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
그동안 잠시 다른 일에 한눈 파느라 연재를 쉬었습니다. 반백의 머리에 다시 꿈을 꾸며 글을 계속 올려 보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올봄 30여 년 동안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정리했다. 곧바로‘유아 숲 체험 지도사’ 자격 취득에 매달려 무료할 틈 없이 몇 개월은 바쁘고 즐겁게 지나갔다. 자격증을 손에 받고 나니 푹푹 찌는 삼복더위였다. 바쁜 일 없이 집에서 종일 에어컨에 매달려 있자니 몸과 마음이 나른해졌다. 무료하고 나태해지려는 나를 추스르며, 뭔가 가슴 뛰는 일을 찾았다. 할 일 없이 늦잠과 낮잠을 자며 게을러지는 모습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우선 더워지기 전 아침 일찍 일어나 승기 쉼터와 배수지 공원을 돌아오는 아침 운동부터 시작했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모자를 눌러썼다. 물 한 병 손에 들고 간편한 운동복을 차려입고,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잰걸음으로 발을 옮겼다. 코를 통해 폐로 들어오는 새벽 공기는 선선하고 기분이 상쾌했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런데 그 새벽 온몸이 땀과 흙투성이인 채로 물뿌리개에 물을 담아 힘겹게 나르는 지인을 만났다. 새벽부터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 물어보니, 자기 아파트 동 1층에 꽃을 심어 가꾸는데 물을 주고 있단다. 공동 공간인 아파트에 개인이 꽃을 심어도 되는지 의아해 따라가 보았다.
나무 사이로 빨강, 노랑, 분홍으로 알록달록 피어있는 꽃들의 예쁜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인은 “예쁜 꽃을 여럿이 보니까 좋아요”하고 말했다. 꽃을 보고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지인의 집은 4층이다. 매일 아침 큰 물뿌리개에 물을 받아 들고 나와 물을 주며 꽃을 가꾼 지 사 년이 되었단다. 우리 집은 1층이다. 물을 주기도 쉬울 것이며, 꽃을 심고 가꾸기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난 베란다 작은 탁자에서 가끔 책도 보고 기타 연습도 한다. 꽃을 보면서 라면 금상첨화겠지 싶다. 수북이 자라고 있는 봉선화와 분꽃과 이름 모를 꽃모종 몇 포기를 얻었다. 운동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설레는 마음으로 우리 집 앞 일 층 화단으로 달려왔다.
나무 틈사이 잡풀이 무성하다. 급한 대로 집에 있는 모종삽을 들고 나와 나무 밑의 풀을 뽑기 시작했다. 한동안 비가 오지 않아 풀을 뽑을 때마다 흙먼지가 푸석푸석 날리며 흙내음을 풍긴다. 새벽바람에 날리는 흙내음과 싱그러운 풀 향기는 어릴 적 고향의 추억을 아련히 떠오르게 한다. 주말이면 부모님을 도와 형제자매 모두가 모여 시끌벅적 콩밭 매던 추억이 가슴 시리도록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그때도 호미로 풀을 캐내면 마른땅에 흙먼지가 날리며 뜯어내는 풀 향기와 흙내음이 코끝을 자극했다. 고향의 향기다. 고향에는 부모님 돌아가시고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 형제, 자매 모두 객지에 흩어져 산다. 커다란 집만 덩그러니 남아 폐허가 되어가고 있다. 이 더운 여름 아침 풀을 뽑으며 고향을 그리워하게 될 줄이야…
호미도 없이 모종삽으로 풀을 뽑기는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니 지하실 창가로 경비 아저씨들이 사용하는 삽 한 자루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삽을 들고 땅을 파서 흙을 뒤집어엎었다. 삽으로 골도 만들어 나갔다. 그렇게 땅을 정리하니 금방 한 평 반 남짓한 공간이 꾸며졌다. 얻어 온 꽃모종이 시들까 봐 서둘렀다. 대야에 물을 떠 와 물을 주고 모종을 심었다. 심어놓고는 그 위에 또 물을 흠뻑 주었다. 날씨가 워낙 더워 물을 많이 줘둬야 모종들이 몸살을 앓지 않고 뿌리를 내려 잘 자랄 것이다.
풀만 무성했던 나무 아래에 반듯하고 깨끗한 화단이 만들어졌다. 얻어온 모종을 나란히 심어놓고 보니 뿌듯하다. 하지만 아직 화단에는 빈 곳이 많다. 아직 멀었구나! 빨리 예쁜 꽃들이 채워졌으면 하는 아쉬움에 허전하고 쓸쓸해 보인다. 더 심을 씨앗을 찾아 쿠팡 쇼핑몰을 샅샅이 뒤졌다. 여러해살이 식물로 여름에도 심을 수 있는 종 모양의 예쁜 디기탈리스 씨앗과, 소담스럽고 화사한 겹 접시꽃 씨앗을 골라 주문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 집 베란다 창가에서 밖을 내려다보니 뜨거운 햇살 아래 땅은 금방 뽀송뽀송 마르고 심어놓은 꽃모종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힘없이 늘어져 있다. 얼른 대야에 물을 받아 들고나가서 심어놓은 모종에 물을 흠뻑 적셔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물뿌리개와 호스를 주문해 준다. 모종들이 자리 잡으면 호스를 이용해서 베란다에서 뿌려 주란다. 이 더위에 매번 대야에 물 받아 들고나가는 모습이 안돼 보였던지… 이제는 호수로 물을 받아주어도 되고 대야에 물들고 나가는 수고는 안 해도 되겠다.
더위에 심어놓은 모종이 마를까 봐 노심초사한 채 이틀이 지났다. 때마침 반가운 비가 촉촉이 내린다. 뜨거운 햇살 아래 힘겨워 고개 숙이고 있던 모종들이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고 고고한 자태로 섰다. 이젠 되었구나! 싶다. 이대로 자리 잡아 잘 자라서 내 화단에서 어엿하게 꽃을 피워 여러 사람에게 행복을 선사해 주기를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