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은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타고 난 머리가 좋았다. 성실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학교를 그만두고 산속에 들어가 살아야 했을 때 그는 열 살이었다. 아버지와 둘이 생활하며 검정고시를 통해 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장을 땄다. 고등학교는 기숙사가 있는 곳으로 갔다. 고교평준화가 되기 전, 영재반 기숙사에 무상으로 들어갈 만큼 입학시험을 잘 본 덕이었다. 또래들과 함께 하는 환경도, 교사가 있는 수업시간도, 하민에겐 소중하고 즐거웠다. 머리 좋고 성실한 하민이 공부를 좋아하기까지 하니 성적이 좋은 건 당연했다. 3년 뒤 치른 학력고사에서 전국의 모든 대학, 모든 과를 골라 갈 수 있는 성적을 받았다. 아버지는 법대를 가라고 했다. 하민은 거절했다. 문과를 택한 것도 아버지의 바람 때문이었으므로 전공은 원하는 과목으로 하고 싶었다. 수학을 좋아한 하민이 선택한 전공은 경제학과였다. 그렇게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1985년이었다.
그즈음 하민의 집은 안정되었다. 여유롭진 않았지만, 가족이 흩어져 쫓기고 숨어 사는 삶은 더 이상 없었다. 하민의 집과 달리 세상은 해가 갈수록 어지러워졌다. 오랜 군사독재에 지친 사람들의 저항은 점점 거세졌고 그 중심에 대학생들이 있었다. 시위는 대학문화로 자리 잡았다. 학교는 수업을 듣는 공간이라기보다는 나라가 가르치지 않는 것들을 공부하고 운동을 도모하는 공간이었다. 캠퍼스 곳곳에 현수막과 대자보가 붙고 전단지가 뿌려졌다. 최루 가스로 온 학교와 거리가 매웠다. 동기나 선배가 보이지 않으면 유치장에 있거나 도망치는 중이란 소문이 돌았고, 소문은 대개 맞았다. 학교 건물에서 독재 타도를 외치며 뛰어내리는 학생도 있었다. 그때 건물 아래에 서 있던 하민은 죽음을 처음 목도했다. 하민은 다른 많은 학생들처럼, 부정의와 불합리에 분노하면서도 시위 참여 이상은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하민의 부모는 불안에 떨었다. 아버지의 형제들은 6.25 이후 빨치산으로 몰려 죽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 그것도 앞길이 보장된 아들이 잘못될까 두려워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하민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민주화 항쟁 때 광장에 있는 정도였다.
학생운동에 앞장서는 대신 하민은 종교활동을 시작했다. 성당에 다니며 주일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곳에서 희를 만났다. 희는 하민보다 열 살 많았고, 주일학교 교사 활동도 십 년쯤 먼저 시작했다. 하민은 오래지 않아 희가 가르친 많은 사람 중 하나에서 연인이 되었다. 하민과 희가 결혼을 결심했을 때 하민은 스물두 살 쯤이었고, 희는 임신한 상태였다. 하민은 한번도 희와 결혼하지 않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지만, 하민의 부모는 둘의 결혼을 용납하지 못했다. 혼전 임신이 죄가 되는 시절이었고, 아들보다 열 살 많은 며느리가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하민이 희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아버지는 하민을 감금했다. 방에 갇힌 아들이 단식 투쟁으로 대응하자 아들의 목을 졸랐다. 폭행도, 감금도, 살인미수도 통하지 않자 하민에게 절연을 통보했다. 하민은 집을 나와 희를 만났다. 상처투성이 해방이었다.
