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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현 Aug 14. 2023

매운 연기

2023년 7월



  담배를 처음 폈을 때, 그때의 매캐한 느낌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느낌이 너무 싫어서 난 아직까지도 담배와 친하지 않다. 그렇다고 못 피우는 건 아닌 그냥 아는 사이 정도.


 그 매캐한 느낌이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형언해봐야지. 그건 평소에 숨을 쉬면 들썩이는 가슴 부분의 안쪽이 전부 쓰고 매운 연기로 답답하게 가득 차는 느낌이다. 첫 경험의 기억은 씻어낼 수도 없었던 그 기분 나쁜 매캐함이 한 3일은 갔었다.


 지금은 담배를 펴도 그런 기분 나쁜 매캐함은 남지 않는다. 그래도 그 냄새가 싫어 피지 않는다. 당최 많은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준다던 이 기호식품은 왜 나한테 통하지 않는 건지 중독도 되지 않는다.


 가끔 스트레스로 마음이 불편해지면 담배의 첫 경험과 비슷한 느낌으로 마음이 매캐하니 답답해진다. 자주 그러는 건 아닌데, 그렇게 매캐한 상태가 돼버리면 도무지 내 시간들은 아무런 의미도 찾아내지 못한 채 낭비된다. 사실 어감이 좀 더 쎄게 표현되었으면 한다. 매캐~한 정도가 아니라 메퀘~하다. 의미 없는 시간 속에서 나는 행복을 느껴도 순식간에 우울로 빠진다. 그마저도 이유를 모르니 자아 성찰은 백번도 더했다. 


 나도 잘 안다. 생각 안 하고 하면 어떻게든 결과는 나올 것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다. 모든 건 마음가짐에 달려있다고, 내뱉어 본 말들도 수십 번이다. 오히려 생각이 소리를 타고 표현되면 나는 참 덤덤한 사람이 된다. 물론 내 속보다 덤덤한 사람인거지, 징징대는 게 맞다.


 그럼 그 마음속 매캐함이 사라질 때까지 노력해 보라고 할 수도 있다. 근데 그게 안 되는 건 시간은 날 기다려주지 않고 난 언제나 남들보다 느리고 능력도 안되어 눈 마저 더딘 채로 걱정만 한가득인 사람이니, 잠자는 시간처럼 꾹 참고 넘겨야 하는 시간이 발생한다. 꼴에 필요 없는 눈치까지 보느라 쉬는 시간 침범도 미안해 죽겠는 사람이어서 혼자 끙끙이다. 


 그럴 땐 포기하는 편이 여러 모로 좋은 선택일 수 있다. 포기도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여서 나는 포기를 비난의 눈초리로 보지 않는다. 뭐, 끈기가 없다 하면 그것 역시 내 속성 중 하나라고 쉽게 인정할 수도 있다. 애초에 대단한 열정으로 사는 사람도 아니다, 난.


 여태껏 인생을 살면서 대체로 운 좋게 성과가 나왔던 내 이력들은 어쩌면 지금의 나를 너무 과대 포장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올해 난 생각했다. 내가 하는 말들마저 나의 모자람을 허세로 감추는 것 같았다. 이런 나는 사소한 것도 처리하지 못하는 쓸모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사람 같았다. 


 그래도 건강이 나의 무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마저 운이 안 따라 주는 것 같다. 매캐함은 그저 느낌일 뿐인데 이제는 편두통과 잇몸 통증, 미열과 불면증까지 따라온다. 시도 때도 없는 두통이 날 타이레놀에서 탁센까지 안내했고, 이제는 그렇게 잘 먹던 나의 식욕마저 데려갔다. 잘 된 일이다. 식단 할 때보다 더한 식사로 하루하루 지내고 있으니 그동안 안일하게 쪄놓은 살들이 매캐하게 태워지겠지. 


 요즘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내 시간을 챙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런 시대 흐름이 나에게는 잘 맞는 편이다. 나야 크게 단호하지 않은 성격이어서 자연스러운 게 좋지만, 선택할 수 있다면 나만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쪽이다. 타고난 게 생각은 많고 행동하길 꺼려하니까 안일한 타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정말로 난 편한 게 좋고 낯선 걸 무서워하니까. 어릴 때부터 그랬다. 실패를 두려워해서 시도하지 않는 쪽보다는 성공도 별로 원하지 않는 쪽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겁다.


