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구마씨 Apr 02. 2023

나의 이혼을 반대하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

격정적인 세 여자와 평생을 함께한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

- 나 이혼할 거야.

이 한 문장을 듣는 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 같았다. 더 이상의 고민도 변덕도 없어진 분명한 결론이 나와 있는 내 상황을 듣는 모든 이의 첫마디는

- 다시 생각해 볼 마음은 없는 거야?

난 그들에게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이혼 후 안락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떤 준비를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해왔는지 구구절절 설명해야만 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아빠는 달랐다.

- 네가 고민 많이 하고 결정했겠지. 그래 알았다. 

<그래 알았다>라는 다섯 글자에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막내딸의 이혼 소식을 들으며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셨을 텐데 나의 결정을 전적으로 믿고 있다는 듯,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듯 말없이 지지해 주셨다. 하지만 분명 부모로서 자책을 하셨을 테고 나쁜 놈이라고 욕지거리라도 하셨겠지. 아니면 드시지도 않는 술을 드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빠는 나에게 어떤 내색도 하지 않으셨고 그때의 나에겐 응원이나 위로보다 그런 무조건 적인 지지가 필요했다. 


난 말하는 걸 너무너무 좋아한다. 힘든 일일 수록 말로 해소 하는 편이라고 해야 할까. 근데 단 한 번도 부모님께는 힘들다고 한 적이 없었다. 힘든 일이 있어도 내 마음의 모든 폭풍우가 지나가고 나서 기승전을 제외한 '결'만 말씀드리는 딸이었다. 

힘들 때는 왜 얘기를 안 하고 이제 와서 어쩌라고 폭탄을 터트리느냐고 말씀하셨지만 힘든 일일 수록 부모님께는 말할 수 없었다. 엄마는 내가 왜 그런 방법을 선택했는지 알지 못하셨지만, 사실 난 굉장히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때 나를 종종 때리고 밀치던 남자아이는 날 '곰팡이'라 불렀다. 어릴 적 고막이 없어져  종종 학교를 조퇴하고 병원을 다녔는데 자주 조퇴하거나 결석하는 나를 궁금해했다. 필요이상으로 친절했던 내 설명을 들은 그 아이는

- 귓속에 곰팡이가 난 거네! 넌 이제 곰팡이야, 팡이팡이 곰팡이!

너무 슬펐다, 누군가에게 폐를 끼친 적도 없고 그저 내 생활이 불편할 뿐인데 내가 왜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엄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내 얘기를 들은 엄마는 하던 일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씀하셨다. 

- 걔가 그렇게 말하면 넌 진짜 곰팡이야? 아니잖아, 남이 누가 어떻게 부르던 너만 아니면 되는 거야. 

사실 그게 맞는 말이었다. 걔가 이상한 거지 난 잘못한 게 없었다. 하지만 12살의 나에게는 틀린 말이었다. 그 후로 그 아이의 괴롭힘은 정도가 심해져 갔고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았다.


그 이후로 다시는 부모님께 도와달라 말하지 않았다. 초중고 12년 동안 제대로 된 친구가 한 명도 없었어도, 기말고사 국어시험에 컨닝을 했다고 교무실로 불려 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추궁을 받았을 때도, 담임선생님이 따로 불러 너네 엄만 학교도 한번 안 오냐고 타박할 때도 그저 내가 직접 오해를 풀고 싸워서 해결했다. 

그랬던 내가 고작 25년쯤 지났다고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었을까? 이해받지도 공감받지도 못할 테고 그저 걱정만 늘릴 뿐인 내 일상의 고민과 고단함을 말한 뒤 나올 엄마의 냉정한 말들을 들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 이혼소식을 엄마도 아빠도 이해하려 노력하셨지만, 가끔 전화통화로 안부를 나누는 엄마의 전남편에 대한 험담과 과한 걱정이 괴로웠다. 그저 <아 그랬구나, 힘들었겠다>라는 말이 듣고 싶고 엄마의 곁이 그리워 전화를 걸어도 잔소리와 과한 걱정뿐인 대화가 숨이 막혔다. 내 맘 속의 서운함이 쌓이던 어느 명절, 엄마에게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나는 반주로 마신 청하 몇 잔의 힘을 빌어 이혼 후 속마음을 처음으로 꺼내놓았다. 

- 엄마 사실은 10년이 너무 힘들었어, 엄마한테 말하고 싶었는데 엄마가 속상할까 봐 말을 못 했어. 미련하지? 엄마가 예쁘게 낳아 잘 키워주셨는데 잘 살지 못해서 미안해, 근데 나 진짜 진짜 잘 살고 싶어서 노력했는데 그게 잘 안 됐어.

나는 너무 힘들게 꺼낸 이야기였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엄마의 날 선 반응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나를 괴롭히고 있다.

- 그래서 그게 나 때문이라고 원망하는 거야?

그저 나는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이제는 잘 살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서운함에 택시를 불러 아이와 나가겠다는 나를 아빠는 잡지 않으셨다, 우선은 너도 쉬라고 그리고 내일 통화하자고.