하민과 희는 성당에서 결혼했다. 함께 다니던 성당의 신부가 주례를 서주었다. 하객은 없었다. 이듬해 11월에 첫 아이가 태어났다. 딸이었다. 아이는 태어난 지 2개월쯤 되었을 때 폐렴에 걸렸다. 백 일을 병원에서 맞이했다. 하민은 학교를 다니며 과외와 막노동을 병행했지만 병원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긴 어려웠다. 딸이 퇴원한 후 하민은 절연이 무색하게도 부모에게 방을 내어달라 부탁해야 했다. 부모는 아기까지 딸린 자식을 내치지 않았으나, 함께 사는 게 화해의 의미는 아니었다. 희와 딸을 향한 하민 부모의 언행은 싸늘했고 때때로 가혹했다. 하민과 아버지는 자주 싸웠다. 둘의 언성이 높아져 하민의 딸이 울면 어머니는 '저 시끄러운 것 좀 치우라'고 했다. 딸이 울 때마다 희가 욕을 먹었다. 그 집에서 가장 괴로운 사람은 희였을 터이나, 하민은 일일이 살피고 신경 쓰지 못했다. 경제적 부양을 도맡으며 부모와 싸우는 것만으로 벅찼다. 집을 구할 능력이 되자마자 하민과 희는 그 집에서 나왔다. 그들의 첫 보금자리는 오래된 빌라의 1층 집이었다. 그즈음 태어난 둘째 아이는 아들이었다. 하민은 그럴듯한 전문직이 되었다. 화이트칼라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 딸 하나, 아들 하나. 교과서 같은 4인 가족의 탄생이었다.
시력이 몹시 안 좋았던 하민은 군 입대를 면제받았다. 외동에 결혼까지 일찍 한 바람에 부양가족이 많다는 사실도 한 몫했다. 공백기 없이 직장을 다니며, 하민은 공부를 놓지 않았다. 석사를 졸업하고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학위는 하민의 직업 진로를 굳건히 다지는 길이기도 했다. 1997년, IMF로 '고개 숙인 아버지'가 성행할 때 하민은 예외였다. 그렇다고 그 시절 흔한 아버지처럼 집에서 군림하지도 않았다. 집의 대장은 희였다. 희가 집의 질서를 관리하며 필요할 때면 악역을 맡았기 때문에 하민은 자식에게 상냥하고 친구 같은 아버지로 존재할 수 있었다. 희가 아이들에게 매를 들거나 아이들을 집에서 내쫓으면 하민은 퇴근길에 아이들을 챙겨 귀가했다. 그건 희와 하민 사이에 짜인 각본이었지만, 아이들은 몰랐다. 주말이면 하민과 희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성당에 갔다. 함께 탁구를 치거나, 공원에서 공놀이를 하거나, 노래방에 가거나, 집에 돌아와 하민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가끔은 놀이공원이나 영화관에 가기도 했다. 아이들은 부모가 전부인 가족 울타리 안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랐다. 희의 형제자매나 부모와는 왕래가 있었지만, 아이들의 인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진 못했다. 하민의 아버지는 가끔 술에 취해 하민의 집으로 전화했고, 딸아이가 할아버지의 폭언에 영문도 모른 채 잘못했다고 빌며 운 적도 있지만, 불쾌한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하민의 냉정함과 덤덤함이 예민하고 섬세한 희를 상처 입힐 때도, 희의 날카로운 말이 하민을 상처 입힐 때도 있었으나, 평범한 부부싸움 수준을 넘지 않았다. 어른스러운 첫째 딸과 애교 많은 둘째 아들은 하민과 희의 자랑이자 기쁨이었고, 가끔 딸을 걱정스러워하는 희의 마음도 평범한 부모의 고민을 넘지 않았다. 하민과 희가 새로 꾸린 가정은 단란한 4인만으로 완벽했다. 완벽해야 했다.
가족의 삶에 균열이 생긴 건 희가 유방암 판정을 받았을 때였다. 하민이 삼십 대가 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 청천벽력이었지만, 어쩔 수는 있었다. 한 번의 수술로 암세포는 깔끔하게 제거되었다. 하민이 딸과 아들을 데리고 병문안을 갔을 때 희의 얼굴은 나쁘지 않았다. 며칠 뒤 희는 건강한 얼굴로 집에 돌아왔고, 언제 아팠냐는 듯 단란한 일상이 재개되었다. 희가 건강한 먹거리에 전보다 훨씬 더 신경을 쏟는다는 점이 유일한 차이였다. 건강하고 단란한 일상이 몇 년쯤 지속되었다.
