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소리 전세역전
2022년 10월 맹장이 터졌다.
어쩐지... 어젯밤에 배가 아파 잠을 잘 수 없더라니 가끔 씩 아프던 아랫배가 평소와 다른 것 같아 검색해 본 내 병명은 맹장염이었다.
아플 때 인터넷 검색은 독이라던데 혹시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병원엘 갔다. 담당 선생님께서 제 발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 날 보며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온 김에 초음파를 하라고 하셨다. 초음파로 본 내 소중한 맹장은 이미 터져 바로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내게 의사 따윈 묻지 않는 의사 선생님은 오늘 세시에 수술하려면 지금 수술 전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아 잠깐, 수술을 한다고? 그럼 입원을 해야 하나? 아 안되는데
- 선생님 수술하고 바로 퇴원할 수 있나요?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는 의사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아 네 안되는군요. 그렇다면 저의 수술날짜는 오늘이 아닙니다 선생님.
- 선생님 저희 가족 중 한 명이 아직 귀가를 하지 못하고 유치원에 있습니다. 제가 가지 않으면 그 어린이는 집에 오질 못해요. 이 수술은 내일 해주실 수 있을까요?
- 이미 맹장이 터져 통증이 계속 있으실 텐데 괜찮겠어요? 복막염의 위험이 있어서 지금보다 통증이 심해지면 바로 응급실 가셔서 수술받으셔야 해요.
- 안 괜찮을지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우선 제가 한번 잘 참아보겠습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친정식구들에게 알리고 회사에 병가를 내고, 삼형제를 전남편에게 데려다주고, 컴퓨터 하드 깊숙이 숨겨둔 체험학습신청서를 출력해서 학교 보안관실에 맡겨두고 유치원과 각자의 학원에 연락을 하고 한숨 돌리니 당장 내일 받을 수술이 걱정이 됐다. 정신없게 움직이느라 잊고 있던 배도 살살 다시 아픈 거 같다.
수면마취도 아니고 전신마취를 해야 한다는데, 보호자도 병원에 못 들어온다는데, 마취에서 못 깨어나면 어쩌지? 결국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미뤄뒀던 집청소를 하고 타이레놀 두 알을 털어먹고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그저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아침이 돼버려 부랴부랴 입원 가방을 싸고 집을 나서는데 멀리 사는 아빠가 전화를 하셨다.
- 병원이름이 뭐라고?
오지 마 아빠, 안돼, 못 들어와, 시동 걸지 마요.
나에게 우리 아빠는 언제나 이렇다. 아니라곤 하시지만 이미 출발하셨을 거였다. 몇 년 전에 술을 마시고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린 적이 있는데 분실물 연락이 하필 아빠한테 가서 가게를 집어던지시고 출동하신 전적이 있다. 내가 전화했을 땐 이미 절반쯤 오신 상황. 내 선에서 말릴 수 없겠다 싶어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언니도 이미 출발준비를 마쳤다고 했다. 나의 이 충동성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다 있었네 있었어.
- 두 사람 다 당장 멈춰.
가족들이야 혼자 사는 내가 수술을 받으러 혼자 들어간다는 사실이 세상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이었겠지만 내 입장에선 입원실 입구도 못 들어오고 병원 복도에서 몇 시간을 기다릴 아빠랑 언니를 생각하면 마취가 되다가도 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구시렁거리는 언니에게 아빠를 말리라는 미션을 주고 터덜터덜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가서 씩씩하게 수술을 받았다.
무사히 수술을 마친 나는 자다가 자다가 세상 지겨워져 못 잘 때까지 원 없이 자다 퇴원을 했다, 이게 시작인 줄은 몰랐지
2022년 11월 둘째가 코로나에 걸렸다.
무려 손꼽아 기다리던 마흔 살 내 생일날에. 미리미리 연차도 내놓고, 수영장이 있는 호텔도 예약해 둬서 오랜만에 꺼낸 여행가방에는 이미 온 가족의 수영복이 들어있었다. 비록 서울 한복판,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의 호텔이었지만 이혼 후 첫 여행(?)이라 삼형제와 1박 2일 동안 뭐 먹을지 메뉴도 다 정해 두고 삼형제가 물놀이하다 지쳐 잠들면 와인도 한잔 하며 기분도 내보려고 와인도 미리 사두었다. 미리 계획해 둔 모든 일정이 틀어짐에 속이 상했던 나는 어느 날인가 뉴스에 나왔던 어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아닌 척하고 호텔에 가서 우리끼리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잠시 고민해 봤지만 아이들 앞에서 그런 도덕적이지 않은 행동을 할 순 없었다.
