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생이 공대 대학원에서 살아남기
스물 여덟살, 적지 않은 나이로 대학원에 입학해서, 나의 첫번째 학기가 끝났다. 첫번째 성적을 받아본 터라, 대학원 성적의 분포에 대해서 감도 잡히지 않았었다. 그래서 성적이 발표나기 전날 밤에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나 아무래도 낙제점을 받을거 같다면서 하루 종일 칭얼칭얼 거렸었다. 그러고 나서 실제 걱정했던 성적보다는 좋게 나와서 한숨을 돌리고 나니 나의 여름방학은 시작되었다.
대학교 학부생 시절에는 여름방학이라고 하면, 그래도 “방학”이라는 문구가 더 크게 보였었다. 하지만 대학원생에게 여름방학에는 방학이라는 글자가 더 의미있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수업과 시험이 없는 이 여름방학에 더 강력하고 뚜렷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 학생들도 노력하고, 교수님도 그러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 역시도 항상 계획을 열심히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라, 이번 여름방학을 시작하면서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 내가 제출하고 싶은 연구 분야에서 높게 평가되고 있는 저널에 제출을 하는 것이었다.
첫 학기에 그만큼의 성과를 낼 수 있겠냐고? 나는 평소에도 목표는 높게 잡아야 그 중간이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성격이라, 이러한 목표를 설정했다. 그리고 교수님도 내가 완전 대학원 생활을 모르는게 아니라, 회사에서 어느정도 연구라는 것의 매커니즘을 겪어봤던 사람이라고 생각해, 다른 신입생보다는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과도한 목표감이 나에게 너무 과도하게 작용한 것일까? 하반기. 7월이 시작하면서 부터 알수없는 무력감이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연구의 성과는 내가 생각한 것 만큼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데, 시간은 자꾸 나의 손아귀 밖으로 벗어나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도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것과 같은 비교를 스스로 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연구실의 가장 고참인 선배님이 내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항상 좋은 이야기도 해주시고, 좋은 아이디어도 주시는데, 내 연구 분야가 워낙 변동성이 높고, 빠르게 변화하는 지라, 그 선배가 나에게, 이 연구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고 격려를 해주는 말을 하고 가셨다. 하지만 뭐의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나에게 격려의 뜻으로 해준 말이, 나에게는 왜 빨리 성과가 나지 않냐는 독촉의 말로 들려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쿡 답답해 졌다.
이렇게 마음이 너무 답답해지는 나를 보면서, 어쩌면 나, 매너리즘, 번아웃일지도? 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학교 4년 휴학 없이 4년을 내내 달렸고, 방학이라고 해서 놀고 추억을 쌓기 보다는 취업을 위해서 자격증과 대외활동, 학생회 활동에 매진했다. 회사 생활 4년, 이직을 하는 동안에도 휴식기 없이 환승 이직을 위해서 끊임 없이 노력했고, 야근도 나의 일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이제서야 28살에 번아웃이 온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번아웃, 매너리즘에 대한 유튜브 영상을 무작정 찾아보기 시작했다. 왜 번아웃이라는 것이 오게 되는지 , 번아웃이 오게 되었다면,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등 나에게 너무 맞는 말인 것과 같은 이야기 들이, 무슨 무당이 내 모습을 보고 영상을 만든 것 마냥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그 영상의 댓글을 보게 되었는데, 댓글의 종류는 2가지로 나뉘게 되었다. 본인들의 매너리즘 번아웃에 대한 경험담과, 본인들도 너무 힘든 시기를 겪었었는데, 잘 극복했다는 좋은 후기들이 있었고, 두번쨰로는 번아웃이 오는 것은 사치라는 둥, 아직 덜바빠서 그런것이라는 둥 꼰대와 같은 말이 있었다. 근데 한편으로는 내 머리속의 천사와 악마 두명이 그 댓글에서 투영되어 보였었다. 이 시기가 올 수도 있어. 잘 극복하면 더 좋은 세상이 보일거야 라고 나를 독려해주는 것과 같은 천사편과, 내가 지금 몸이 편하고 시간이 많으니 이런 고민도 하는 구나 하는 악마의 목소리 말이다.
정말 나는 덜 바쁘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 빠지게 된걸까?
하루 이틀이면 사라질 줄 알았던 이런 감정들은 여름 휴가를 지나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나를 잡아삼키고 있었다. 여름 휴가를 다녀오고 나면 극복 될 줄 알았는데, 이게 왠걸? 여름 휴가를 다녀오니 더 일을 하기 싫더라 이말이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운 주말을 보내보기로 마음 먹었다.
일단 첫번째로 혼자 영화관에 갔다. 내가 내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 좋아하면서 수집까지 하는 진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봤을 때 단연 바로 떠오르는 것은 캐릭터 “미니언즈”였다. 남들은 촌스럽다고 유치하다고 생각해도 좋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내가 화가 나거나 억울한 일이 생겨서 도저히 분이 안풀리고 눈물까지 나는 날이 왔을때는, 무조건 미니언즈 영화를 하루 종일 봤다. 그 땅콩만한 캐릭터들이 장난 스럽게 사고를 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고민하고 있던 것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오래된 나의 고민 해결 동반자였다. 이번 나의 고민이 생긴지 마침 알아준 것인지, 새로운 영화가 개봉해서, 영화관에 와서 힐링을 하러 왔다. 주말에 나 혼자 이 영화를 보려니 너무 설랬다. 아침에 눈을 뜨기 싫고 아무 것도 하기 싫었던 주말이 아니라, 이 영화를 보러 가는 길이 정말 신나고 발걸음이 가벼웠다.