희의 암이 재발했을 땐 한 번의 수술로 제거할 수 없었다. 보험을 들어두지 않은 상태에서 꾸준히 나가는 치료비는 하민의 등골을 휘게 했다. 정시 퇴근은 없다시피 했고, 주말에도 일하는 날들이 생겼다. 하민은 자신이 일을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업무는 하민에게 큰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희의 병이 낫는다면 경제적 압박도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산 바로 아래, 공기 좋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고 차를 샀다. 병이 가족의 일상을 깨트릴 수 없도록 최선을 다했다. '일요일은 가족이 함께'라는 규칙은 절대로 깨어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방학을 맞으면 온 가족이 여행을 다녔다. 딸아이가 중학생일 땐 가족의 인생 첫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희는 여전히 가족의 식사를 책임졌고, 집안일의 대부분을 관리했다. 하민과 희는 가족의 모양을 지키기 위해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아이들도 의젓하게 잘 자라주는 것 같았다. 매번 연차를 낼 순 없는 하민 대신 희와 병원에 다녀오는 건 아이들이었다. 희의 병이 악화되며 집안일이 늘어나도 아이들은 불평하지 않았다. 학원에 보내달라거나 비싼 물건을 사달라고 조르는 일도 없었다. 매일 돌아가며 희의 팔다리를 주무르는 일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그즈음 하민의 어머니가 죽었다. 하민의 어머니도 암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의 아버지도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암이 하민과 희의 부모를 앗아가고 있었다. 하민은 스스로 만든 가족까지 빼앗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희의 항암치료는 계속되었다. 동시에 보양식을 먹으러 다니고, 각종 민간요법 책을 사 읽고, 한의원에 가 침을 맞고 보약을 지어 왔다. 그래도 희의 병세는 나빠지기만 했다. 하민과 희가 할 수 있는 게 점점 줄었다. 나중엔 아이들 앞에서 우울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건 아이들도 하고 있는 노력이었다. 희의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졌을 때, 희는 머리를 밀고 예쁜 가발을 몇 개 샀다. 희가 '나는 머리를 밀어도 예쁘다'거나, '가발을 쓰니 인형 같지 않냐'라고 하면 아이들은 열심히 맞장구쳤다. 희는 점점 말라가는 몸으로 아이들의 아침을 챙겼고 하민의 옷을 다렸다. 일요일에 함께 모여 노는 가족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희가 이제는 셋이 놀라는 말을 꺼냈을 때, 하민과 아이들은 곧장 그 문화를 없애버렸다. 그것이 희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민은 희가 왜 어두운 표정인지 알지 못했다.
희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희는 예쁜 가발에 모자를 쓰고 장례식에 갔다. 딸아이는 여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르고 상을 치웠다. 하민과 아들은 남자들과 함께 손님을 맞았다. 장례의 마무리는 희와 자매들의 싸움이 장식했다. 형제자매 싸움이 대개 그렇듯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으나, 그 길로 희의 가족과도 연이 끊겼다. 연을 끊은 건 희의 선택이었다. 함께 만든 가족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다는 희의 말에 하민은 동의했다. 희의 상태가 나빠질수록 집에는 성당 사람들이 자주 찾아왔다. 신부가 찾아와 기도해 주던 날, 하민은 끝이 오고 있음을 알았다. 딸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고 희의 곁을 지키기 시작했을 때 하민은 그 기간이 길지 않을 거라 짐작했고 짐작은 맞아떨어졌다.
"엄마 돌아가셨다. 일어나. 일어나서 기도하자." 아직 캄캄한 새벽녘에 딸과 아들을 깨우던 하민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희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하민과 아이들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딸은 알아서 학교를 비롯한 주변에 연락을 돌렸다. 아들은 하민과 함께 조용히 상주의 자리를 지켰다. 하민은 생전 희의 바람에 따라 장모에게도 희의 형제자매들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들이 다른 경로로 소식을 듣고 와 빨간 눈으로 하민을 타박할 때, 그는 사과 대신 희가 원치 않았다는 답변을 전했다. 그들이 상처를 받든 말든 하민의 알 바는 아녔다.