잠들지 못한 채로 맞이한 다음날 이른 아침에 전화를 하신 아빠는 갑자기 집을 나와버린 나에게 화를 내지 않으셨다. 내 뜻은 그게 아닌데 엄마가 오해를 했다는 내 말에도 <엄마가 요즘 힘들었나 봐, 사람이 힘들면 그럴 때가 있잖아> 라며 엄마대신 사과와 변명을 해주셨고, 다신 집에 안 가고 싶다는 내 말에 <그래 네가 맘이 편해질 때까지 오지 않아도 돼, 애들이랑 그저 잘 지내기만 해>라고 해주셨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엄마는 술이 과해 실수 했다 사과하셨고 우리 가족 모두의 바닥을 보았던 그 일은 그냥 그렇게 어영부영 지나가게 되었다. 


작년 연말 독감에 걸려 마치 죽을 것 같이 아팠는데 우연히 본 뉴스에서 아이폰은 사용자가 사망을 해도 비번을 풀 수 없다고 해서 걱정이 됐다. 

- 아빠 아이폰은 내가 죽었을 때 미국 공장에 보내도 비번을 풀어주지 않는대요, 내 폰 비번은 0000이고 집 현관 비번은 0000이에요. 혹시 몰라서 아빠한테 말해둘라고. 그냥 넘기지 말고 꼭 메모해둬야 해.

느닷없이 전화를 해 엉엉 울며 말하는 딸의 말에 아빠는 기가 막혀 허허 웃으셨다.

- 지금 그러니까 우리 막내딸이 죽으면 엄마아빠가 핸드폰 못 열어서 부고 못 돌릴까 봐 걱정돼서 미리 말해주는 거야? 

- 나도 좀 아닌 거 같은데 아빠 너무 아파, 이렇게 아플 수가 없어. 독감이 아닌 게 분명해요, 이건 분명 다른 질병이라니까.

- 아이고 마흔 살 딸이 칠순 아빠한테 별소리를 다한다. 많이 아파서 그런가 봐 괜찮아? 엄마랑 아빠가 갈까?

특유의 장난기가 가득 실린 목소리의 아빠는 당신만의 방법으로 위로해 주셨다.

정말 너무 아파서 전화를 한 거였는데 아빠가 해주는 농담에 아픈 게 좀 나아지는 듯도 했다. 아프다고 훌쩍거리는 나에게 아빠는

- 힘들면 엄마한테 전화해서 말도 하고 투정 부려도 돼, 혼자 살기도 힘든 세상을 애들 셋까지 건사하는데 어떻게 안 힘들겠어. 힘들면 울기라도 해야 너도 살지. 

- 엄마한테 말하면 맨날 화만 내는데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말해

- 아이 이제 너네 엄마도 안 그래~ 이빨 빠진 호랑이야~ 정 그러면 아빠한테 전화해, 아빠가 다 들어줄게. 


어렸을 적부터 아빠는 나의 대화상대였다. 종종 요즘 읽는 책에 대해, 저녁에 봤던 뉴스 내용에 대해 늦은 시간까지 아빠랑 대화를 하곤 했다. 음악을 하던 나에게 멋들어지게 기타를 연주하던 아빠의 모습은 늘 마음속에서 조용한 응원이 되었다. (아주아주 나중에 알았는데 로망스 한 곡만 연주하실 줄 아신다는 반전과 사실은 악보 보는 건 아빠도 어려우셨다고 고백하셨다.)

책을 항상 가까이하시고 늘 공부하시는 모습이 아직도 나를 열심히 살게 하는 최고의 자극제이다. 아마도 70대 할아버지들 중에 우리 아빠처럼 멋진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지금의 나는 그 시절 엄마 아빠만큼의 나이를 먹었다. 나의 삶이 힘들다고 하지만 그 시절의 엄마 아빠의 삶보다 어려울 리 없다. 어렸던 나이에 결혼하셔서 두 아이를 낳고 키우시며 IMF를 비롯한 많은 역경을 겪었지만 단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닥치는 대로 열심히 사셨다.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 시간이었을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아직 내게 허심탄회 한 엄마와의 대화는 어려운 일이지만,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엄마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자존감 높고 뭐든지 최선을 다해 도전하고 보는 나의 모든 근원에는 아빠의 반짝거렸던 청춘이 녹아있다. 내가 더 나이가 들어 언젠가 내 맘속에 있는 서운함을 툴툴 털어버리고 그저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엄마를 마주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도한다. 그날이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 더 욕심 내자면 여전히 툭하면 울고 있는 마흔 살 막내딸의 느닷없는 투정과 어리광을 특유의 유머와 여유로 받아주고 오래오래 변함없는 지지와 응원을 해주시길 바란다.


그리고 여전히 멋진 70대를 살아가시는 나의 부모님께 감사와 응원을 드린다.


3대가 모두 모여 여행 갔던 삽시도의 바다


내일은 전화해야지....

이전 08화 나의 이혼이 당신은 불편한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