자가 키트 속 의심할 여지없는 선명한 두줄. 점점 잠겨가는 목소리와 올라가는 체온, 그렇게 둘째를 시작으로 막내를 뺀 온 가족이 코로나에 걸렸다.
기침이 나면 같이 기침약을 먹고 열이 나면 같이 해열제를 먹었다. 난 예상했던 것보다 아파서 누워있고만 싶었지만 시간 맞춰 해열제를 먹이고 먹느라 누워 있을 틈도 없이 격리 기간이 종료됐다. 지난 3년을 귀신같이 피해 다니며 온 가족이 한 번도 걸리지 않았었는데, 20명 한 반에 13명이 걸렸던 그 엄청났던 오미크론도 안 걸렸었는데. 아니 난 나랑 삼형제가 슈퍼항체 뭐 그런 건 줄 알았지. 하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 하늘도 무심했다.
그래도 그 와중에 다행이었던 건 마지막까지 막내가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2022년 12월 막내가 독감에 걸렸다.
친정식구 모두가 친정에 모여 송년회를 약속했던 주였다. 내 생일, 언니 생일, 연말, 신년 모든 기념일을 모아서 한 번에 보내자며 언니랑 벼르고 벼르다 일정을 맞춘 빅 이벤트였다. 언니와 함께 짠 여러 가지 계획을 뒤로한 채 결국 생일에 이어 연말도 혼자 보내게 생긴 나는 누구라도 붙잡고 원망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저기요 하느님, 아직 저는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하고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는 코로나 후유증 환자입니다. 아직 기침이 너무 심해 잠을 자지도 못해요. 이건 좀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코로나를 피해 갔던 무적 막내를 시작으로 나, 첫째, 둘째까지 결국은 온 가족이 독감에 걸렸다.
코로나 때는 열이 올라도 38도 정도에서 더 안 오르더니 독감은 40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디지털 체온계에 선명하게 찍히는 숫자를 보며 이렇게 높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필이면 주말이라 병원에 갈 수도 없어 지난달에 쟁여둔 기침약과 해열제, 편의점 타이레놀과 종합감기약으로 이틀을 버텼다. 월요일 아침 병원에 가니 독감 검사를 받는 사람이 내 앞으로 30명이나 있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독감에 걸린 것 같았다. 타미플루를 받아먹고 나니 독한 약기운에 이게 내정신인지 쟤 정신인지 모를 지경이라 온 가족이 기절하듯 잠들었다.
다 같이 타미플루를 먹으면 거짓말처럼 괜찮아지고 한 끼 한 끼 식사 시간이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의 컨디션은 눈에 띄게 좋아졌지만, 늙고 약한 내 몸뚱이는 약기운이 떨어지면 거짓말처럼 열이 오르고 아팠다. 너무 아팠던 셋째 날 밤에는
- 아이고 하느님 빨리 독감이 나을 수만 있다면 술을 끊겠습니다!!
라고 기도했다. 하느님도 내 공수표를 눈치채신 건지 난 일주일을 내리 아팠다.
일상의 피곤함과 힘듦은 언제나 함께 하지만 2022년 하반기는 특히나 힘들었던 것 같다. 많은 계획을 하고 많은 약속들을 잡았지만 결국엔 혼자서 참 외롭게 보냈다. 나는 계속 아픈데 애들도 아프고 혹시 누구라도 옮을까 봐 친정식구들도 동네친구들도 모두 만나지 않았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애들 아픈 거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 참 외롭고 힘들었다. 이제는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람이 아프니 마음이 참 많이 무너져 내렸다. 이혼 5년 차, 처음으로 이혼하고 혼자 사는 삶의 고단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게 뭐라고 느닷없이 실감 나는 이혼녀의 삶이라는 무게감에 어이가 없었다.
연말이 지나고 모두의 기침이 잦아들 무렵 부쩍 잠을 잘 수 없었다. 안경을 벗으면 불안해서 쓰고 잤고,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터질 것 같이 뛰는 내 심장소리가 무섭게 크게 들려서 잠에 들 수 없었다. 밤마다 사부작 거리던 취미생활도, 잠이 안 오던 밤 넘기던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책에도 도무지 흥이 돋지 않았다. 그저 조금 못 자는 상태를 지나 결국엔 자고 싶지만 잘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삶의 질이 너무 떨어졌다.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 고민만 하고 있던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간단한 문진표를 작성해서 제출한 것 같은데 의외로 명쾌한 진단명이 있어 놀랐다. 그저 우울증 정도로만 생각했던 내 증상이 불안장애라고 하는데 이해가 가질 않았다.
- 모두가 이 정도의 불안감은 가지고 사는 거 아닌가요?
