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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아이콘이 된 장어구이

by 동그라미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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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아이콘이 된 장어구이



아버지 생신이어서 어머니와 아내와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점심 메뉴는 가족 모두 힘내라고 장어구이를 선택했다.



장어는 아내와 나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아내가 3년 전에 재발한 암 수술을 하고 항암을 시작한 초기에 체력 보충을 위해 가끔 장어구이를 먹었다.

아내가 고기류는 원래도 좋아하지 않았기에 스태미나와 보양식으로 장어구이를 먹을 때 단순히 별식을 먹는 차원이 아니라, 마음이 비장했었다.

항암을 하면서 체력이 되고, 면역 수치를 나타내는 호중구 수치가 떨어지지 않아야 항암을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체력관리는 항암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

다행히 항암 초반에 장어구이를 먹으려고 할 때 집에서 멀지 않은 장어집에서 마침 개업 4주년 기념으로 특별 할인 행사 중이어서 부담도 적어서 행사가 끝날 때까지 서너 번은 와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75세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가 3년 전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셨다.

당시에 우리 가족도 해외에 있었고 여동생 둘도 미국에 있어서 한국에 아무도 곁에 자녀가 없었다.

아무래도 동생 있는 곳으로 가시면 좋겠다고 해서 동생이 부모님을 미국으로 초청했었는데 2년 만에 영주권이 나오자 동생이 있는 미국으로 가셨었다.

아버지는 14살 때인 1950년 겨울 흥남철수작전 때 마지막 배인 메르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거제도로 오시면서 실향민이 되셨다.

메르디스 빅토리호는 영화 〈국제시장〉에 첫 장면에 주인공이 타고 나왔던 바로 그 배다.

14살 때 고향을 떠나셨던 아버지는 60년을 사셨던 고향을 다시 한번 떠나 미국으로 가셨다가 10년 만에 돌아오셨다.



그런데 이제 한국으로 돌아와 익숙한 곳에서 여생을 사시려던 아버지는 한국에 오신 지 2주 만에 동네 은행을 가신다고 가셨다가 후진하던 승합차에 치여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그 사고로 두 달 정도 입원을 하셨고, 이후에 등급을 받아 매일 요양사가 와서 걷기 연습을 꾸준히 하셔서 많이 회복은 되셨지만 이제는 걸음이 예전 같지 않으시다.

그리고 작년에는 폐렴으로도 2주 정도 입원도 하셔서 지금도 한국에 오신 이후로 계속 회복 중이신 상태이다.


젊어서 아버지는 내 눈에는 철인과 같은 분이셨다.

회사에서 밤늦게 만취해서 오신 다음 날에도 새벽이면 여전히 조깅을 하시고 다시 치열한 전쟁터 같은 일터로 향하셨다.

그러시다가 지금의 내 나이쯤 뇌출혈로 쓰려지셔서 처음에는 거의 몸의 절반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철인과 같은 의지력으로 3년 뒤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회복이 되셨었다.



그런 아버지도 이제 80대 후반이 되시면서 몸은 예전 같지 않으신 것이 느껴져 마음이 짠하다.

젊어서는 무슨 일이든 남들보다 앞서 성과를 이루시던 분이지만 이제는 가족 단톡방에 생신 축하 인사를 드렸더니 ‘Thank you my son’이라고 답하시며 흐뭇해하시는 분이 되셨다.

젊어서 아버지의 인상은 강해 보였지만 이제 아버지는 인상이 KFC 할아버지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으신다.



점심을 함께 하면서 ‘내년에도 가족이 함께 건강하게 오늘 같이 식사를 하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래서 나에게 장어는 아내가 다시 암을 이기고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희망이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내년에도 건강하게 생신에 식사를 하기를 바라는 희망의 아이콘이 되었다.

나는 오늘 장어를 먹었고, 또 감사와 희망으로 내 마음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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