스크린 가득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들이 나오다 보니, 나도 모르게 발을 까딱까딱 움직이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옆에 아무도 없으니, 양반다리를 하고 보든, 혼자 놀라거나 좋아해도 아무도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너무 좋았다. 이렇게 하나 나를 위해 사랑하는 일을 해줬다.
그리고 이 날 하루종일 움직이면서 들었던 오디오 북이 있었다. 진정한 다이어트, 체중 감량을 위해서는 먹지 말아야 하는 금지 식품을 먹지 말고, 굶주리는 다이어트가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먹고 , 그것의 맛과 식감에 온전히 집중하면서 먹는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요즘 내가 기분도 좋지 않고, 흐트러져서 식습관이 안좋아 진것 같아, 이 오디오 북을 듣기 시작했는데, 점차 나를 진짜 어떻게 하면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인지, 이 먹는 것 부터 고쳐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샌드위치 가게에 가서 샌드위치 하나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이 밥을 먹는데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오디오북에서 제안하는대로, 음식에 온전하게 집중하기 위해서 영상을 보거나 사람들과 떠들면서 내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지 뭐가 들어가는지도 몰랐던 시절을 뒤로 하고,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는채로 음식의 미각에만 집중을 했다. 아. 이 샌드위치에서 이런 맛이 났었구나, 이런 식감이 났었구나 새삼 나도 모르는 풍부한 맛이 났다. 그 오디오 북에서 가장 내 마음과도 같았던 문장이 있는데, 음식을 먹기도 전에는 오늘 저녁에는 뭐를 먹을 것인지, 얼마나 먹을 것인지 하루 종일 생각하면서, 막상 먹는 순간이 오면 게눈 감추는 위에 버리듯이 먹는다는 말이 있었다. 그게 마치 내 모습과도 같았다. 그 책에서 권장하는대로 먹어보니, 샌드위치를 다먹고도 평소에는 아, 부족하지만 참아야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다 먹지도 못하고 마지막에는 남길수 밖에 없었다.
단순히 다이어트 ,체중감량의 문제가 아니라, 나를 점심시간만이라도 더 사랑할수 있게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카페에서 브런치 글을 오랜만에 다시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취미라고 시작했던 브런치스토리였는데, 대학원 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 1주에 한번, 2주에 한번 점점 주기가 길어지고 있던 중이었다. 좋아하던 것도 의무가 되고, 미루기 시작하니 정말 끝이 없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 미루는 느낌을 더이상 미루지 않고 마주하기로 했다. 글을 쓰러 카페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하기 싫어서 고민을 했다. 하지만 완벽주의보다는 완료주의라고 하지 않았던가. 카페에 들어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 시키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글을 쓰다보니, 내 힘들었던 마음이 정리되고, 나를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오랜만에 서점에 책을 사러 갔다.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읽던 책이 있는데 “꿈꾸는 다락방”이라는 책이었다. 어떤 꿈을 꾸든지 생생하게 상상하면 이뤄지는다는 핵심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수능을 보기 전까지도 내가 가고싶은 대학에 합격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그리고 지금 이 대학원에 오기 전까지도 이 대학원에 오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나의 루틴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 대학원까지 오는 목표를 이루고 나니, 다음 나의 목표감이 상실한 기분이었다. 더이상 생생하게 꿈굴 대상이 사라진 것이다. 이게 나의 요즘 번아웃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감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의미 없는 것과도 같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오랜만에 다시 사서 읽어보기로 했다. 대학원에 합격한다는 것이 나의 진짜 인생 목표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원 생활을 어떻게 해나갈 것일까? 졸업하고 나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명사형의 꿈이 아니라, 동사형의 꿈을 다시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엑셀에 그동안 사용했던 돈을 정리해보면 아마 다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한국에서도 돈을 이만큼 쓰면, 한국에서도 아마 행복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하루 돈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아보려고 한다. 평소면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을 책도, 서점에 가서 구매하고, 쿠팡에서 얼마인지 비교해보면서 샀을 립스틱도, 그냥 올리브영 매장에서 1000원 더 비싸더라도 그 자리에서 구매했다. 먹고 싶었던 똠양꿍 누들도 , 갤러리아에서 15000원이라고 ? 안먹고 말지, 했었을 법한 것도, 나는 지금 태국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사먹을 것이다.
나처럼 항상 성취에 목말라 하고, 현재 내가 가진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미래에 행복해야지 하는 것이 필요 없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 돈을 모아서 더 좋은 차 좋은 집을 사야지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처럼 힘든 순간이 온다면, 지금 맛있는 점심 먹어야지, 저 이쁜 옷 사야지 하는 현재의 행복에도 만족을 느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 번아웃이 오늘 하루의 노력만으로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이 감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겨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