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열린우리당은 아픈 손가락이다. 민주당계 정당 중 가장 진보적인 정당이었고, 노 전 대통령은 큰 애정과 기대를 쏟았다. 창당 초기엔 개혁의 희망을, 말기엔 개혁의 좌절을 상징했다. 그렇게 노 전 대통령은 정치적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뼈저리게 느꼈다. 열린우리당은 100년 정당을 자임했지만 3년 9개월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노 전 대통령 당선 이후 새천년민주당은 동교동계인 구파와 친노계인 신파사이의 갈등이 시작됐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천정배・신기남・정동영 의원은 당의 외연 확대를 위한 쇄신을 요구했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은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기득권으로 인식됐고, 국민들 입장에서는 한나라당과 차별점이 거의 없었다. 신파는 과감한 재창당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구파는 동교동계를 배척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라며 거부했다. 송영길・우상호・임종석 의원은 두 세력 간 합의를 요구했으나 끝내 무산됐다. 노 전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 내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이루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지만 개혁세력의 신당 창당 의지는 확고했다. 그렇게 2003년 11월 11일 47명의 의원들이 모여 열린우리당을 창당한다.
열린우리당의 당명은 개방적 공동체주의를 지향한다는 의미이다. 4대 강령은 새롭고 깨끗한 정치실현, 중산층과 서민이 잘 사는 나라구현, 더불어 사는 따뜻한 사회건설, 한반도 평화통일이다. 전국 정당을 표방하면서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었다. 노 전 대통령은 2004년 5월 20일 열린우리당 수석 당원으로 공식 입당을 선언했다. 그는 "예전과 달리 내가 총재가 아니지만 의사소통은 더 활발하게 할 것입니다. 정책은 각 부처와 상임위원회에서 잘 협력하면 될 것입니다. 아직 지역구도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영남지역의 득표율은 국민의 많은 지지를 얻은 것이나 의석에 반영이 안 됐다. 당력이 약한 지역에는 정책적으로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그 지역 인재를 중히 써서 열린우리당이 전국적인 당의 면모를 갖추게 배려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당부했다.
열린우리당은 다양한 개혁입법을 추진했으나 한나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참여정부는 국민들의 지지를 서서히 잃어갔고, 열린우리당은 재보궐선거에서 연패를 했다. 그러자 민주당과의 합당을 주장하는 의원들이 연이어 탈당했다. 152석이었던 의석수는 73석으로 줄었고 제2당으로 전락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6년 11월 30일 청와대 참모들과 오찬에서 "나는 신당을 반대합니다. 말이 신당이지 지역당을 만들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열린우리당을 지킬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대세는 통합으로 기울었다. 2007년 8월 20일 열린우리당은 대통합민주신당과 합쳐졌다.
노 전 대통령 시절 민주당의 분당과 통합과정은 변증법적 실패라고 볼 수 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대립하는 생각이나 상황이 만나서 더 나은 새로운 상태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정반합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정은 현재 상태, 반은 그에 대한 도전, 합은 두 가지를 통합해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새천년민주당은 노 전 대통령을 배출했지만 기득권 정치와 지역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열린우리당은 새천년민주당의 한계를 비판하며 노 전 대통령의 개혁적 정치 노선을 더 명확히 실현하려는 시도였다. 대통합민주신당은 쪼개졌던 두 정당을 통합해 중도층을 공략하고 정권 재창출을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추구했던 순수한 개혁성은 약화됐고, 호남 기반의 지역주의로 회귀하는 결과를 낳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새로운 일을 하려면 과거의 낡은 것은 버리고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진보진영에는 노무현 정신을 계승・발전시킬 새 그릇이 필요한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