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김해에 전학을 온 후 몇 년 동안은 쌀독이 비어 이웃에 빌려야만 저녁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던 상황이 많았다. 자식들에겐 내색하기 싫었는지 어려운 상황을 숨겼던 어머니가 장남에게라도 털어놓듯 조용히 이야기를 꺼내놓은 적이 있었다. 감당하기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농사라곤 지어본 적이 없어 농사꾼들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알 수 없었던 내가 아직도 밥공기 한 귀퉁이에 붙어있는 밥알을 놓치지 않고 입속으로 털어 넣는 이유도 이 당시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농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해 가족들이 끼니 걱정은 하지 않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게 이때쯤이었다. 하지만 한평생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강압을 이길 수 없어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막상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니 집안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80년대 초반 집안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집은 전교에 우리 집 밖에 없었다. 천원짜리 싸구려 옷을 입고 등교해 하루 15시간을 학교에서 생활하면서 느꼈던 상대적 박탈감은 스스로를 위축시키고 감추기에 충분했다. 아이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프로야구 중계는 생소하기만 했고 TV가 없던 나로서는 감히 끼어들어 대화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나름 성실히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기대와 물려주신 튼튼한 몸(?)이었다. 당시 48kg 정도의 몸무게가 건강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교대에 입학이 결정된 후 RNTC임용을 위한 신검에서 나온 몸무게가 48kg이었다. 그전엔 몸무게를 측정할 기회가 없어 정확한 몸무게를 알 수는 없었지만 가는 다리를 보면 부끄러워 숨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흔한 동네 목욕탕에도 가질 못했다. 목욕탕엘 가려면 일단 버스를 타고 20여분을 이동하여야 했기에 숫기가 없던 나로서는 목욕탕 가방을 들고 버스 정류소로 향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몸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여하튼 고등학교 3년이라는 기간을 아픈 곳이 없어 결석 한번 없이 출석한 걸 보면 건강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당시 김해지역 인문계 고등학교는 시군을 합쳐 ○○고등학교가 유일하였다.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한 입학생들은 군 단위 넓은 지역에서 김해 시내에 위치한 인문계 고등학교로 등교를 했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반 이상이 시골 지역 출신이었다. 흔히 학교를 사회의 축소판이라고들 한다. 빈부의 의미와 풍요의 가치를 실감하게 되는 최초의 사회이고 사회적 서열에 따른 불평등을 피부로 체감하여 계급 상승을 목적으로 스스로에게 처절한 투쟁을 강요하게 되는 최초의 자각 경쟁 사회였다. 작은 사회 속에 다양한 군상들은 나름 자신의 생존을 위해 경쟁자들을 질시하고 배척하며 사회적 위치가 비슷하다고 생각되면 동맹을 맺기도 한다. 지식과 물질의 풍요는 이 작은 사회에서 존경과 가치 판단의 척도였다. 부모로부터 물질적 풍요를 보장받지 못한 이들에겐 지식의 축적이 자신의 위치를 높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성적은 부모의 경제력에 비례했고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아이들 중에도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금지된 과외를 몰래 받은 아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치를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이 대다수였고 나 역시 그 부류에 속해있었다.
삶이 힘들어 못 마시는 술이라도 한잔한 날이면 아직도 가끔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1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기점으로 어렴풋이 잔상으로 남은 왜소한 몸에 작은 눈을 가진 친구. 단짝 친구 외에는 말 한마디 섞지 않았던 존재 자체가 미미한 조용한 친구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학교 전체 유명인사가 되었다. 겨울방학을 몇 주 앞두고 그는 한여름 소꼴 베러 갔다 마주친 장수말벌에게 쏘인 것처럼 퉁퉁 부은 얼굴로 등교를 했다. 가뜩이나 작은 눈은 가는 연필로 그린 사선처럼 존재가 더욱 희미해졌고 반쯤 불다 만 풍선 같은 뺨과 그 틈에 파묻혀 버린 작은 코는 달고나에 찍힌 우산 모형처럼 겨우 외형만을 가늠할 수 있었다. 육체적 통증 때문인지 수업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고통처럼 느끼는 것 같았다.
