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일 2023. 3. 29. 오전 3
잠을 자려고 누워 유튜브 목록을 계속 끌어내리다가 찾은 피아노 연주곡 플레이리스트.
이런 유튜브 영상에는 항상 서로를 보듬어주는 댓글뿐.
그렇게 자려고 누워있다가 빨래를 안 널었다는 사실에 눈물을 닦고 힘차게 일어선다. 텅 빈 집 한가운데 넓게 자리 잡은 따뜻한 색의 러그는 보기만 해도 부드러워서 슬리퍼를 신고 있는 와중에 여기에 뛰어들어서 저 부드러움에 허우적거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겁지 않은 몸으로 이리저리 움직여서 세탁기를 열어보니 떨어지는 빨래들에도 추억이 있구나. 별거 아닌 담요에 넌 선심 쓰듯 내가 원하는 색깔까지 맞춰서 웃으며 바꿔주었지. 너도 본성이 그러진 않을 거라고 조금은 이해해주려고 한다. 너의 전과 후로 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대체로 나를 어둡고 나쁜 길로 인도했지. 동화되고 또 나를 탓하기만 하는 내 모습이 싫어 떠난 마지막 벼랑에서 문득 생각한다.
우리 너무 깊게 파고들지 말자. 지나가면 다 예쁜 추억만 남는걸.
시간은 우리에게 이로워서 아픔을 모두 가져가거든. 그래서 무뎌진다고 하는 거겠지.
지금, 크게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불행하지도 않은 이 순간에 내가 떠오르면,
나도 너에게 모두 나쁘지만은 않았을 거라고 굳이 좋은 기억 하나만 떠올려줘.
우린 그 순간 스스로에게만 충실했고 서로를 파헤치려 안달 나 있었으니 고의가 아니어도 모든 건 서로에게 상처였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미움은 마음에 큰 부분을 차지하며 수시로 들썩이면서 불평과 불안들을 만들어낸다. 미움이 미움을 낳고, 그런 환경 속에서 서로를 불신하고, 거짓과 허상 속에서 내가 누구였는지 잃어버릴 때쯤 후회하지 말자.
이름만 들어도 불안해지는 사람에게 화해를 건넸다. 용기보다는 이기가 적당하다. 그래서 더 머뭇거리고 제발 누가 현명한 방법을 알려주길 바랐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내가 다 감당해야 하는 법. 이상적인 해결법에도 마음은 따라주지 않는 게 인간이니까. 그렇게 며칠을 못 견디다 기어코 행동해버린 거지. 응해주면 다행이고 거절하거나 또 모진 말 들어도 난 할 만큼 하는 거니까 마음속 짐을 버리려는 이기심이 이겼다.
이 얘길 모두에게 하진 못했다. 미련하다고 할까 봐. 근데 난 이게 편하다. 그 사람의 나쁜 면을 알았으니 이제 알고 조심하거나 잘 피하면 되고 내 마음속에서 미움이라는 짐은 사라진 채 좋은 추억들만 두는 거. 그렇게 하면 생각보다 힘들었던 때의 기억이 쉽게 보인다. 그때 서야 비로소 동굴에서 나올 수 있다고 해야 할까.
이 생각의 끝은, 그래도 그때의 넌 분명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거라고. 이제는 네가 그때의 너를 솔직하게 적을 수 있어서 나처럼 너도 속으로 용서를 구하길 바란다고.
나도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아직 내 안에는 미움 말고도 짐이 많거든.
유튜브 피아노 영상이 끝나가는데 제목이 해일이다. 이제야 봤다. 우리 마음도 그저 해일과 같아서 왔다가도 가는 게 맞을 텐데, 우린 왜 항상 끝없이 치솟은 해일이 들이닥치는 때에만 기억이 선명한 걸까. 미움도 후회도 다 거품처럼 사라져버렸으면. 그럼 너는 더 행복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