 그런 내가 작년에 큰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 이 나이에 대단한 선택을 했다. 적어도 나 자산한테는 그렇다. 예전에도 해봤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준비된 정도도 다르고, 지금의 내 앞에 있던 선택지도 더 이상 좋을 게 없었다. 어쩌면 결정이 섣불렀을 수도 있다. 이 선택으로 올해 초엔 나름 성실했다고 느꼈다. 포기하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버텼고 시간은 지나갔다. 크게 운 일도 없고 옥상에서 땅을 내려다보지도 않았다. 


 시련은 내 재능이 탄로 나면서부터 시작됐다. 역시 난 안 되는 거였나, 이성을 잃고 보니 자신감도 사라지고 외모마저 보기 싫어졌다. 비관이 천성이었다고 해도 타격감 없던 난 오히려 장점이라며 웃어 보일 수 있었는데, 한 번 이렇게 내 박자를 놓치면 뭐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모 모르게 무너진다. 치킨을 먹어도 행복하지가 않다고 하면 쉬운 표현이겠다. 


 중독과는 몸에 전혀 맞는 게 없어 이런 나는 술로도 매캐한 마음이 떨궈지지 않는다. 친구들이랑 만나서 노는 거나 엄마한테 하소연하는 거, 심지어 운동을 해도 해소가 안된다. 차라리 울고 싶었다. 눈물이라도 나도 모르게 울컥 나와버리면 나중엔 창피해도 어쨌든 해소는 될 것 아닌가. 울음이 마치 나오려다 말아버린 재채기 마냥 코 언저리에 맴돈다. 누가 찔러주면 나올지도 몰라. 


 결국 해소 방법으로 글을 택하고 이 밤에 혼자 휴대폰 메모에 끄적이는 중인데, 아직도 이 시간이 고통 같다. 연인과 헤어진 직후 마음 같기도 하다. 아니면 범죄를 저지르고 몰래 숨어있는 듯한 느낌? 어차피 지금 내가 뭘 더 해봐야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고통의 시간 속에 나를 스스로 밀어 넣은 듯하다. 동생이 말했었다. 누가 그 선택하라고 떠밀었냐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아무리 쉬는 시간을 염원하는 나라지만 그 말이 달콤하게 들리지 않는 건 나도 내가 선택한 고통이라는 걸 잘 알아서겠지. 


 선택을 실수할 수도 있다. 아니면 해내는 과정 속에서도 실수할 수도 있다. 둘 다 일 수도 있다. 근데 지금 나는 그저 내가 행복을 느끼는 게 사치라고만 느껴진다. 노력해보지 않았으면 포기를 쉽게 얘기하지 말라는 건 사소한 행복까지도 누리지 못하게 할 정도로 무거운 돌이다. 노력을 해보는 선택지도 있는데 왜 그걸 선택하지 않냐 하면 대답은 다 변명일 거다. 그럴 거면 차라리 아프지라도 말지. 심각하게 아프지도 않아서 말도 못 꺼내는 육중한 몸덩어리는 왜 존재하는 건지. 아니면 실수를 관대하게 포용해 줄 수는 없는지.


 굳이 정말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찾자면 어린 나이부터 보통과는 다른 고생을 하면서 살아왔다는 것 하나뿐. 한때는 할 만큼 했다는 말이나 고생했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이제는 날 위한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었는데. 날 위한 선택이 이렇게 포기가 쉬운 연약한 정신력의 소유자로 만든 건지도 모르겠다. 


 글로 한바탕 내려놓고 나니 한결 나아졌다. 이제는 매캐~한 마음에서 쿰쿰한 정도의 마음으로 환기되었다. 그렇다고 잠이 오는 건 아니다. 잠을 자지 않는 시간에도, 잠을 자는 시간에도 나는 충분히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건 내가 무슨 선택을 하든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실패해도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글을 새로 쓰려고 적어놓은 글감 메모를 둘러보다가 지난달 밤을 꼴딱 새우며 쉽게 적어 내린 글을 올린다. 한 달 여가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때의 매운 연기 맛이 기억난다. 생각보다 빨리 회복한 지금의 내가 그날의 나를 보자면 왜 누구 하나 괜찮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는지 나조차도 나를 책임지지 못한 느낌이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두렵지 않아 아무것도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고 무기력할 뿐이다. 앞이 안 보인다. 난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즐거워지나.  그래도 나아는 가야 하는데.

 일기처럼 브런치를 이용하게 되네. 오랜만에 생각 정리를 할 시간이다. 마인드맵 좀 그려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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