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신당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야권연대가 아닌 독자노선을 추구하며 참패했다. 민주노동당과의 차별화에 노력했지만 국민들의 마음을 얻진 못했다. 노 전 의원은 총선을 앞두고 다른 정당들과 통합한 새로운 진보정당 출범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러나 2011년 9월 4일 임시 당 대회에서 제동이 걸렸다. 노 전 의원은 서울에서 진보정당 최초의 지역구 의석 확보가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2011년 9월 23일 노 전 의원은 진보신당 탈당을 선언했다. 더 큰 진보정치를 진심 어린 행보였다.
노 전 의원은 “9월 4일 진보신당 당 대회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꺼져가는 진보대통합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부득이 탈당하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동지적 우정을 함께 나눈 분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주신 분들께 머리 숙여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제대로 된 진보정당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합니다.”라고 밝혔다.
노 전 의원은 2011년 11월 20일 유시민・이정희 전 의원과 함께 통합진보정당 출범을 선언했다. 진보신당 탈당파,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의 통합으로, 3인 공동대표 체제를 갖췄다. 하나의 당은 됐지만 세 정파 간 불편한 동거가 시작됐다. 2012년 4월 11일 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은 지역구 7석, 비례대표 6석을 확보했다. 당초 목표였던 교섭단체 구성은 무산됐지만 진보정당 역대 최다 의석을 얻었다. 노 전 의원은 서울 노병원에서 57.2%로 허준영 새누리당 후보에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선거 승리의 기쁨은 잠시였다. 비례대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됐고, 통합진보당은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조사에 나섰다. 진상조사위원회는 5월 3일 비례대표 후보 선거가 총체적 부실, 부정 선거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온라인 투표에서 당원이 아닌 사람이 투표하고, 투표 과정에서 선거관리원이 아닌 당직자 지시로 네 차례나 프로그램에 손을 댄 것으로 조사됐다. 현장 투표에서는 선거인 명부에 같은 사람 글씨가 보이고, 투표용지 일련번호를 떼지 않거나 직인이나 사인이 없는 투표용지도 발견됐다. 옛 민주노동당 계열인 당권파는 결과를 수용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결국 이석기・김재연 전 의원의 제명 처리안이 부결됐고, 당시 대표였던 강기갑 전 의원은 단식을 하며 타협을 호소했다. 당권파는 이조차도 거부했다.
노 전 의원은 2012년 9월 3일 당 홈페이지를 통해 “지금 이 시각 강기갑 지도부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통합진보당 최고위원회의가 열리고 있습니다. 오늘까지의 상황을 볼 때 파국은 이미 임박해 있습니다. 진보정당이 스스로 혁신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바꾸는 일은 요원합니다. 동시에 진보세력이 단결하고 외연을 넓히지 않고서는 집권 근처에도 갈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호소드립니다. 이석기 의원은 저와 함께 의원직을 동반 사퇴합시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의 잘못입니다. 국민에 대한 죄송함과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노력하겠다는 결의를 보여드립시다.”라고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간절한 호소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노 전 의원은 9월 13일 유 전 의원, 심상정 전 의원 등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탈당했다. 그때 주체사상파(NL)의 중심축인 인천연합까지 당을 떠나면서 통합진보당은 6석으로 축소됐다. 노 전 의원은 "어느 것도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은 불안정하고 혼돈에 찬 길이지만 그래도 갈 것입니다. 국민과 당원들을 믿고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창당의 길로 나아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노 전 의원에게 민주노동당・진보신당・통합진보당 탈당은 뼈아픈 일이었다. 단 한 번도 사익을 위해 당을 떠난 적은 없다. 오직 진보정치의 이상과 외연확장이라는 현실에서의 고뇌뿐이었다. 노 전 의원이 우리에게 남긴 과제는 명확하다. 진보정당이 어떻게 더 많은 지지를 받고, 통합과 연대를 이루고, 대중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다. 정당의 목적은 정권창출이다. 지금처럼 이념적 순수성에 빠져 스스로 고립을 자처한다면 시민단체를 해야지 정당을 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