내가 김해로 전학 온 3년 동안 단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던 점심시간... 당시 그에게도 행복한 시간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점심시간이면 도시락 대신 어머님의 걱정과 한숨이 가득 담겨 있을 것만 같은 수입 이유식 병에 담긴 죽을 힘들게 가방에서 끄집어냈다. 창문을 뚫고 들어온 한기에 차갑게 식어버린 묽은 이유식 병을 비우려 노력해 보지만 바닥을 드러내지 못한 좌절감에 식사를 멈추고 동공이 풀려버린 옅은 미소로 주변을 응시한 채 조용히 엎드려 있곤 했다.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반쯤 놓아버린 것 같은 안타까운 모습이었지만 교실 구성원 누구도 녀석에게 책임 있는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심하게는 모욕과 경멸을 가득 담은 눈길을 주는 빌어먹을 놈들도 간혹 있었다. 1년 가까이 생활하면서도 그 흔한 인사말조차 나눈 적 없던 내가 느낀 눈빛을 그도 분명 인지하였을 것이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암기한 신장에 대한 짧은 지식을 통해 그가 콩팥에 이상이 생겼다라는 걸 어렴풋이 이해한 척 걱정과 위로를 하는 것이 우리가 보인 관심의 전부였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의 형식적 관심을 살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방학 중 난방도 되지 않는 교실에서 자율학습을 한다는 건 학업 성취에 대한 의지와 욕구가 정말 강하거나 담임의 무차별적인 폭력을 이겨낼 신체적 내구성과 정신적 강인함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하루 두 끼의 도시락을 가방 가득 챙겨 와서 식어버린 두 번의 식사를 해야 하는 차가운 고통마저도 쾌락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바로 젊음이었다. 식사 시간에는 언제나 웃음과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당연한 일상적 즐거움을 경험할 기회마저 박탈당해 버린 비참한 젊음이 존재한다는 걸 잊어버린 이가 많았다.
반복되는 일상에 시간의 흐름을 인지할 수 없었던 아이들에게 교정 한 구석 수줍게 뿌리내린 매화는 환한 미소로 겨울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질겼던 야간 자율학습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어느 날 저녁 제법 늦은 시간인데도 퇴근하지 않은 담임이 학급 임원들을 교실 밖 복도로 불렀다.
“공부는 잘되나?”
“네”
“느그... 가 알제? 아픈아...”
“00이 말입니까? 가 오늘 학교 안왔는데예.”
“가 오늘 죽었단다.”
“...”
“그래서 학급 회비를 걷어서 한번 가봐야겠다.”
“학급회비예?”
“그래, 아 들한테 이야기하고 느그들이 함 모아봐라.”
“반장 니가 책임지고.”
복도는 조용했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의 가는 성대를 타고 올라오는 쇳소리와 뒤틀린 창문 틈을 뚫고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소리만이 가득했다. 갑작스럽게 교실 밖으로 불려 나온 우리는 신경질적인 대화를 말없이 조용히 듣고 있었다. 짧은 생에 대한 허무함,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누리지 못했을 인간의 존엄성,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가식이 초래한 비극적 결과에 낡은 병 라벨에 새겨진 흑백 사진의 통통한 얼굴이 끝없이 소용돌이치며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조의금이 목적이라면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그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주는 치료비가 우선이 아니었을까? ’ 라는 생각이 스치듯 들었다. 무엇을 위한 조의금인지 불순한 의도가 느껴졌다. 조의금(弔意金)인지 조의금(嘲意金)인지... 치열한 경쟁과 배금주의는 어쩌면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모든 원인은 인간성의 실종이었다. 서로 의지하지 못하고 야생동물의 생존본능만이 살아남은 인성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군상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교사는 그러면 안 되었다. 최소한 그런 아이들에게 이정표가 되어야 했다. 인성적으로 완벽하지는 못하겠지만 도덕적으로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자기가 책임진 사회의 지도자로서의 책임과 도리는 다해야 했다. 인생의 선배로서 최소한 그렇게 처신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지금도 당시 우리들의 선택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결과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거라는 믿음을 가져보는 건 양심 한구석에 남아있는 그때의 죄책감에서 벗어나 보려는 뻔뻔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교사는 그라믄 안 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