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의 이야기 - 유년기
나는 부산시 사하구 괴정동 550번지에서 태어났다. 남쪽으로 걸어서 20분쯤 가면 감천항이 있고, 버스를 타고 20분쯤 가면 다대포나 송도 바닷가가 있으며, 해운대까지는 1시간 정도 걸렸다. 동쪽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곳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었고 강 한가운데에는 을숙도라는 섬이 있었다. 철새들은 이곳을 아주 좋아해 계절이 바뀔 때면 다시 찾아오곤 했다.
집 바로 옆에는 괴정천이 있었다. 하천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알 수 없는 오물들이 섞여서 낙동강과 바다를 향해 흘러갔다. 우리는 세상 물정 모를 나이였지만, 여기서는 놀면 안 된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괴정천에는 송사리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었고, 학교 숙제 때문에 마지못해 솔이끼며 우산이끼를 채집하기 위해 내려간 것이 전부이다. 다른 동네 하천도 더럽고 악취가 심한 것은 모두 똑같아 우리들의 놀이터로는 낙제점이었다. 이후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괴정천을 덮어 도로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괴정천은 복개천이라 불렸는데 하천 정비는 하지 않고 무작정 포장한 탓에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악취가 심해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이다.
그리고 동네에는 꽤 유명한 빨래터가 있었는데 물이 흐르는 아래쪽에서는 빨랫감을 손으로 비비거나 방망이로 두드려서 빨았고, 위쪽에서는 빨래를 헹궜다. 우리는 빨래터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거나 아이스크림 막대를 엮어 나무배를 만들어 놀았다. 배 뒤에 노란 고무줄을 달고 떠먹는 아이스크림 막대를 끼워 최대한 고무줄을 꼬아서 나무배를 띄우면 모터보트처럼 빨리 갔다. 빨래터는 아주머니들의 수다 떠는소리와 우리들의 노는 소리로 항상 왁자지껄했다. 빨래터 위쪽에는 600년 된 회화나무가 있었는데 어른들은 그곳에서 놀면 혼을 내곤 했다. 일 년 내내 초가 꺼지지 않았고 기도드리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근처에 가면 스산한 느낌이 드는 것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천도 더러웠고 강도 더러웠다. 바다도 예외가 아니라 색깔은 탁했고 악취도 심했다. 우리는 놀기 위해 산으로 갔다. 우리 동네에는 승학산이 있었다. 산은 그래도 깨끗한 편에 속했다. 산의 2~3부 능선까지만 가면 큰 공터에 개울이 흐르고 있었고, 큰 연못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산에 나무가 많지 않아 사방이 탁 트인 것이 놀기는 좋았다. 잠자리를 잡아 꼬랑지를 자른 뒤 성냥개비를 끼워 다시 날려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잔인하기는 하지만 그때는 재미있었다. 개구리 알인 줄 알고 집에 가져와 대야에 담아 두었는데 나중에 엄청나게 많은 도롱뇽이 태어난 것을 보고 놀란 기억이 있다. 학교 숙제로 플라나리아를 잡아 오라고 해서 가져갔더니 거머리를 잡아 왔다고 선생님께 혼이 났다. 우리는 플라나리아를 잡기 위해 7부 능선까지 올라가야 했다. 산 중턱에 있는 연못에는 간이 좀 큰 친구들만 가서 놀았다. 나무와 스티로폼을 엮어서 만든 허술한 뗏목이 있었는데, 어른들은 연못에 2~3명이 빠져 죽어서 귀신이 산다며 뗏목을 타지 못하게 했다. 나는 쫄보여서 뗏목 근처에 가지도 않았다.
나는 1974년에 태어났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가장 오래된 과거는 7살 무렵이다. 그 이전 기억은 내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머리가 나쁘거나 특별히 기억할 만한 가치가 없어서일 것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위로 누나가 셋 있었다. 모두 두 살 터울이다. 그때는 국가에서 애를 많이 낳으면 나라가 못 산다면서 둘만 낳아서 잘 기르자고 할 때였다. 그런데 내 또래들 보면 대부분 형제자매가 둘 이상이었다. 우리 집도 둘만 낳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이 태어나지 않아 태어날 때까지 낳다 보니 넷이 된 것이다. 이는 어머니의 강력한 의지가 뒷 받침 되었다. 나로서는 어머니께 감사할 따름이다. 막내 누나와는 다툴 일이 있으면 이 일을 걸로 넘어지곤 했다. 누나는 자신이 남자로 태어났으면 나는 세상 구경도 하지 못했을 것이니 고마워하라고 했고, 나는 내가 먼저 태어났으면 누나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니까 나한테 잘하라고 했다. 태어나는데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 사람끼리 유치한 싸움을 한 셈이다.