빈소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하민은 빈소에 사람이 남지 않고 아이들도 잠든 순간에야 눈물 흘릴 수 있었다. 깊은 밤의 빈소를 채우는 작고 가는 울음소리가 낯설었다. 마지막으로 운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울었던가? 아들은 한 번쯤 울었다. 딸은 사람들 앞에서 두어 차례 눈물을 보였지만, 소리내어 울진 않았다. 아닌가. 딸도 한 번쯤은 울었나. 아니면 눈물도 보이지 않았던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엄마를 잃은 십 대를 달래는 법을 하민은 몰랐다. 아이들이 슬픔을 꺼내 놓지 않을 땐 더더욱 알기 어려웠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죽음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것도 하민에겐 낯설었다. 가족 누구도 놀라지 않은 죽음이었는데도 그랬다. 희가 살아있을 때조차 가족은 다 함께 희의 투병에 대해 얘기 나눈 적 없었다. 그런 건 하민과 희가 공들여 만든 가족 문화에 없었다. 그래도 장례가 끝나기 전에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하민은 희를 화장하며 처음으로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허무하지 않니?"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렇게, 남겨진 사람의 감상을 공유하려던 하민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도는 실패했다.
희는 입버릇처럼 딸이 하민을, 아들이 희를 닮았다고 말했다. 아들이 더 여리다는 의미였다. 커가는 아이들을 보며 하민은 그 말이 맞음을 체감했다. 딸은 늘 자기주장이 강했고, 반골 기질도 있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시위에 나갔다. 딸이 참여한 시위는 뉴스에도 자주 보도되었다. 카메라가 광장에 세워진 차벽과 물대포를 비추곤 했지만, 하민은 걱정을 앞세워 딸을 막고 싶지 않았다. 성인이 된 후에도 딸은 여전히 시위에 나갔고 이런저런 활동을 시작했다. 가족 식탁에는 언제나 딸이 들고 온 논쟁거리가 놓였다. 딸의 주된 논쟁 상대는 하민이었다. 사회문제로 논쟁하지 않을 땐 서로의 문제를 두고 싸웠다. 문제는 딸의 진로일 때도, 귀가시간일 때도, 집안일일 때도 있었다. 딸은 한 번에 순종하는 법이 없었다. 그건 엄마가 죽고 난 후의 반항 같은 게 아니라 기질에 가까웠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운 덕에 하민은 딸이 무슨 생각인지 몰랐던 적이 없었다. 적어도 하민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린 아무리 싸워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으니, 이해하려 하는 대신 서로의 선을 넘지 않는 걸로 타협하자'는 딸의 말에 하민이 동의하며 휴전을 맺었을 때, 하민은 딸이 정말로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딸과 반대였다. 자기주장을 하는 일도 잘 없었고,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없었다. 하민과 닮은 특유의 고집이 있었지만 갈등을 극도로 싫어해서, 하민과 싸우는 일도 거의 없었다. 착실히 공부해 원하는 대학에 갔고,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어쩌다 딸과 아들이 싸울 때면 아들은 힘든 마음을 쏟아내며 흐느껴 울곤 했다. 하민과 싸우다 분에 못 이겨 울던 딸과는 다른 종류의 눈물이었다. 언젠가, 둘이 크게 싸우고 딸이 연을 끊겠다 선언했을 때, 딸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아들은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하민은 딸과 아들 모두를 사랑했고 모두에게 늘 미안함이 있었지만, 이러한 둘의 차이가 아들을 더 걱정하게 만들었다. 아들의 생각도 마음도 더 잘 챙겨야 할 것 같았다. 희가 있었다면 아들을 좀 더 잘 챙겨주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희가 없는 삶에 익숙해졌을 때쯤, 하민은 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시고 아이들을 데려갔다. 딸은 다시는 병문안을 가지 않겠다며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딸이 할아버지를 싫어하는 이유를 하민은 모르지 않았지만,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몰랐다. 물어보는 대신 알았다 답한 하민은 곧 아버지를 집에 데려 오기로 결정했다. 그건 딸과의 휴전을 깨트리는 일이었다. 결정을 전하던 날, '엄마의 영정사진이 거실에 걸려 있는 집에 어떻게 할아버지를 들일 생각을 하냐'는 딸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다. 1년도 못 살고 돌아가실 거란 하민의 말에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이던 딸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하민은 딸이 삼킨 말을 굳이 묻지 않았다. 그때 하민에겐 딸의 마음이나 생각을 아는 것보다 아버지를 집에 데려오는 게 더 중요했다. 어차피 결정권은 하민에게 있었고, 하민은 자신을 위한 최선이 뭔지 잘 알았다. 같이 산지 1년이 채 안 되어 하민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다. 발인 날, 눈물은 안 나냐는 딸에 질문에 하민은 후회할 것이 없어서 눈물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정말 아이들 뿐이구나, 하민은 생각했다. 후련함과 쓸쓸함이 함께 찾아왔다.
