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당 건설은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불가능한 도전에 가까웠다. 그러나 노회찬 전 의원은 단순 사회운동으로 만으로는 노동자, 농민, 서민 등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창당으로 가는 여정은 힘겨웠지만 진보정치를 구체화하고 현실화하는 데 필수적 요소였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 6시 신한국당 의원 154명이 국회로 잠입해 7분 동안 11개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중 하나가 복수노조 허용과 정리해고 법제화를 핵심으로 하는 노동법이었다. 민주노총은 노동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진보정치연합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총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에 진보정당 창당을 제안한다. 최종적으로 대선 기구인 국민승리21이 발족되고, 노 전 의원은 정책기획위원장을 맡게 됐다. 국민승리21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강력히 반대하며 재벌 비판, 노동자 권리 강화, 빈곤 해소 등을 주장했다.
노 전 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국민승리21은 제가 1997년 1월 ‘말’지에 민주민중세력들이 총집결해서 대선을 치르고 그 힘으로 진보 정당을 건설하자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민주노총은 그해 6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결의를 했습니다. 농민운동 조직은 뜻은 같이 했지만 민주당과의 관계로 시간이 좀 걸린다는 답변을 했습니다. 빈민 조직도 공식적으로는 참여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국민승리21에는 오세철・김세균 교수 등 좌파 지식인들도 참여했습니다.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해 선거를 치렀던 것이죠.”라고 설명했다.
국민승리21은 대선에서 30만 6026표를 득표했다. 1992년 대선보다는 많았지만 진보세력의 염원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국민승리21은 국민들에게 노동자와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의 존재를 인식시켰고, 민주노동당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1999년 8월 29일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권영길・양연수,・이갑용을 공동대표로 하고, 2000년 1월 30일 공식 창당 절차를 마쳤다. 노 전 의원은 초대 부대표를 역임했고, 16대 총선, 3회 지방선거, 17대 대선에서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비록 총선에서는 1.18%의 득표밖에 하지 못했지만 노동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지방선거에서는 기초단체장 2명과 광역의원 11명을 당선시켰고, 정당득표율은 8.13%을 기록했다.
노 전 의원은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8번을 받았다. 당시 자유민주연합이 지역구 4석, 정당득표율 2.9%로 비례대표 배정 기준에 미달했다. 단 0.1% 차이로 삼김(三金) 시대 풍미한 김종필 총재는 낙선하고, 노동운동가 출신 노 전 의원이 극적으로 당선됐다. 대한민국 정치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노 전 의원은 2004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자마자 배지 착용을 거부했다. 그 이유는 한자로 ‘國’이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들은 한글문화연대와 한글사랑 대학생 동아리 학생들은 노 전 의원에게 한글로 국회로 쓰인 배지를 선물했다. 이러한 관습 타파 노력은 2014년 국회의원 배지가 전부 한글로 바뀌는 결과를 낳았다.
노 전 의원에게 민주노동당은 정치철학을 현실로 구현하는 터전이었다. 오랫동안 꿈꿔온 진보정당 출현이었고, 그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으로 평가된다. 실제 민주노동당은 한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꼽힌다. 진보정치가 제도권으로 편입되고, 지금까지 정치권에서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 잡게 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들은 무상급식, 무상교육, 무상의료,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이자제한법,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등을 선도적으로 내놓았다. 최근 진보정당이 외면 받게 된 결정적 이유는 새로운 도전의 부재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다수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정책 제안과 이슈파이팅이 사라졌다. 이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사실상 진보정당으로써의 수명은 끝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