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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노아 May 07. 2024

나는 헛것과 대화를 했다.

나에게 주는 메세지

칠흑 같은 밤이었다. 2m 앞도 분간이 안될 정도로 어두웠다. 야간이동이었기에 무전소리를 없애고 앞팀이 이동할 때 그 움직임을 따라 함께 쫓아가야 했으며, 우리 팀의 선두에 선 내가 졸거나 뒤쳐지게 되면 우리 팀이 전체의 대열에서 이탈하게 되는, 조금의 간격과 틈, 그리고 여유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염없이 목표지점으로만 나아가는 중 잠시의 휴식시간, 누르는 눈꺼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길옆에 쪼그려 앉은 채 깜빡 졸았다. 그 정말 짧은 시간에 졸고 있는 나에게 깜짝 놀라 화들짝 깰 정도로 잠시의 졸음도 용서, 허용되지 않는 긴박한 순간, 긴장을 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이 훈련은 전방 철책을 담당하는 사단에서 군의 氣와 긴장도를 유지하고, 유사시 극한 상황에서도 작전을 정확히 수행하기 위해 정신과 육체를 단련하는 훈련, 이름하여, 천리행군이었다. 천리의 거리는 약 400km, 이 거리를 9일간 완수해야 하는 훈련이었다. 하루에 약 40km 이상을 20kg의 군장을 메고 걸어야 한다. 겨울에는 추위를, 여름에는 더위를 뚫어야 하는 극한의 상황까지 경험케 하는 훈련이었다. 수치적으로는 400을 40으로 나눠  조금 서두르면 9일이면 충분할 듯 하지만 만만치 않았다. 그것도 산과 들을 가로질러 도달하기 위해선 절대시간이 부족한 상태. 잠자는 시간밖에는 줄일 게 없었기에 걸으면서 졸거나 서서 자는 초인적인 인간의 능력까지 생기게 되는, 강도 높은 훈련이었던 것이다.  




놀라서 깬 뒤 본능적으로 확인한 것이 내 앞 소대의 팀이 그대로 쉬고 있느냐였다. 다행히도 내 앞 팀은 그대로 쪼그려 앉아 있었다. 나는 앞 소대의 후방을 책임지는 부 지휘자와 속삭이듯 대화를 나누었다. 


“ 김종서 하사, 왜 아직 출발을 안 하지? 언제 출발하라는 연락은 받았어? ”


“ 아닙니다. 저희도 앞 소대가 움직이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참에 좀 쉬십시오 “


짧은 속삭임 뒤에 나는 눈으로 앞 소대 멤버들이 길 가에 쪼그리고 앉아 쉬고 있음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내 뒤로 나의 소대 멤버들이 쪼그리고 앉아 졸고 있는 모습도 확인했다. 우리 소대는 나의 이동 사인을 듣고 움직여야 하기에 내가 명령하지 않는다면, 지친 상태이기에 그대로 쪼그린 채 자거나 조는 상황이었다. 현 상황에서 지휘부의 이동하라는 명령도 없고, 앞 소대 팀도 그대로 있으니 내 소대원들이 좀 더 졸도록 내버려 두겠다고 결정하고 나도 잠시 눈을 다시 감았다.


채 3분이 안된 듯한데, 소대의 무전병이 아주 겁먹은 표정으로 나를 깨우고 사태가 많이 심각하다고 얘기를 했다. 


“ 소대장님, 저희가 10여분 뒤처져 있다고 하며,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냐고 난리입니다.”


“ 야, 이게 무슨 소리야? 나도 이동을 기다리고 있었고 앞 팀이 그대로 있는데 무슨 얘기들을 하는 거야? 좀 전에 앞 소대의 김종서 하사와 얘기도 했는데... “


좀 전까지 앞 소대의 부 지휘관과 얘기도 했고 앞 소대 멤버들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봤는데, 모든 사단 병력들이 이미 이동을 하고 있다는 것과 우리가 시야에서 없다는 얘기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앞 소대가 앉아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2m 앞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좀 전까지 대화했던 김종서 하사도, 쪼그리고 앉아 있던 소대원들도 없었다. 이미 텅 빈자리였다.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인가? 나는 누구와 대화를 한 것이고, 누구의 모습들을 본 것인가? 잠결이었다 하더라도 상황이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순간이었다. 