그 후로 하민은 두어 번 연애를 했다. 정식으로 만난 두 번째 연애는 결혼으로 이어졌다. 딸은 일찌감치 독립한 후였고, 아들도 안정적인 진로를 확보해 따로 사는 중이었다. 하민이 재혼을 결심했을 때 아이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아빠의 삶이니 원하는 대로 살라'고 했다. 상대는 대학생 아들을 하나 둔 교수였다. 하민은 다 큰 자식이 둘이나 생기는 데도 괜찮다는 상대가 고마웠고, 상대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것이 기꺼웠다. 이미 각자의 삶을 꾸린 딸과 아들에게 새엄마의 의미는 크지 않았다. 그래도 하민의 새 아내는 아이들과 친해지려 노력했다. 아이들 역시 새로 생긴 엄마와 동생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함께 살지 않는 하민의 아이들이 새 가족이 생겼음을 체감하려면 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으나, 하민과 아이들이 함께 체감한 변화가 없는 건 아녔다. 이전의 모든 것이 역사로 묻힌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변화였다. 희의 죽음은 비로소 공공연한 과거가 되었다. 긴 세월 하민과 아이들이 주고받았던 모든 상처와 갈등은 새 가족 앞에서 드러나지 못했다. 갈등의 중심엔 딸이 있었으므로, 그건 딸이 더 이상 화내거나 따지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희가 죽고 딸이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려 애쓰던 시간도, 그 시간에 질려 가족을 벗어나고 싶어하던 것도, 동생과 연을 끊겠다 했던 일도, 모두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딸은 가족과 만나는 자리에서 가족의 과거도 사회문제도 거의 꺼내지 않았다. 가족이 모이는 자리엔 가벼운 대화와 농담만이 오갔다. 일 년에 두어 번 만나는 게 다였던 가족 만남이 잦아졌다. 아들은 종종 애인을 데리고 하민의 집을 찾았다. 아들은 애인과 함께 새로 생긴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곧잘 만났다. 그런 아들의 결혼 발표는 모두가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화목한 대가족이었다. 하민의 마음에 잊고 있던 흡족함이 자랐다.
아들의 결혼식 날, 하민은 벅찬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아들의 결혼식은 주변인 모두에게 하민의 새 가족을 정식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하민의 마음은 안정감과 뿌듯함으로 가득 찼다. 아빠, 엄마, 딸 하나, 아들 둘에 이제는 며느리까지. 완전하다 못해 꽉 찬 가족이었다. 하민도, 새 아내도, 며느리를 맞기엔 다소 이른 나이였지만, 오히려 좋았다. 결혼 생각 없는 딸이 걱정이긴 하나 요즘 시대엔 흔한 일이라니 조급할 필요 없었다. 새 아내와 여생을 보낼 집을 마련하며 빚을 지긴 했지만, 갚을 여력은 되었다. 새로운 가족과 일상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갈등은 가족을 꾸린 자만이 겪을 수 있는 종류란 점에서 반가움을 동반했다. 하민은 오랫동안 정상 궤도를 벗어나 있던 삶의 요소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비로소 온전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