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의 여행
“이번 금요일 시간 비워둬요” 밑도 끝도 없이 툭 던진 남편의 한마디였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내장산 단풍 구경 가잔다. 단풍철이라 주말에는 주차장에 들어가는 것조차 어려우니 금요일 하루 휴가를 냈단다. 나는 그간 근무 중에 휴가 내서 여행 가는 걸 쉽게 못 하던 사람이다. 이젠 내가 쉬니 남편이 휴가를 냈단다. 사실은 그날 도서관 독서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오랜만에 한 남편의 제안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 독서 모임에는 미리 결석한다고 양해를 구했다.
금요일 새벽 남편과 인천에서 출발해 정읍 내장산으로 차를 몰았다. 남편은 좋아하는 트로트를 받아 놓은 유에스비를 차에 꽂았다. 아침부터 남진의 ‘둥지’가 흘러나온다. 기분이 좋은지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그간 둘이서 고향에는 자주 다녔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명목으로 단둘이 떠난 것이 얼마 만인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차 안의 공기도 들떠있다. 휴게소에서 군것질거리 선택도 나한테 먼저 묻는 등 사소한 배려도 잊지 않는다. 싫지 않은 변화였다.
새벽부터 서둘렀으나 내장산에 도착하니 아홉 시가 다 되어간다. 당연히 평일이니 아직은 제1주차장에 자리가 있겠지 하고 지체하지 않고 1 주차장으로 올라갔다. 만차였다. 할 수 없이 차를 돌려 2 주차장까지 내려와 주차했다. 주차하고 내장산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걸어 올라갔다. 올해 단풍이 조금 늦다고 말들 했지만 중간중간 곱게 물든 단풍을 발견하면 남편은 여지없이 나를 불러 세웠다. “여기 서봐 저기 서봐” 주문하며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케이블카 탑승장에 도착했다.
벌써 줄이 70미터는 족히 서 있다. 얼른 뒤로 가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 남편은 주머니를 뒤적여 뭔가를 꺼냈다. 신분증이다. “왜요? 신분증이 필요하데요?” 묻자 싱글거리며 “경로우대받아야지” 웃음이 나왔다. 남편은 며칠 전 경로우대증을 받았다. 받자마자 얼른 사용하고 싶었나 보다. 그런데 앞에 서 계신 연세 좀 드신 어르신 한 분이 “여기는 경로우대 없어요.” 하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이 연세 드신 어르신들이었다. 젊은 사람이라면 부모님을 모시고 온 자녀들 아니면 가이드로 따라온 젊은이가 가끔 눈에 띌 뿐이었다. “하기야 여기 경로우대 해주면 할인 혜택 못 받을 사람 거의 없겠네요.” 하며 우리는 멋쩍게 웃었고, 남편은 신분증을 다시 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며 앞줄에선 어르신 부부와 이런저런 여행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우리 차례다. 산세를 감상하다 보니 금방 정상에 다다랐다. 케이블카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정상에 쉽게 도착했다. 참 편리한 세상이라 생각이 들었다. 정상 전망대 육각 정자가 있었다. 정자 한편 양지바른 곳에는 단풍나무 한그루가 유독 곱게 물들어있어, 포토존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친구들인 듯한 중년의 아주머니들은 다양한 포즈로 재미있게 사진을 찍고, 가족들은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연신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다. 덕분에 줄 서서 기다리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우리 차례가 왔다. 한 사람씩 교대로 독 사진을 찍어주자, 곁에서 지켜보던 아주머니 한 분이 “두 분이 함께 서세요. 제가 멋지게 찍어 드릴게요.” 하고 말한다. 얼마 만에 찍는 둘의 사진인지 멋쩍게 서 있자 “어깨에 손이라도 올리고 다정히 서보세요.”하며 짓궂은 주문을 한다. 또 옆에서는 “가족끼리 다정하면 반칙이죠!”라는 말도 들렸다. 오래 산 부부티가 너무 난 모양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내장사로 발길을 옮겼다. 내장사 진입로 백팔 그루의 단풍나뭇길은 유명했다. 십일월 초인데 아쉽게도 단풍나무들은 아직 초록빛이 더 강했다. 물들지 않아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 길을 거닐며 백팔번뇌를 모두 씻고 평온한 상태를 기원해 보는 숙연한 마음도 가져봤다. 남편과 둘이서 걷는 단풍나무 길은 그저 평온했다. 양지바른 길 물들기 시작한 단풍을 보면 남편은 여지없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댄다. 그런 남편을 보며 머리는 반백을 넘겼으나 순수했던 옛 감정은 남아있는 것 같아 왠지 모를 아련함이 밀려왔다.
