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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오톡방 18화

18. 점심시간

40, 수진

by 장하늘

오톡방


18. 점심시간



수진은 그날 점심시간, 도시의 소음마저 잊은 채 푸들의 초대에 이끌려 그의 집 문 앞에 섰다. 제부도에서의 하룻밤 기억은 흐릿하지만, 푸들과 주고받은 농담과 가벼운 터치, 그리고 그의 따뜻한 눈빛은 아직도 잔잔하게 그녀의 마음을 울리고 있었다. 오늘은 그 미묘한 떨림을 다시 한번 느끼고자,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푸들의 집은 고층 아파트의 한 유닛이었다. 깔끔하고 세련된 외관이 돋보였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수진의 눈앞에는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은 감각적인 공간이 펼쳐졌다. 내부는 정돈된 분위기 속에서도 푸들만의 취향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절제된 컬러 톤의 가구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고, 은은하게 퍼지는 우드 향이 공간을 감쌌다. 거실 한편에 자리 잡은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에서는 세련된 분위기가 느껴졌고, 주방 쪽에서 커피빈의 향이 잔잔하게 퍼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혼자 사는 남자의 깊고 단정한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수진은 한참을 둘러보며, 공간 곳곳에 스며든 섬세한 디테일에 마음을 빼앗겼다. 벽에는 과거의 추억을 담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고,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살이 실내를 한층 더 따스하게 물들였다. 특히 주방에서 풍겨오는 신선한 커피 향은, 그가 새로 들인 커피머신에서 갓 추출된 듯해 그녀의 감각을 사로잡았다.

그때, 부드러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푸들이 다가와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구름 누나, 이쪽으로 오세요.

그의 목소리는 잔잔한 선율처럼 공간을 감싸며, 수진의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커피머신 상태를 봐야 한다며 초대한다고 했을 때 농담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진짜 오게 될 줄이야. 그런데 집을 정말 멋지게 꾸며놨다. 멋지다 정말.”

수진의 말에 푸들은 커피잔을 조심스레 건네며 말했다.

푸들: 누나가 추천해준 커피머신 덕분에 집안 가득 퍼진 이 커피향이 오늘을 더욱 뜻깊게 만들어주네요.

두 사람의 대화는 서서히 커피 한 잔의 여운처럼 깊어져 갔다. 소파에 둘러앉은 채, 그들은 잔잔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창가에 놓인 작은 테이블 위에는 따뜻한 커피가 담긴 잔이 놓여 있었고, 수진은 한 모금씩 음미하며 그 향과 맛에 취해갔다.

수진:여기 있는 모든 것이 마치 한 편의 시 같다. 벽에 걸린 사진, 음악 소리, 그리고 이 커피향까지… 모든 게 너만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아. 난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이렇게 깨끗하고 좋다는 게 놀라울 뿐이야. 집이 너무 아늑하고 좋다.

푸들이 수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푸들: 구름 누나? 집은 저에게 삶의 한 조각이에요. 혼자 살다 보니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느껴져요. 오늘 이 시간도, 오랫동안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아요.

푸들이 담담히 속삭였다.

잠시 후, 푸들은 부드러운 손길로 수진의 손을 살며시 감싸며 이어갔다.

수진: 작은것 하나마저도 맞춤인 듯한 집, 참 좋다.

푸들: 누나가 제집이 좋다니 기분이 좋네요.

수진: 이렇게 완벽한 집에 여자만 들어오면 될 것 같은데? 푸들은 왜 아직 결혼 안 했어?

푸들: 음…. 글쎄요. 인연을 못 만난 거겠죠.

수진: 들어오는 사람은 로또겠다.

푸들: 로또요?

수진: 어. 너무 멋져, 집이.

푸들: 그럼, 누나가 가끔 와줘요.

수진: 어? 내가?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수진의 표정과 달리 진지하게 바뀐 표정으로 푸들이 말했다.

푸들: 네. 장난 아니고 진짜예요. 가끔 와줄래요?

수진은 푸들의 진심 어린 눈빛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푸들: 어? 이거 낙장불입이에요.

두 사람은 커피의 쓴맛과 단맛이 어우러지듯, 서서히 마음의 거리를 좁혀갔다. 집안 곳곳에서 느껴지는 남성적이면서도 감성적인 향수의 자취, 그리고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듯한 소품들이 그들의 대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푸들의 집은 단순한 거실을 넘어, 그의 삶과 감정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작은 세계였다. 한쪽 선반 위의 블루투스 스피커에서는 은은한 가요가 흘러나왔고, 그 리듬은 두 사람의 심장을 잔잔히 두드렸다.

푸들: 누나라고, 부르기 싫은데, 닉네임 말고 이름 알려주면 안 돼요?

수진 :아…. 내 이름, 오수진이야.

푸들: 수진. 오.수.진. 이름이 예쁘네요. 몇 월생이에요?

수진: 10월.

푸들: 앗, 10월이군요, 가을에 태어나서 닉네임을 구름으로 한 건가? 아, 누나는 혹시 자신의 가장 큰 매력이 뭐라고 생각해요?

수진: 어? 나 무슨 매력?

푸들: 자신의 매력을 몰라요?

