오가 하고 싶다는 건 다 지원하며, 비행기를 공정하는 과정까지 지켜보게 된 포르코는 피콜로 집안의 모든 여성들과 함께 왁자지껄하게 지내며 서서히 인간이 가진 따스함에 깃든다.
그러다가 옛 전우 페라린과 극장에서 조우하고, 그에게서 조국의 품으로 다시 돌아와 이탈리아 공군으로 복귀하면 정부의 감시를 벗어날 수 있다는 설득을 듣는다. 당연히 포르코는 빨갱이가 되느니, 이렇게 돼지로 살겠다며 그 제안을 거절한다.
여기서 또 재밌는 건, 원래 마르코란 이름을 가진 주인공은 돼지가 되자마자 포르코, 즉 ‘붉다’라는 뜻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마음 속으로 계속 ‘나도 내 소중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나아가 수 많은 이들의 생을 단절시키고 파괴에 이끈 파시스트의 일환이 아닐까?’라는 자책한 건지도 모른다. <성장>은 무엇보다도 뾰족하게 날을 세워 자기의 내면을 확인해야만 가능하다.
피콜로사에 정부 비밀 경찰의 미행과 감시가 붙자, 포르코는 시범 운행도 없이 바로 건조된 비행기를 타고 떠나려 한다. 피오는 이번에도 자신이 인질인 척 해야 피콜로사가 무사할 거란 명분을 대며 포르코에게 자신이 만든 첫 비행기의 시승과 시설 보완을 위한 수리공이 필요할 거라 설득한다. 결국 동행한 그들은 페라린의 배려로 무사히 지중해로 넘어오고, 지나의 정원에 들러 귀환을 알리며 곡예를 보여준다.
포르코와 피오가 절벽으로 둘러싸인 독특한 지형의 아지트에 도착하자마자 텐트 안에 미리 숨어 있던 공적단들이 튀어나오고, 그들에게 둘러싸여 <시험>을 치른다. 피오는 자신의 귀한 첫 작품이 훼손 당할 위기에 처하자 기지를 내어 공적들을 설득하고, 자신의 결혼과 비행기 수리 대금을 걸고 포르코와 커티스의 대결을 약속한다.
이렇게 가면 주인공인 포르코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분쟁이 나는 것과 자신보다 약한 자가 무리를 해서 희생하는 것 자체를 극도로 싫어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피오의 기개를 망치지 않고 그가 하자는대로 두고 봤다는 건 피오가 나름의 명분을 가지고 위기를 넘기는데 탁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물론 무모했다고 화를 내긴 했지만, 이내 피오가 떨며 자신이 무리한 상황을 인정하자 그에게 위기를 넘기게 해줘서 고맙다고 칭찬한다.
그날 밤, 피오는 잠시 잠에서 깨어나 돼지 포르코가 아닌, 인간 마르코 파고트를 본다. 그를 부르자 다시 돼지가 되어버렸지만, 피오는 그의 입으로 직접 말하는 그의 슬픔에 대해 알게 된다. 지나와 결혼한지 3일 된 친구 베를리니를 비롯해 아군과 적군의 전투선들이 꼬리를 물고 격추를 벌이던 그 날, 마르코는 정신이 혼미해진 틈에 구름 위의 평야에 올라가 은하수처럼 띠를 지어 죽음으로 향하는 수 만 대의 전투선들을 목격하고야 만다. 죽은 파일럿들이 전부 모여드는 광경에 충격이 컸던 그는 그들이 가는 곳이 어쩌면 지옥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소감을 전한다. 전쟁이라는 광기에 휘말린 이들의 죽음과 같이 그 어떤 행복할 만한 것도 가지지 않고 살아가기로 결심한 그에게 피오가 뽀뽀를 한다. 그런 생각을 오래도록 해온 것 자체가 역시 좋은 사람인 증거라며.
커티스와의 비행 대결은 거의 비등비등한 채로 진행된다. 그러다가 주먹 다짐까지 가게 된 포르코와 커티스는 이탈리아 공군이 내습해 올 것이란 지나의 정보로 적당한 승부를 낸다. 승리야 뭐, 포르코다. 커티스가 상금으로 가져온 새로운 비행기 제작 비용을 얻고, 커티스에게 결혼 당할(?) 뻔한 피오까지 지켜냈다. 사실 지켜냈다고 하기도 뭐하다. 커티스가 이기는 걸 그만 뒀다.
아무튼 <결과>는 포르코의 승! 그리고 그가 인간으로 완전히 변해버린 모습을 커티스가 발견하고 쫓아가는 걸로 서사가 끝난다.
그 다음은 뭐가 남았을까?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이야기는 여덞 개의 칸에 해야 할 목적을 담고 탁월한 장면을 끼워 넣어야 한다고 설명했었다. 이제 남은 건 <그래서 주인공이 찾은 진짜 자유란 무엇인가?>이다.
돼지로 살겠다는 그를 말릴 수 없었던 지난 날들이 일련의 특별한 만남을 따라 기존의 욕망을 해결하고 어떤 결과를 맞는다. 그렇게 바뀐 라운드 위에서 주인공들은 <진짜>를 찾는다.
그렇다면 <진짜>를 구성할 때는 무엇이 필요할까?
보통은 완전한 독립이다. 빌런/ 재앙/ 죽음/ 가난/ 불의/ 속박/ 폭력 등등, 문제를 극복한 후에는, 혹은 극복하지 못하고 처참하게 직면한 후에 절망에 빠져 있더라도, 반드시 독립된 자아가 생긴다. 인생과 똑같다. 예상한 시나리오대로 어떤 상황에 처해 수 많은 문제에 놓이고 나서 무섭도록 차분해진 상황을 떠올려보자. 폭풍을 경험한 자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프레임 안에서 적당한 독립을 꿰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게 영화 안에서는 주인공의 <진짜> 결정으로 나온다.
아…… 그런데 이 <진짜>를 결정하던 중에 난 좀 망한 거 같다. 글의 분량을 어떻게 더 조절하지 못하고 또 늘어지고 말았네…… 아무래도 차기작 이야기를 부록처럼 다음 편으로 빼야 하나 싶다. 하하… 요즘 참 마음에 따라 순조롭게 뭐가 잘 되는 거 같지도 않고 처음에 세운 계획대로 되는 게 참 어렵다ㅠㅠ 어쨌거나 더 잘 잡아 써보도록 해야지. 그리고 사과와 양해도 좀 구해둬야겠다.
**지난 번 원령공주를 쓰고 바로 다시 찾아오겠다던 제가 한 주 후에나 왔네요. 글이 하나 밖에 발행되지 않아 저도 난감했습니다. 원래는 늘어진 분량을 채워 그 주에 두 편을 올려야 한다고, 그게 책임에 대한 성의라고 생각했는데…… 의도와는 상관 없이 시스템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제 역량이죠. 다음 편은 이제껏 구상한 차기작을 흥미롭게 풀어볼게요. 크리스마스를 앞둔 월요일입니다. 계속 야근 중이지만 마음은 또 울렁울렁 신이 나네요.
모두들 어린아이와 같이 커다란 동심 안에서 한 주 보내시면 어떨까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브런치북의 시작이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hansuin/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