앞 소대는 10분 전에 이미 떠난 상태였고 나로 인해 우리 소대는 뒤에 처져서 이탈하게 된 것이었다. 온 부대가 난리가 났다. 깜깜한 칠흑 같은 밤에 1 개 소대 병력 전체가 사라져 버렸으니... 10분여 차이는 천리 행군 훈련 속도에서는 꽤 먼 거리의 차이가 있었고 목적지로 향하는 우리의 발길이 부대 전체가 가는 방향과는 다른 곳이 될 수도 있었다. 훈련 중,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작전 실패, 작전 중 병력 이탈 이슈는 책임을 물어야 하는 중차대한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책임져야 하는 리스크보다는 도대체 나는 누구와 얘기했고 누구를 봤는지에 대한 답이 더 중요했다. 정황상, 나는 헛것을 본 것이고 헛것과 대화를 한 것이었다. 분명 선명한 모습이었는데 그것들이 헛것이었다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10여분의 시간 동안 나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헛것을 본 것인가? 아니면 수면 상태에서 본 것인가? 아직 그럴듯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내 인생에서 헛것을 보았고 헛것과 대화까지 했다. 너무 생생한 체험이었다. 단지 꿈으로 치부하기엔 그 생생함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내게는 꿈이라기보다 '사실', '현실'에 가까운 경험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내가 나도 모르게 '헛것'이라 명명한 것 자체가 사실이 아님을 증명해내는 것 같지만 내게 그 환영은 분명 사실과 다름없었다. 마치 이런 것이다. 인터스텔라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이 분리되어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움직이는 것같은. 내가 경험했던 그 시간은 이쪽도 저쪽도 다 사실이었다. 단지 따로 분리된 시간에서 나만 이쪽과 저쪽에 동시에 존재했던, 그런 경험.


여하튼 이 날의 경험은 헛것인지 사실인지 분간되지 않은 채, 어쩌면 여기 있는 나는 헛것이라 말하지만, 저기 있는 나는 지금 나의 이 곳을 헛것이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한동안,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은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그 날 이후 궁금증은 커져갔고 실제 나는 다시 한번 더 경험하기 위해 동일 훈련을 할 때는 몸을 더 힘들게 더 지친상태로 몰고 갔지만 지금까지 다시 경험할 수 없었다. 이 경험은 내가 원한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라 지금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시공간에서 내게로 주어지는 경험이라 일단락지었다. 


지금 여기의 내가 혹여 정신과 마음이 허약해져, 이성에 빈틈이 벌어져, 생각없이 어떤 욕구에 몰입되어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틈을 비집고 두공간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여 현실에 혼란을 야기하고 이성과는 반대편에 선 허약한 자아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도 같다. . 


분명한 것은 이 경험이  '그냥 헛것을 봤네'로 단순히 치부해버리지 않아야겠다는 나의 의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내게 던져준 메세지는 아주 분명했다. 정신줄을 놓을 때, 마음이 허약해질 때 나를 바로 잡지 않으면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현상이 나를 커다란 혼란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환영이 묵언수행, 면벽수행, 참선과 같은 깊이 성찰하는 깨달음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듯하다. 간혹 신을 만났다거나 죽음 뒤의 세상을 다녀왔다는 영성학자, 심령학자들의 얘기가 정말 진실일까하는 호기심마저 일고 있으니 더 큰 성찰, 더 큰 깨달음을 얻어 세상의 혼탁함, 어리석음과 거리를 두고 자신이 나아갈 방향으로 나아가라는 신호같기도 하다.  

 

그리고 나의 보잘것 없는 경험이 18세기 천재학자인 스웨덴보그(주 1)가 다녀왔다는 영계의 세계, 소설가 이외수(주 2)가 경험했다는 선계의 세계를 아주 짧고 약하지만 경험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내가 그들처럼 무언가에 깊이 파고들고 나의 인생을 더 올곧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어떤 영성적인 힘이 있다면 바로 그 힘의 원천이 영계라, 선계라 불리는 그 곳으로부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인간의 영혼이 분명 육신을 떠나 온 우주를 떠돌며 신호를 보낸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수많은 철학자, 과학자들의 논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하여 어떤 현상도 나 스스로 헛것이라, 무용한 것이라 외면하지 않고 그것이 좋은 환상이면 지혜와 용기를, 나쁜 환상이면 소동과 혼란을 얻게 될 것이라 여긴다. 일상에서 흔히 겪을 수 없는 어떤 사실과 맞딱뜨릴 때 우리는 판단하지 말고 해석해야 한다. 보이는 모든 것이 실재가 아니라는 카를로로벨리(주 3)의 말이 사실인 것이다. 



(주 1) 스웨덴보그(스웨덴보리, Swedenborg Emanuel, 1688-1772) : 에마누엘 스웨덴보그(1688-1772)는 신학자이자 의학자, 과학자. 그는 신비사상가로 더ㅓ 유명하며 우리나라에는 '나는 영계를 보았다'로 잘 알려져있다.

(주 2) 이외수(1946~2022) : 소설가, 그의 책 '먼지에서 우주까지'에는 그가 직접 체험한 선계가 묘사되어 있다. 

(주 3) 카를로로벨리(Carlo Rovelli) : 이탈리아 물리학자이자 작가,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의 저서를 통해 우리의 직관을 너머선 존재론적 물리학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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