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은 기적이라고 불린다. 출마 선언 당시 만해도 비주류 군소후보로 지지율은 한 자릿수에 불과했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은 ‘이인제 대세론’이 지배적이었고,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다. 만약 대세에 밀려 지레 포기했다면 그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인생을 스스로 개척했다.
대서사의 시작은 최초로 시행된 국민 참여 경선이었다. 2002년 3~4월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 국민(50%)의 투표가 진행됐다. 노무현 캠프는 다른 후보들에 비해 초라했다. 노 전 대통령은 현역 의원이 아니었고, 당원조직・자금 모두 뒤처졌다. 노사모는 수 십만 명의 선거인단 참여 신청서를 모으고 지지를 호소했다. 첫 경선인 제주에서 1위는 한화갑 후보, 2위는 이인제 후보, 노 전 대통령은 3위, 정동영 후보는 4위를 차지했다. 다음 날 울산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영남 후보론의 힘을 받으면서 1위를 차지했다. 이때부터 사실상 2강 구도가 만들어졌다.
광주 경선을 앞두고 문화일보와 SBS 여론조사가 경선 판도를 뒤흔들었다. 양자대결에서 노 전 대통령(41.7%)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40.6%)를 앞섰기 때문이다. 이는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처음으로 이긴 결과였다. 광주는 예상을 깨고 노 전 대통령을 1위로 만들어줬다. 이 후보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을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광주시민 여러분들의 위대한 승리, 민주당의 승리, 한국 민주주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렇게 노무현 바람이 불면서 2002년 4월 26일 16대 대통령 선거 공식 후보가 됐다.
노 전 대통령은 민주개혁 세력 대통합론을 꺼내 들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 부산시장 후보 문제를 상의했다. 그러나 성과는 없이 끝났고 역풍이 불면서 지지율이 하락했다. 여기에 김대중 대통령 두 아들의 비리 사건으로 위기가 찾아왔다. 노 전 대통령은 영남권에서 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하면 후보 재신임을 받겠다고 했는데 그 결과는 참혹했다. 당무 회의에서 재신임을 의결했지만 후보 사퇴론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2022년 월드컵 4강 진출로 인기를 얻은 정몽준 의원은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15%까지 떨어지며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내 수십 명의 의원들이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를 만들고 후보 교체론을 주장했다. 10월 17일 김민석 새천년민주당 의원은 탈당해 정 의원의 국민통합21로 갔다. 그러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소액 후원금이 쏟아지고, 지지율이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일화는 필수적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국민 50%, 당원 50% 안을 제시했지만 국민통합21은 거절했다. 노 전 대통령은 11월11일 본인에게 불리하다고 평가된 여론조사 단일화를 제안했다. 대승적인 결단은 지지율 상승을 견인해 단일 후보가 됐다.
정 의원은 대선 투표 전날 돌연 단일화 파기를 선언했다. 노 전 대통령은 설득을 위해 정 의원의 자택을 방문했지만 회동은 무산됐다. 진보진영은 대선 패배에 대한 위기감에 휩싸였고, 노 전 대통령에게 적극 투표하면서 57만표 차이의 극적 승리를 거두게 됐다.
16대 대선은 한 편의 드라마다. 개혁 성향의 노 전 대통령은 수없는 저항을 극복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정치공학과 기회주의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 있었다. 현재 고착화된 거대양당 구도에서 새로운 기득권이 생겼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스펙트럼은 넓지만 진보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진보적인 정책도, 국민 통합도 없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시민들과 함께 진보라는 거친 땅을 일궈 나갈 새 인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