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용 말버릇 탐구 - by 도푸지
롤라와 함께 주라기를 작업할 때면, 가끔 '나… 회사에서 일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롤라와 제 말투에 회사 커뮤니케이션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났기 때문이죠.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현장의 잔해라고 생각하니 조금 애잔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자동응답기처럼 붙어버린 말투와 말버릇 덕분에 회사 생활을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사랑한(아니, '사랑하게 된'이 더 적합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회사용 화법과 문체를 소개합니다.
이젠 자동응답기처럼 나오는 말버릇들
1. 넵! 확인했습니다 :)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궁금합니다. 저는 회사에서 '넵! 확인했습니다 :)'를 몇 번이나 썼을까요? 자매품인 '넵! 감사합니다'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를 포함하면 과장 조금 보태서 10만 번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회사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입니다. 지시나 요청사항을 확인했을 때 손가락은 이미 이 문장을 치고 있으니 말이죠. 문장 끝에는 항상 스마일 이모티콘을 붙여주는 건 또 어떻고요. 단순히 '넵', '확인했습니다'만 치기엔 무언가 딱딱하다고 느껴져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2. '아', '흠…', '앗!' 3형제
회사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아', '흠...', '앗!' 3형제를 빼놓으면 섭섭합니다. 이 말버릇 3형제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쓰니까요. 보통 나의 잘못을 시인하거나, 상대방의 말을 부정/거절을 할 때 많이 3형제를 활용합니다. 어떻게 활용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 '앗!'의 경우 내 잘못을 시인할 때 혹은 상대방의 말을 정정할 때 많이 활용합니다. 이를테면 '아... 네네 이건 저희가 착각했네요' , '아, ~~ 의미보다는 ~~ 의미였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앗!/엇!’도 마찬가지입니다. '앗! 착각했습니다' '앗! 이미 진행하셨을까요?'가 그 예입니다. 감탄사에서 약간의 다급함과 제 실수, 혹은 상대방의 실수가 느껴지지 않나요? 제 잘못을 시인하거나 상대방의 말을 부정하기 전에 '아', '앗!'과 같은 감탄사를 활용함으로써 조금 더 부드럽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범퍼 역할이랄까요? '흠...'의 경우 비슷하긴 하지만 좀 더 고민의 여지가 있을 때 활용하는데요. 어려운 일을 맞닥뜨렸을 때, 좀 더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을 함께 찾는다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힘이 되니까요 :)
3. 잠깐 통화 가능하실까요?
저희 회사의 기본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메신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전화를 걸면 상대방이 놀랄 수도 있고, 미팅 중일 경우 당황할 수 있습니다. 이에 상대방이 통화가 가능한지 여부를 한 번 확인한 후 전화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제가 보통 전화를 걸 때는, 1) 주로 설명이 복잡한 내용을 전달할 때와 2) 상대방에게 아쉬운(?) 이야기를 전달해야 할 때입니다. 때로는 글보단 말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인데요. 말로 할 때 글보다 쉽게 풀어서 설명이 가능하기도 하고, 아쉬운 이야기를 해야 할 때면 미안함과 진심을 목소리 톤에도 담아내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효율성과 속도가 중시되는 직장생활에서 때로는 진심 어린 커뮤니케이션이 꼭 필요한데요. 이럴 때 좋은 수단이 바로 목소리를 통한 대화입니다. 그리고 '잠깐 통화 가능하실까요?'는 그 물꼬를 터주는 좋은 문구죠.
번외. 가장 많이 쓰는 이모지들
문득, 제가 회사에서 자주 쓰는 이모지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제가 많이 사용하는 이모지에는 1) 웃으면서 우는 이모지(혹은 울음 이모지), 2) '넵'과 '충성' 이모지, 3) 체크표시와 핀 4) 따봉, 힘, 불, 최고! 등 상대를 격려하는 이모지가 많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완곡한 거절 혹은 어쩔 수 없음을 표현할 일이 있을 때 저는 습관적으로 문장의 말미에 웃으면서 우는 이모지를 많이 붙여 쓰고 있었습니다. 녹아내리는듯한 이모지도 덤이고요. 또한 확인했다는 걸 전달하고 싶을 땐 '넵', 그리고 친한 사이에는 '충성' 이모지를 많이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모지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면 단순히 글로는 전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선들을 표현할 수 있답니다. '따봉, 힘, 불, 최고!' 등 격려하는 이모지들도 상대방에게 글로 전하기는 애매한, 그렇지만 상대방을 향한 응원과 격려의 감정들을 전하고 싶을 때 애용하곤 합니다.
