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전 의원의 삶은 1972년 10월 유신 전후로 나뉜다. 이때가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정치적 소명의식이 생긴 순간이기 때문이다. 당시 비상계엄령 선포와 국회 해산에도 세상은 너무나 조용했다. 분명 자신이 배운 교과서 내용대로라면 잘못된 것이 맞는데 배신감마저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노 전 의원은 결코 범인(凡人)이 아니었다.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찾았고 바로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3년 유신 1주년이 됐을 즈음 대학생들이 반독재 시위를 벌이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노 전 의원은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친구들과 유신 반대 유인물을 교내에 살포하기로 결심했다. 필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타자기를 이용했고, 한밤중 교회에 몰래 들어가 등사기로 인쇄를 했다. 다음날 학교 담장을 넘어가 교실마다 유인물을 뿌린 뒤 성공적으로 도망쳤다. 아침에 학교는 아무렇지 않은 듯 조용했는데 학생들의 등교 전에 모두 수거해 버린 것이다. 얼마 뒤 일부 고교에서 시위 움직임이 포착되자 박정희 정권은 조기 방학 긴급지침을 내렸다.
대학에 입학한 뒤에는 학생운동 시위에 열심히 참여했다. 그러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보면서 울분을 토했다. 노 전 의원은 부산에 있었는데 일본 NHK 방송을 통해 참담한 상황을 목격했다. 그는 군대가 짓밟은 광주를 혼자 찾아가 넋을 위로했다. 노 전 의원은 친구에게 “내가 마음이 힘들어서 광주에 다녀왔다. 충장로와 금남로 술집을 순회하면서 일부러 고향 사투리를 쓰면서 ‘부산에서 왔습니다’라고 하니까 그분들이 내 말을 듣고 따뜻하게 맞아주시더라”라고 전했다.
노 전 의원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조직화・세력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들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직접 노동 현장으로 가기 위해 서울기계공업고등학교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에서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땄다. 노 전 의원은 용접공으로 위장취업을 했고, 노동자로서 정치운동을 이어갔다. 1982년부터 각종 시위를 주도하고 불온문서를 배포한 혐의로 수배생활이 시작됐다. 그렇게 그는 대학생에서 노동운동가로 변모했다.
노 전 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원래는 대공장 들어가려고 기아자동차에 시험을 쳐서 붙었는데 실수를 해서 예비군 때문에 대학출신이라는 것이 밝혀져서 떨어졌어요. 그래서 인천에 있었던 현대정공 하청 회사에서 아주 초보적인 운동을 하고 있었죠. 그때만 해도 저희는 변혁을 위해서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서 기술도 배웠어요. 1983년쯤 되니깐 1명, 2명 현장에 대학출신이 생기더니 다음 해가 되니깐 더 많은 위장취업자들이 왔어요. 자연스럽게 그전에 알고 지내던 후배들이 같이 하자 해서 서클을 만들었어요. 그 당시로서는 내가 알기로는 전국에서 제일 컸어요. 어마어마하게 컸지.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 인천, 주안, 부천팀이 모여서 만들어지는데 그중 한 축이 되죠.”라고 회상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노동자 대투쟁이 이어졌다. 인민노련은 친북성향의 주체사상파(NL)와 헌법철폐・새 정부 구성을 주장하는 제헌의회파(NDR)와 선을 그었다. 실제 1987년 6월 10일 창립 선포 직후 NL진영과 결별을 선언하고, 민중민주파(PD)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PD는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추구했고,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했다.
노 전 의원은 인민노련 중앙위원, 사회주의자 편집위원으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89년 12월 24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고,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인민노력은 1991년 7월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합법적인 진보정당 결성을 추진한다. 1992년에는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거쳐 민중당과 합당했다. 그러나 그해 통합민중당은 총선에서 참패하고 해산됐다. 1992년 4월 15일 진보정당추진위원회가 결성됐고, 장기적 관점에서 진보정당운동을 실행해 나가기로 했다.
노 전 의원은 만기 출소 후 1992년 대선에서 백기완 선거대책 본부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고작 23만 표라는 득표수에 실망하고 떠난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1995년 9월 25일 진보정당추진위원회는 민중정치연합과 합쳐져 진보정치연합이 됐다. 노 전 의원은 진보정치연합이 국민승리21과 합당할 때까지 대표를 역임했다. 1996년 총선을 앞두고 보수 소수정당인 개혁신당과의 연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노 전 의원은 노동운동은 진보정당 역사의 시초가 됐다. 여러 차례의 실패에도 굴하지 않았고, 끝까지 기득권에 투항하지 않았다. 노동자와 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는 원칙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요즘 정치를 하겠다는 청년들은 대부분 거대정당으로 향한다. 말로는 사회적 약자 대변을 외치지만 행동이 뒷받침되는 경우는 드물다. 소명보다는 권력욕이 앞선다. 청년 정치에 회의감이 드는 이유다. 이제 진보정당에는 청년이 거의 없다. 어쩌면 자신의 인생을 걸고 수없는 실패를 받아들일 용기를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