내장사에서 내려오는 길 주차장까지 특산품과 먹거리에 품바까지 시끌벅적한 풍물시장이 이어져 있었다. 엿장수의 품바 타령과 걸쭉한 농을 듣고 배꼽을 잡으며 주전부리로 내가 좋아하는 옥수수도 사 먹었다. 정읍의 특산품인 감과 고사리 등 나물들도 푸짐했다. ‘깎아달라 안 된다.’ 흥정하는 모습도 재미있다. 시골 장터는 역시 활기가 넘친다. 남편은 더 보고 싶은 곳을 찾아 열심히 핸드폰을 뒤적였다. 정읍까지 왔으니 한 곳이라도 더 보고 싶은 모양이다.
내장산 근처에 쌍화차 거리가 유명하단 정보에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차를 몰았다.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쌍화차 향이 은은하게 코를 자극했다. 쌍화차를 주메뉴로 하는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매력적인 찻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한 바퀴 돌아보고 중간쯤에 있는 찻집으로 들어갔다. 찻집에 들어서자 단체 손님 한 무리가 썰물 빠지듯 밀려 나갔다. 조용해진 찻집에 둘이 앉아 쌍화차를 주문했다. 진한 한약 냄새에 따끈한 쌍화차가 나온다. 우리는 워낙 따뜻한 것을 좋아한다. 천천히 음미하며 깊은 맛을 즐겼다. 거기에 누룽지와 가래떡을 꿀과 함께 내어준다. 넉넉한 인심이었다. 따뜻한 차에 가래떡에 꿀을 찍어 천천히 먹다 보니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왔다.
오래전 안동 병산서원의 아름다움에 빠졌던 생각이 났다. 정읍 무성서원에 잠시 들려 올라가자 합의하고 차 핸들을 돌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복원사업 중이다. 더욱이 안동 병산서원의 웅장함과 아름다운 정원을 기억하던 터라 생각보다 규모도 워낙 작고 평범한 전통 한옥 느낌에 잠시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덕분에 잠시 정자에 앉아 쉬었다. 쉬면서 케이블카 탔던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 우리 좀 전에 탔던 게 뭐였지? 엘리베이터는 아니고” “응! 에스컬레이터”하고 남편이 태연하게 대답한다. “음~ 아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아” 둘이서 한참을 생각하다 겨우 생각이 났다. “아하! 케이블카” “아하” 그제야 남편도 생각 난 듯하다. 어이가 없다. 옆에 다른 사람들이라도 있었다면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웃겼을까? 아니면 치매 노인들일까 봐 황당했을까 싶다. 그래도 우린 결국 생각해 냈으니 치매는 아니라 안도하며 마주 보고 웃었다.
내장산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이 들어 느려진 보폭을 젊은 아이들에게 맞춰 달라하지 말자고, 바쁘다 자주 못 오는 아이들 눈 빠지게 기다리며 서운해하지도 말자고, 기억나지 않는 단어 생기거든 함께 노력해서 기억해 내자고, 느려진 보폭 맞추며 두 손 꼭 잡고 둘이서 가끔 여행도 하자고, 기운 떨어지고 기억 흐려지면 서로 등 기대고 의지하며 아름답게 잘살아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