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생각이 많아진다
몸은 아직도 기억하는 듯하다. 매일 아침 분주하게 옷을 차려입고 종종걸음으로 집을 나서던 그때를, 이제는 아침 일찍 눈이 번쩍 떠져도 굳이 치장할 필요 없이 챙 모자 하나 푹 눌러쓰고 나서면 그만이다. 매일 아침 출근할 일이 없어졌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김없이 시작되던 그 규칙적인 생활은 이제 조금은 흐트러졌다. 그동안 늘 함께였던 직장동료들과도 손에서 일을 놓으니 연락이 차츰 뜸해진다. 갈 곳도 마땅히 없다. 나를 찾아주는 이도 별로 없다. 이게 바로 나이가 든다는 걸까 싶다.
나이가 든다는 건 직장에서의 은퇴와 자녀들의 독립으로 사회적 역할과 책임감, 소속감의 상실로 이어지기도 한다. 바쁜 자식들의 방문을 기다리며 서운함과 노여움도 쌓여간다. 젊음의 활력을 잃는 것에 대한 상실감도 무시할 수 없다. 체력 저하나 여기저기 찾아오는 신체적 불편감은 기본일 것이다. 신체 변화로부터 오는 두려움 또한 작지 않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새로운 기술이나 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워 자존감도 낮아질 수도 있다.
나이가 든다는 건 결코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단점처럼 보이는 것도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는 태도에 따라 새로운 강점이 될 수 있다. 나이 듦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경험이다. 그 속에서 또 다른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시간을 빼앗아 가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시간이 선물하는 것도 많다. 내면이 더 단단해지고 풍성해지는 과정이다. 마치 나무가 나이테를 더해 가며 뿌리 깊고 튼튼해지는 것처럼… 지혜와 통찰력이 깊어진다. 삶의 연륜에서 오는 지혜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자산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빠르게 달리던 삶에서 벗어나 이제는 숨 고르며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젊을 땐 파도처럼 몰려오는 새로운 걸 좋아했다면, 나이 들면서는 잔잔한 호수 같은 평화로움이 더 소중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따뜻한 차 한 잔 좋은 책 한 권 같은 소소한 행복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나이 든다는 건 책임과 의무에서 해방되면서 새로운 취미를 찾기 시작하거나,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을 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 삼기도 한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새로운 꿈을 찾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긴 터널은 저마다의 속도와 저마다의 방법으로 통과한다. 터널 끝에 다다랐을 때, 보이는 풍경은 살아온 방법과 속도에 따라 다를 것이다. 바람이 잎새를 흔들듯 시간은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들이 바로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다. 세상이 내어준 옷들을 벗어던지고 비로소 맨발로 걸어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