불안장애는 언제가 시작점인지 잘 모른다고 한다. 내가 비정상적으로 두근거리는 내 심장의 불안함을 인지한 건 이혼 직후 였다. 만약 내가 일을 구하지 못하고 자립하지 못해 삼형제를 전남편에게 보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전남편이 눈이 뒤집혀 나의 경제력을 문제 삼아 아이들을 빼앗아 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과한 상상이 불러온 단순 불안감인 줄 았았던 그게 질병코드가 있는 건지는 몰랐다. 이혼이라는 것에 익숙해지면 없어질 불안감이라고 생각했다.
우울감이 좀 올라오는 시기에는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내가 우울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며 치료를 받아볼까 했는데 인터넷에 떠도는 정신과 약의 부작용을 보고 나면 섣불리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약에 취해 잠들었다가 가끔씩 기침하며 깨는 삼형제의 소리를 못 듣고 자버리면 어쩌나 싶어 무서웠다. 밤에 사고가 나서 아이들의 생명이 위험한데 내가 잠에 취해 도움을 줄 수 없으면 어쩌나, 이 집에 보호자는 나뿐인데 하는 걱정에 섣불리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그런 나의 걱정을 이해하는 척해주셨지만 마스크 밖으로 보이는 눈빛이
<그런 걱정을 한단 말입니까?>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 진짜 치료받아야 할 상태로구나.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 아닌데 그 무렵의 나는 엉망진창이었다. 나를 걱정해 주는 친구의 말을 가식으로 생각했고, 나의 하루를 응원해 주는 말에 알지도 못하면서 책임질 수도 없는 응원 따위를 한다고 불쾌해했다. 잠을 못 자는 것도, 초조함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어떻게 하지 못할 때도 괜찮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변해 버린 내 마음의 상태가 너무 무서웠다. 내 마음이 무서워지고 나니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에 또 잠을 못 자곤 했다.
의사 선생님과 마주 앉아 상담을 하면서도, 이런 것도 약으로 조절이 가능한지 의심하는 나를 보며 의사 선생님만이 해줄 수 있는 위로를 해주셨다.
- 기침약처럼 약을 먹는다고 바로 괜찮아지는 건 아니지만, 시간이 오래 걸려도 나을 수 있어요. 중간에 포기하지만 않으면 완치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괜찮아진다고 하니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병원에 가기 전 걱정했던 내가 무색할 정도록 약을 먹은 후 일상생활을 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고 오히려 불안과 초조하던 마음에 편안함이 찾아들어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로운 마음으로 삼형제를 돌보니 우리 집은 매일이 편안했다.
빠르게 편안함을 찾아가던 나와 달리 아이들은 매일 저녁 약을 먹는 엄마가 걱정되어 불안했던 것 같다. 매주 한 번씩 병원에 가 일주일치 약을 보따리로 받아오는 엄마를 보며 아이들은 잔소리가 늘었다.
- 엄마 약 먹었어? 병원 언제가? 달력에 표시해 뒀어?
- 옷이 너무 얇은 것 같아, 감기 걸리겠어. 빨리 잠바 입고 따듯한 물 한잔 마시는 게 어때?
- 나 지금 따뜻한 물 마실 건데 엄마도 줄까?
- 엄마 맨날 빵만 먹으니까 배가 아프지, 또 배 아파서 수술받으러 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그동안은 나만 일방적으로 하던 걱정과 잔소리, 염려였다. 잠깐 하는 마른기침에도 비상약을 한 보따리씩 챙겨 두고, 하루종일 놀고 있는 아이를 따라다니며 체온계를 삑삑 거리고 노트에 시간을 적어가며 약을 먹였다. 한 번에 삼형제가 동시에 아플 땐 혼자 동분서주하느라 함께 아픈지도 모르고 그렇게 지났는데 어느새 자란 삼형제가 내 약을 챙기고 아프지 말라고 걱정과 잔소리, 염려를 나 대신 한가득 하고 있다.
내가 늙고 병들어 보호자가 필요할 때가 되면 삼형제가 내 보호자가 되어 주겠지 하는 생각은 했었는데 그때가 벌써 온 것 같아 어딘지 모르게 서럽기도 하지만 당당하게 잔소리를 하고 있는 똘망한 삼형제를 보고 있다 보면 든든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 걱정하지 마라 얘들아, 너희들 말처럼 25683살까지 좋은 거 많이 보고, 맛있는 거 많이 먹으며 건강하게 살 거란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면서 우리 삼형제 늙는 것도 보고 니들도 이제 늙은이라고 놀려도 먹어야지. 그러니까 너희도 나도 아프지 말고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