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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09. 2023

다 때려치우고 싶은 날엔 옷장을 비운다


스펙 쌓기에 열 올린 때가 있었다. 


토익 학원을 다니며 족집게처럼 답을 골라내는 스킬을 배웠다. 복지관의 학생들도 거의 없는 공부방을 우두커니 지켜내는 사감 노릇을 했다. 학교, 집을 부지런히도 들락거리며 학점관리를 했다. 컴퓨터 공부를 하며 자격증을 따냈다. 모두가 내가 원하는 곳에 취업하기 위해 필요했던 일. 다들 한다기에 나도 필수라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자격을 취하기 위해 살았던 시간들. 

어렵게 원하던 곳에 합격했다. 그때는 내가 계획한 것들은 뜻대로 다 이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이렇게 살아내면 되는 거구나 하고 무릎을 탁 쳤던 순간들. 


온전한 결론을 다시 말하자면 그곳에 취업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 준비해서 얻어낸 결과물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다른 지역에다 규모도 큰 그곳에서 일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곳에 취업하기 전에 다른 병원에서 미리 일 하고 있었다. 거기서 일 못한다 욕을 어마어마하게 들었다. 여기서도 형편없는데 거기서는 잘할 수 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눌러앉아 버렸다. 이야기의 끝은 있던 곳에서도 방을 뺐다는 것이다. 



그때가 문제일까. 



내 인생에서 원하고 계획한 것들을 손에 쥔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꽤 많은 것들을 도전했는데 특히나 일을 가지는 것에 있어서는 성공한 일이 거의 없었다. 취미를 배워도 일이 될 것으로 믿으며 허투루 대하지 않았는데. 

디저트를 구우며 파티시에가 되기를 꿈꿨다. 대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며 상담사가 될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자격증 공부를 하며 직업상담사가 되길 원한적도 있었다. 공부는 만만하지 않았다. 파티시에 비슷한 언저리까지 가보긴 했지만 나라는 사람을 알리기에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나를 탓했다. 

엄마로 살아오면서 그다음 삶을 항상 꿈꾸며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취업전선에 쉬이 뛰어들지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냥 덤비면 되는 것을. 해보면 까짓 거 할 수 있을 거란 지인들의 말이 전혀 와닿지 않았다. 

실패했던 나날들이 내 발목을 잡았다. 아무것도 잘할 수 없을 거란 생각들이 나를 뒤 흔들었다. 힘차게 살아갈 의욕이 사라졌다. 다 때려치우고 그냥 방구석에 누워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취업이 이렇게 힘들고 어렵고 두려운 일 일 줄 몰랐다. 그저 발 한 짝 떼면 된다는 그 말이 가장 듣기 싫었다. 

간절히 일하기를 원했는데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들 속에 비참함이 몰려들었다. 





Unsplash의Nick Nice



















‘비움효과’라는 책이 있다. 

작가는 육아우울증으로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비움이 당신을 살렸다고 말한다. 서랍 한 칸을 개운하게 비워냈을 뿐인데 그게 변화의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를 정리하니 어질러진 다른 장소가 보였다. 물건 정리를 시작하고 난 뒤에는 일상도 삶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청소력’이란 책에서도 경우는 다르지만 비슷한 스토리가 이어진다. 이혼과 도산으로 삶이 무너진 작가는 친구의 도움으로 집 청소를 시작하게 된다. 작은 시작이었는데 청소를 시작함으로써 삶이 변했다. 내가 사는 공간이 곧 나라는 신념으로 주위를 정돈하고 헝클어진 자신도 매 만지기 시작했다. 청소를 자신의 업으로 가지게 된 그는 청소력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고 이는 책으로도 메시지가 이어졌다.








내 인생은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나의 생각은 지금으로 생각해 보자니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원래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이 살아가며 확고 해졌기 때문이다. 그걸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대신 내 작은 일상은 내가 비우고 채우며 깨끗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나의 작은 책상, 내 방, 그리고 자주 쓰는 부엌까지. 위에서 언급한 두 저자 역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냈다고 생각한다. 즉각적으로 보이는 공간과 자기 일상의 바운더리를 비우고 채우고 치우다 보니 우연 속에서 행운을 맛볼 기회가 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일상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뭐가 있을까. 나는 그게 옷장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늘리고 줄이고 채울 수 있는 공간들. 내가 상상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꾸릴 수 있는 공간. 





Unsplash의Rumman Amin




아무것도 하고 싶은 의욕이 나지 않던 날. 이대로 지내다간 밖으로 나가고 싶은 기력도 생기지 않겠다 싶은 날. 나는 옷장을 게워냈다. 자주 보던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곤도마리에의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는 제목처럼 셀레지 않는 옷들을 다 비워버렸다. 

살 빼고 입을 옷, 버리고 싶지만 아까워서 가지고 있던 옷. 필요할 것 같지만 몇 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 옷을 산처럼 쌓아 놓고 곤도 마리에씨처럼 하나하나 만져 보고 설레지 않으면 다 비워냈다. 

과거라는 아쉬움을 버리고, 먼 미래만 생각하며 지니고 있던 불안감을 덜어냈다. 오늘 가장 잘 어울리는 건 뭘까. 내가 이 순간에 기대하는 건 뭔가 하는 마음을 지니고 지금 입고 싶은 옷들을 손에 쥐었다. 





원목 옷걸이들을 구매해서 색들의 조합을 고려해 옷장을 채웠다. 

옷장이 제법 헐거워졌지만 입을만한 것들이 남았다. 아직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옷장은 아니지만 가지고 있는 옷을 활용해 볼 자신감이 조금은 생겼다. 군더더기를 덜어낸 옷장을 보니 막힌 숨이 한결 가쁜해졌다. 

크게 변화한 것도 특별히 이룬 것도 아직 없는 내 삶에서 작은 희망을 건져 올린다. 나는 내 작은 일상을 원하는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으니 다른 것도 해낼 수 있을 거라며. 내게 주문을 건다. 뜻대로 흐르지 않는 내 삶에서 우연한 행운을 발견하자고. 나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옷장이 그렇게 말을 건넨다. 원하는 날들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를 너의 취향으로 만든 것처럼. 




Unsplash의Amanda V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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