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막골, 작은재, 지석리
새벽 6시 30분, 아버지의 집을 나섰다. 엄마가 안 계신 집에서 아침을 먹는다는 건 이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나이를 먹었어도, 막내로 늘 받기만 하던 위치에서 벗어나기가 왜 이리 어려울까? 오늘 계획한 일정이 많아서, 아버지께 미안한 마음을 뒤로한 채 길을 나섰다.
서천의 산막골 성지로 향하는 길은 좁고 구불구불했다. 외길 운전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혹시 마주칠 차에 대비해 눈으로 피할 곳을 찾으며 조심스레 시뮬레이션해 본다. 다행히 베스트 드라이버인 남편이 운전대를 잡고 있다. 이번 여정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산막골은 성지로 조성 중이었다.
<천방산 자락의 산막골은 서천 징역 신앙 선조들의 교우촌들 가운데 하나이다. 1839년 기해박해 뒤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곳이다. 산막골은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 페롱 신부가 1858년부터 거주하며 사목 활동을 한 곳이다. 또한 황석두 루카 성인 일가가 충북 연풍에서 이주하여 병인박해 전까지 10여 년 동안 살던 곳이다. > 한국 순례 지도 중에서 발췌
성당 내부에 있는 처음 보는 성모상과 색채가 강한 십자가의 길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성당 내 십자가의 길은 독일의 사제 화가인 지거 쾨더의 작품으로 투박하지만 강렬한 색감이 오래도록 기억날 것 같다.
성당 내부가 예술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정성이 많이 들어갔고 감각이 있는 분의 손길이 담겼음을 단박에 알 수 있더. 감동이다. 성수함과 그 위의 십자가, 성체보관함, 십자가상도 예사롭지 않다. 타일로 만들어진 스탬프 함은 유럽의 한 조각을 옮겨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도장을 찍고 차로 가면서도 뒤를 돌아보게 하는 산막골 성지였다.
안내도를 보니 줄무덤이 있는 작은재로 가기 위해서는 도보로 3.5km, 30~40분, 차로 가면 멀리 돌아가야 했다. 줄무덤이 있는 작은 재를 가는 길은 축복이었다. 뒤늦게 단풍구경을 했다. 차를 세우고 걸어서 올라가자는 나와 달리 남편은 4륜 구동의 차의 위력을 보여주고 싶은지 고집을 피운다. 십자가의 길과 함께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싶었다.
<천방산 기슭 광장에 신앙 선조들의 유해가 묻힌 줄무덤 터가 있다. 작은재는 독뫼 공소 터와 판교 금덕리의 작은 재 공소 터를 이어 주는 고갯마루로 이름 없이 묻힌 신앙 선조들의 무덤이 있던 곳이다. > 한국 순례 지도 중에서 발췌
드디어 작은재 줄무덤에 도착. 무명으로 이렇게 남아 있는 분들도 있지만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진 분들도 있을 것 같다. 그분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했다. 이젠 순교자들의 삶이 더 이상 불쌍하거나, 가엾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가치를 실천했으니까.
" 걸어서 내려와, 가을을 듬뿍 느끼면서 말이야." 남편이 제안을 했다. 냉큼 내렸다. 안 걸었으면 어쩔뻔했나 싶을까만큼 좋았다. 뒤늦게 가을 단풍을 느낄 수 있다니. 무수히 많은 사진을 찍으며 뛰거나 걸으며 자연이 준 선물을 감사한 맘으로 받았다. 내 말을 지나치는 듯 지나치지 않는 남편의 배려가 고맙다.
작은재에서 내려와 부여에 있는 순교 사적지 지석리로 향했다. 지석리는 병인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손 선 지 베드로와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의 고향으로 시성비가 세워져 있는 곳이다. 야외 제대와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지석리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손선지 베드로와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의 고향이다. 두 순교자는 1984년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손 선 지 성인은 16세 때 샤스탕 신부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병인박해 때 손 선 지 베드로와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는 전주 대성동 신리골에서 살았다. 두 성인은 혹독한 형벌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형장에서는 축복의 순간을 맞는 기쁨을 간직하며 칼을 받았다. 두 성인의 무덤은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한재권 성인과 함께 천호 성지에 있다.> 한국 순례 지도 중 발췌
처음 계획했던 갈매못 성지 미사 대신 서짓골의 삽티성지에서 대림 2주일 미사를 드리기로 했다. 순례의 길은 때로는 계획대로 흐르지 않지만,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