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뒤도 돌아보지말고 퇴사하자
길고 긴 고민의 시간을 보낸 이후에, 퇴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단순한 퇴사가 아니라, 아예 항해사라는 일을 안하겠다는 다짐이었기 때문에 퇴사라기보다는 이별에 가까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회사에 퇴사의 의사를 밝히고 나니 마음이 한결 후련했다. 하지만 퇴사의 프로세스는 내가 생각한 것 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퇴사를 하겠다고 하니, 인사팀에 불려갔다. 인사팀에 불려가서 퇴사하고자 하는 내 의사를 몇번이고 설득시키고자 하루 종일 일장 연설을 들어야 했다. 고민을 하고 있는 시점에 나에게 그런 말들을 해줬었더라면 다시 생각해 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가득한 사람에게 그런 말들을 해대니 한귀로 들어와서 반대쪽 귀로 빠져나가기만 했다.
그때 나에게 했던 말들을 자세히 적기는 어렵겠지만 (이 글을 본 그들이 상처를 받거나, 자존심 상해할 수도 있으니), 별로 기분 좋은 말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때 그 말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더욱 오기가 생기도록 해서, 지금의 내 모습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딱 기억에 남는 문장 한마디를 적어보자면,
내가 너같은 애들 수없이도 봤다. 근데 다 망했어.
바로 이 말이었다.
도망치듯이 항해사를 그만두고 회사를 나가서 성공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근데 나는 전혀 동의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일단 그 사람이 나한테 한 말은 맞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첫 번째로, 나는 도망치듯이 그만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이 일이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확신에 가득차서 그만 두는 것이었고,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어서 그만 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번째로 성공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은 모순이다. 어떻게 한명도 없을 수가 있는가? 내가 하는 항해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서 성공한 사람만해도 열 손가락에 다 담을 수 없을만큼 많았다. 그 사람 역시도 그 우물안의 개구리 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나오면서 한번 더 뒤돌아 봤다.
"미련도 없다! 다시는 항해사로 안돌아온다"
내가 이렇게 다짐했던 이유가 있다. 왜냐면 내가 항해사로 일하던 시절에 소문으로, 그리고 실제로 나에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육지로 아무런 목적성도 없이 그만둔 사람들이, 주식을 해서 망하거나, 아니면 사업을, 또는 다른 일을 하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 당부의 말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 이곳은 나에게 마지노선 같은 곳이라고 선을 그었다. 나에게 물론 많은 가르침을 준 직업이지만, 나에게는 마지노선인 직업으로 그렇게 정하기로 했다.
사실 나는 아무런 플랜 B도 없이 사는 성격이 못된다. 그래서 이직을 성공하지도 않은채로 사직서를 낼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사실 이직을 성공한 상태에서 사직서를 제출했었다. 내가 어느 회사로 이직했냐고 ?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겠다.
우선,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기분이 좋은지, 반대로 어떤 일을 할 때 성취감이 낮은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평소에 나는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큰 언니랑 많이 상담을 하곤 하는데, 이번에도 언니에게 나의 고민을 털어 놓았었다. 언니는 나에게 [베스트 셀프]라는 책을 추천해줬었다.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게 우선이라는 의도에서 이 책을 추천해줬었던거 같다.
그래서 나는 바로 베스트 셀프 책을 구매하고는, 그날로 이 책에 나오는 모든 행동 요령을 따라하기로 했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수많은 형용사, 동사들이 나열되어 있고,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들에게 동그라미를 치거나, 나에게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본다든지. 나에 대해서 돌아보도록 만드는 행동을 해보도록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A4 한장을 꺼내서 이 책에서 시키는대로 모든지 따라했다. 이 책이 나의 진로 선택에 엄청 도움이 되었냐고 한다면, 글쎄? 결정적인 행위는 아니었지만,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긴 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책이 나에게 준 가르침을 종이 한장으로 모두 압축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흔히들 하는 4분면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A4 용지를 4등분으로 적어서, 4개의 분면을 만들고, 내가 좋아하는 일, 싫어하는 일에 대해서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고민없이 적어내려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한참 적고 보니,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생각보다 창의적인 일을 좋아하고, 또 생각보다 반복적인 일을 싫어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항해사라는 직업을, 바다라는 곳을, 선박이라는 공간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이 일과 관련있는 일을 계속해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구인 플랫폼에 무작정 들어가서, 우선은 바다와, 선박과 관련된 일을 검색했다. 다양한 회사들이 나왔다. 선박 운항에 대해서 관리 감독하는 직업, 선박에 공급되는 장비들을 수리하거나 설계하는 일들, 또는 조선소와 같이 선박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함께하는 일들. 수많은 직업들이 쏟아져 나왔다. 원래라면 이 일도 재밌어 보이고, 저 일도 재밌어보였을 나였는데, 4분면에 적은 단어들을 보면서 하나씩 필터링 하기 시작하다보니, 하나의 회사밖에 남지 않았었다.
그게 바로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