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시골에서 오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계선은 한번도 자기 이름이 마음에 든 적 없었다. '계집아이'와 발음이 같은 첫 글자도, 계수나무 계에 착할 선이라는 한자도 싫었다. 어른이 되면 개명하리라. 누군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다짐하곤 했다. 계선의 아버지는 몹시 엄격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181cm의 장신은 늘 꼿꼿했고, 목소리는 늘 단호하며 우렁찼다. 계선의 기억에 아버지의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가 없을 정도였다. 목소리와 달리 섬세한 손을 가진 아버지는 산에 갔다 오면 나뭇가지를 깎아 주걱과 지팡이를 만들곤 했다. 칼로 깎고 사포질을 한 뒤 오일 마감까지 스스로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주걱과 지팡이는 종종 아이들 훈육 도구로 쓰였다. 계선은 자주 맞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맞았던 이유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의 매질 자체는 생생하게 기억났다. 맞은 부위에 늘 피멍이 남았다. 가끔은 피가 터질 때도 있었다. 자기 전엔 어머니가 바지를 벗기고 멍이 들었을 땐 된장을, 피가 터졌을 땐 연고를 발라주었다. 그런 날 밤이면 계선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울었다. 베갯잇이 눈물, 콧물로 축축해져도 멈출 줄 몰랐다.
아버지는 손으로 하는 건 뭐든 잘했다. 종종 먹을 갈아 서예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계선은 아버지의 손재주를 빼닮아 글씨도, 그림도, 바느질도 잘했다. 어린 계선이 그림을 그리면 다들 잘 그린다며 놀랐다. 아버지만 예외였다. 계선이 풀을 그리면 아버지는 '그렇게 가지런히 자라는 풀이 세상에 어디 있냐'며 호통을 쳤다. 아버지의 눈에 계선의 그림은 한 번도 눈에 찬 적 없었다. 사실 모든 게 그래 보였다. 아버지의 미간엔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는데, 늘 약간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어서 생긴 주름이었다. 웃을 땐 누구보다 호탕했지만, 웃음을 보는 날은 드물었다. 자식들이 좋은 성적을 받아와도 칭찬 한번 없었고, 끼니마다 몇 첩 반상을 차리는 어머니에게 맛있다는 말을 한 적도 없었다. 무엇도 아버지를 만족시킬 수 없다고, 계선은 생각했다. 이렇게 뭐든 못마땅할 거면 결혼은 왜 하고 자식은 왜 낳은 걸까. 계선은 자주 억울했다. 그러다 아버지도 눈에 안 차는 자식들이 태어날 줄은 몰랐으리라 생각하면 부끄럽고 슬펐다.
세상에 아버지 눈에 차는 사람 같은 건 없어. 언니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난 기회만 되면 바로 집을 벗어날 거야. 너도 얼른 나가'라는 말 다음으로 많이 하는 말이었다. 장녀인 언니는 어머니와 자신을 자주 동일시했다. 너무 어린 나이부터 그래서였을까? 언니는 성인이 채 되기 전에 무서운 아버지도, 무신경한 오빠도, 셋이나 딸린 동생도 진절머리 난 것처럼 보였다. 계선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대체로 무서웠지만, 무뚝뚝한 아버지가 어쩌다 한 번씩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건 좋았다. 오빠, 언니와 동생들도 좋았다. 아주 가끔 나오는 간식이나 물려 입을 옷을 두고 피터지게 싸울 때는 싫었지만. 대체로 좋았다. 그래도 빨리 집을 떠나고 싶단 생각은 언니와 같았다. 정확히는 동네를 떠나고 싶었다. 작고, 낡고, 소똥 냄새와 바다 비린내와 묘하게 섞인 시골 냄새가 싫었다. 기준이 높은 아버지 덕분에 계선이를 비롯한 세 자매 모두 남자 형제들과 같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지만, 그걸로 만족할 순 없었다. 더 넓은 세상이 궁금했다. 대학에 가고 싶었다. 서울에 가고 싶었다. 마침 계선은 제법 똑똑했다. 지역 대학은 무리 없이 갈 수 있는 성적이었다. 그러나 가진 못했다. 아버지의 높은 기준이 딸에게는 고등학교에서 멈췄기 때문이다.