수진: 나는 내 매력을 잘 모르지, 그런 건 원래 타인이 더 잘 아는 거 아닌가?

푸들: 말해줘요?

수진: 어 궁금해.

푸들: 음…. 향기.

수진: 어? 진짜? 나 오늘 향수도 안 뿌렸는데?

푸들: 아니, 수진의 체취, 살짝 불어오는 바람에 전해지는 너만의 향기.

수진: 너? 맞먹네?

푸들: 하하하 어. 너. 한 살 차이고, 생일로 하면, 우리 겨우 4개월 차이인데 맞먹으면 안 되나?

수진: 넌 그럼 3월생이야?

푸들: 어. 부탁이 있어? 들어주면 좋겠는데.

수진: 뭐?

푸들: 맡아보고 싶어, 가까이서.

난처해하는 수진의 어깨에 푸들이 고개를 기대었다. 수진은 자신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수진의 떨림과 푸들의 떨림이 함께 느껴졌다. 푸들이 고개를 돌리자 수진과 푸들은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수진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푸들의 부드러운 손길과 담담한 음성에 몸을 맡겼다. 실내를 감도는 커피 향과 남성적 향수의 조화는, 그들의 감각을 더욱 자극하며 점점 더 가까워지게 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기다려온 듯, 두 사람은 어느새 잔잔한 대화에서 격정의 몸짓으로 넘어갔다. 푸들의 손바닥이 수진의 가슴을 만지자, 미세한 떨림이 그녀의 온기를 더해갔다. 점심시간의 한 가운데서, 푸들의 집은 두 사람의 감정이 만들어내는 은밀한 무대가 되었다. 커피잔의 마지막 한 모금이 식탁 위에 놓인 채, 그들은 서로의 눈동자 속에 담긴 미소와 떨림을 온전히 느꼈다. 소파 위에서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나눈 뜨겁고도 진한 키스는 서로의 속살을 탐색하며 그 열기가 더해갔다.

몸을 일으킨 푸들이 수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둘은 침대에 몸을 눕혔다.

“잠깐,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수진, 호진, 이름이 우리 가족 같다. 난 최호진이야”.

호진, 최.호.진. 수진은 호진의 이름을 되뇌면서 마치 호진을 모두 안 것처럼 안도감을 느꼈다.

집 안 구석구석에 깃든 향기와 따스한 빛, 그들의 모든 순간을 더욱 아름답고 진하게 기록해 주는 듯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서로의 존재 속에 깊이 빠져들었고, 말없이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는 접촉이 이어졌다. 옷자락이 흩어지고, 체온이 가까워지던 순간, 수진은 과거의 모든 상처와 두려움을 잊은 채, 새로운 자신을 만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다시 없을 일반적인 연인처럼 ‘자기’라는 호칭을 쓰며 서로를 받아들였다. 그 순간, 호진의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감정과 욕망이 뒤섞이고, 커피향과 낮은 음악 소리, 은은한 햇살이 그들의 온기를 감싸 안았다. 포근하게 끝이 난 섹스. 그러나 수진의 몸 어딘가엔 채워지지 않은 갈증이 남아 있었다. 불길처럼 타오르다 잦아드는 열기, 그녀는 그 미묘한 공허함을 느꼈다.

호진은 숨을 고르며 수진을 품에 안았다. 방 안은 고요했고, 뜨거웠던 순간이 남긴 잔열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의 피부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점점 식어가는 것을 수진은 무의식적으로 인지했다. 그리고 그 순간, 호진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수진아, 나 사실 제부도에서 너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하는 말만 신경 쓰였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그럼, 커피머신은 핑계였나?”

“사고 싶기도 했고… 나도 잘 모르겠어.”

“다만, 뭐라도 구실이 필요했어. 너한테 계속 말을 걸고 싶었거든.”

잠시 멈춘 그의 눈빛이 수진을 깊게 바라봤다.

“사람 마음이 그렇잖아. 괜히 뭔가 말 걸어 보려고 물어보고…

그게 다… 너랑 얘기하고 싶어서였어.

우리 사이가… 그냥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긴 어려운 상황이잖아.”

호진은 계속 수진에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수진의 귓가를 스칠 뿐, 그녀의 마음에는 닿지 않았다.

수진은 호진의 팔베개를 한 채 누워있었다. 그러나 그의 온기 속에서도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전혀 다른 장면이었다.

혀니.

그의 거친 숨소리, 뜨겁게 그녀의 몸을 훑던 손길. 단순한 스침이 아니었다. 온몸을 휘감던 강렬한 열기. 그의 손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피가 끓어오르던 순간. 의식이 아득해질 만큼,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감각 속에서 무너졌던 기억.

그때의 쾌락이 떠오르는 순간, 수진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었다. 지금, 호진과 함께 있는 이 순간에도 그녀의 몸은 혀니를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은 너무도 선명한 동시에,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모래처럼 허무했다. 그때의 환희는 위험하고 무섭도록 강렬해서 그녀가 가까이 갔다가는 그녀를 소멸시킬 것 같았다.

수진은 눈을 감았다.

현실과 기억, 열기와 공허함이 뒤섞이며 그녀의 마음속에서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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