세 번째로 많이 활용하는 이모지는 '체크', '핀' 이모지입니다. 보통 공지문을 작성하거나, 한 번에 확인받을 게 많을 때, 혹은 가독성을 높여야 할 때 이 이모지를 사용하곤 합니다. 회사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서 가독성이 중요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모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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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을 높이는 커뮤니케이션
글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이 많은 경우, 가독성만큼 중요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번에 전달해야 할 정보가 많은 경우 가독성을 높이긴 쉽지 않죠. 그럴 때 가독성을 높여줄 수 있는 장치들이 몇 가지 있는데요. 첫 번째로 저는 '넘버링'을 많이 활용합니다. 보통 저는 직무 특성상 평가자/하이어링 매니저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기회가 많습니다. 평가자 혹은 하이어링 매니저들은 제게 채용 절차상 문제가 없는지, 면접 진행 방식 등을 문의합니다. 그럼 저는 문의사항에 대한 해결 방법을 쭉 안내드리죠. 이때 단순히 줄글로 늘여 쓰기보다는 전 넘버링을 많이 활용합니다. 예시를 함께 볼까요?
ex) 네 가능합니다. 그런 경우 아래와 같이 진행할 수 있습니다.
1. ~~를 한다 / 2. ~~를 한다
또한 상대방에게 한 번에 확인받고 싶은 정보가 많은 경우 넘버링이 아주 유용한데요. 특히 면접을 어레인지 해야 하는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의 면접을 조율할 때 면접 일정, 소요 시간, 대면/화상여부 등 확인받을 게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도 넘버링이 정말 좋은 커뮤니케이션 툴입니다.
ex) 아래 정보 공유해 주시면 면접 어레인지 하겠습니다 :)
1) 면접 가능 일정 (최대한 많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면접 소요 시간 3) 대면/화상면접 여부
만약 넘버링을 활용하지 않았더라면 두 문장이 대여섯 문장으로 늘어났을 것이고, 상대방도 어떤 것에 주목해야 하는지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워집니다. 커뮤니케이션 리소스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죠. 이럴 때 숫자를 활용한다면 확인해야 할 정보가 직관적으로 명시돼 가독성도 높아지고, 리소스도 줄어들게 된답니다.
상대방의 부담을 덜어주는 커뮤니케이션
두 번째로 저는 상대방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을 많이 합니다. 예를 들어 팀장님(리드)께 결재를 요청할 때, "00 기안 올렸습니다. 결재 부탁드립니다"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00 기안 올려두었습니다. 편하실 때 확인 후 결재를 부탁드립니다!"라고 하며 상대방에게 촉박함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지요. 또 기안만 대뜸 올리기보다는 기안 전 해당 기안문이 어떤 내용인지 가볍게 노티를 드리곤 합니다. 사전에 구두 혹은 메신저로 미리 해당 건에 대해 설명 드려놓으면 더 스무스한 결재가 가능하기 때문이죠 (후후). 단순히 빠른 결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업무 공유 차원에서도 좋은 방법입니다. 구두 혹은 메신저로 기안 건에 대한 공유가 되어야 팀장님도 맥락을 이해하고 결재를 해주실 수 있으니 말입니다. 갑자기 올리는 결재 혹은 공유 없는 결재는 최대한 지양하려 합니다.
또한 저는 어떤 것을 요청할 때도 ‘요청드립니다’라는 워딩보다는 ‘부탁드립니다’ 혹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로 완곡하게 표현하곤 합니다. 신입의 특성일 수도 있겠지만, 제가 커뮤니케이션하는 보통의 하이어링 매니저들은 리드급이거나, 최소한 저보단 경력도 연차도 높은 분들이 많습니다. 이때 ‘요청’이라는 워딩이 살짝 시키는 듯한(?) 느낌을 줄 때가 있어서, '부탁' 혹은 '~해주시면 감사하겠다'라는 표현을 활용해 일에 대한 권한이 상대방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시키는 듯한 부담은 줄이면서, 명확하게 요청할 수 있는 마법의 워딩이라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정리해 보니 회사에서의 말 한마디 마디, 글 한 줄 한 줄 의도되지 않은 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상대방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등... 그리고 그것이 익숙해지다 보니 말버릇처럼 굳어진 것이겠지요. 다만 너무나 많이 사용하다 보니 그 의도는 잊은 채 표현들만 기계처럼 활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데요. 효율성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진심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제가 사용하는 대다수의 표현들은 결국 상대에 대한 배려에서 기인했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Editor_도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