하루빨리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던 언니는 만 나이로 성인이 되자마자 결혼했다. 언니의 남편은 대전에서 사업을 한다고 했다. 결혼식 전날, 언니는 엄마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빨갛게 부은 얼굴로 오빠와 동생들도 한번씩 안아주었다. 지금 울어야 내일 안 울어. 내일은 신부화장할 건데, 울면 안 되지. 퉁퉁 부은 눈에 얼음찜질하며, 언니는 말했다. 그리고 정말로 다음 날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아니었다. 결혼식 내내 손수건으로 눈을 찍었다. 엄마는 원체 눈물이 많았으니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계선을 놀라게 한 건 아버지였다. 결혼식 막바지, 남편과 함께 식장을 나가는 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이 빨갛게 물들던 순간을, 계선은 분명히 봤다.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전날 밤의 눈물이 거짓인 양 즐거워하는 언니를 보며 혼자만의 작은 비밀로 삼기로 했다. 결혼식이 모두 끝나고 남편의 차에 타며 언니는 활짝 웃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가벼운 웃음이었다.
계선은 결혼 대신 상경을 택했다. 1977년, 계선이 스물하나 되던 해였다. 기차를 타고 한참을 가서야 도착한 서울은 넓고, 정신없고, 매캐했다. 나중에서야 계선은 매캐한 냄새의 정체가 매연에 섞인 최루탄 냄새라는 걸 알았다. 분주한 사람들 사이에서 계선이는 괜스레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자치고 꽤 큰 편에 속하는 계선에게는 꽤 낯선 기분이었다. 배낭 끈을 꽉 쥘수록 더 작아지는 기분이 들어, 고개를 바짝 들고 가슴을 한 껏 내밀며 걸었다.
운 좋게 얻은 하숙집은 낯선 사람들로 복작대고, 좁고, 종종 냄새가 났다. 벌레도 나왔다. 그래도 늘 설렘이 더 컸다. 하숙집에 묵는 사람들은 대체로 대학생 같았다. 그 사이에 있으면 계선도 괜히 대학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좋으면서도 싫은 기분이었다. '괜찮아. 나도 곧 대학에 다닐 거니까.' 그럴 때마다 계선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작은 회사의 보조 직원 자리를 얻었다. 어떤 일을 하는 회사인지 잘 모를 만큼, 일은 계선에게 의미가 없었다. 의미 있는 건 매달 들어오는 월급뿐이었다. 돈을 차곡차곡 모은 지 일 년쯤 지났을 때, 계선은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꿈꾸던 전업 대학생은 될 수 없었지만 충분히 좋았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빡빡한 삶에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엄마의 영향으로 계선은 아주 어릴 적부터 성경을 읽고 주일학교에 다녔다. 서울에 와서도 제일 먼저 찾은 건 하숙집 근처의 성당이었다. 서울의 성당은 고향보다 규모가 더 컸다. 주일학교는 청소년부, 청년부, 성인부가 나뉘어 있었고, 입부 신청을 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입부 신청서를 받아 하숙집으로 돌아온 날, 계선은 이름 쓰는 란을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일주일 뒤 성당에 가기 직전까지 고민하다 출발 직전에야 이름을 적었다. 입부신청서를 받은 청년부 주일학교 교사는 뿔테안경을 낀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였다. 이름이 외자네요? 희? 무슨 한자에요? 상냥하고 친근한 목소리였다. ..기쁠 희자를 써요. 계선은 괜히 교사의 얼굴을 바라보기에 부끄러워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묻어나오는 사투리 억양이 유독 신경쓰였다. 이름이 너무 독특하고 예쁘다. 그런 말 많이 듣죠? 계선의 얼굴이 붉어졌다.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태어나 처음 듣는 칭찬에 입꼬리가 자꾸 올라갔다. 그래서 그냥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