애를 많이 낳으면 나라만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도 가난한 것은 매 한 가지였다. 부모님은 일 년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셔도 적금 하나 들기 힘들었다. 나는 우리 집의 희망처럼 암묵적인 합의가 되었고, 이로 인해 누나들은 실력이나 욕심만큼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
1981년에 사하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이 학교는 1908년에 개교한 학교였는데, 한 학년이 20반 가까이 되는 꽤 큰 학교였다. 이렇게 큰 학교도 베이비붐 세대를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66년에 낙동교로 10 학급 분리를 했고, 1970년에는 괴정교로 29 학급을 분리했다. 1981년에는 승학국민학교로 12 학급을, 1982년에는 옥천국민학교로 12 학급을 또 분리했다. 1982년에 누나 둘과 나는 사하국민학교보다 몇 발자국 가까운 옥천국민학교로 강제전학을 당했다. 2학년이 되어 옥천국민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는데, 새로 생긴 학교인데도 교실과 책걸상이 부족했다. 우리는 또 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들었다. 한 주는 오전반, 다른 한 주는 오후반으로 등교를 했다. 내 생활기록부에 유일하게 결석처리가 된 것이 있는데, 오전반인데 오후반인 줄 알고 잘못 등교했더니 다른 반 친구들이 앉아 있었다. 이것이 앞으로 내가 살아갈 치열한 경쟁의 서막이라는 것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놀 것이 너무 많았다. 놀고 놀아도 새로운 놀이가 끊임이 없었다.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놀 거리였다. 먹고 입을 것은 빠듯했지만 놀거리만큼은 차고 넘쳤다. 그 놀이는 어른들에게 물려받은 것도 있지만 우리 또래들의 공동 창작물이었다. 놀 것이 많은 이유에는 놀 공간이 많은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한해 한해 지날수록 놀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주 어릴 적 기억만 해도 내가 사는 동네에는 흙이 많았다. 하지만 성장할수록 황톳빛 흙은 줄어들고 거무칙칙한 콘크리트가 늘어 갔다. 어릴 적 멀리까지 볼 수 있었던 나의 시야는 해를 거듭할수록 좁아져 갔다. 처음에는 무슨 무슨 주택이라 이름 지어진 3층짜리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몇 년 뒤에는 5층짜리 아파트라는 건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몇 년 뒤 10층이 넘는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경비아저씨를 피해 처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 보았다. 무서웠지만 새로운 세상을 만난 기분이었다. 대신 하늘을 보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이제는 고개를 뒤로 젖혀야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건물이 들어설수록 우리의 놀이 공간도 줄어들었고, 놀이 문화도 달라졌다.
부산은 살기가 좋은 곳이었다. 바다가 있는 덕분에 여름은 시원했고, 겨울은 따뜻했다. 한겨울에도 얼음 구경하기가 힘들었고, 눈이 내리는 것을 본 기억도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그마저도 땅에 쌓인 눈은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기후도 많이 변해갔다. 날씨만 보았을 때는 부산은 분명 살기 좋은 동네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부산을 구석구석 자세히 보면 상처투성이 도시였다. 전쟁터에서 팔다리가 잘려나간 패잔병 같은 모습이었고, 어느 것 하나 성한 곳 없어 보였다. 그런 아픔을 부산에는 간직한 채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북에서 피난 온 사람, 도서 지역에서 먹고살기 힘들어 바다를 건너온 사람 등 저마다 고향을 버리고 온 사람들이 모여 힘들게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도 남해에서 15살에 배를 타고 부산으로 건너왔다고 했다. 남해가 고향인 친지들은 모두 부산에 모여 살았다. 그렇게 모인 친지들은 집안계니 친목계니 하며 정기적인 모임을 했고, 서로 돕거나 의지하며 힘겨운 타지생활을 견디어 냈다.
국민학교 입학과 함께 제식훈련도 시작되었다. ‘차렷’ ‘열중쉬어’ ‘앞으로나란히’를 시작으로 좀 더 고난도 훈련을 받았다. 수업시간표에 체육 시간으로 표기되어 있을 뿐이지, 고등학교 교련시간과 같은 것을 국민학교 때부터 배운 것이다. 많은 학생을 통제하기에는 제식훈련만큼 효율적인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학생을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또 있었다. 바로 체벌이다. 무릎 꿇고 손들기로 시작된 체벌은 책상 위에서 무릎 꿇고 걸상 들기로 강도가 높아져 갔으며, 4학년 때 만난 남자 담임 선생님은 원산폭격을 처음으로 가르쳐 주었다. 낚싯대 공장을 운영하던 친구 할아버지는 매 학기 교무실에 수백 개의 낚싯대를 무상 제공했다. 우리는 운동장에서 놀다가도 애국가가 울리면 모든 행동을 멈추고 태극기를 향해 가슴에 손을 올리고 부동자세를 취해야 했다.
학기 초가 되면 부모님 학력은 어떤지, 집에는 어떤 고가제품이 있는지 공개적으로 물어보았고, 선생님이 집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는데 이 모든 것이 너무 싫었다. 수시로 폐품을 가져오라고 했고, 무슨 무슨 모금이니 성금이니 하면서 수시로 돈을 가져오라고 했다. 북한에서 방류하면 물바다 된다면서 평화의 댐을 짓는다고 했을 때는 돈을 두 번이나 가지고 오라고 했다. 육성회비는 강제성은 없었지만 무조건 가져오라고 했고, 내지 않는 학생은 공개적인 매타작을 당해야 했다. 그래도 학교에서 채변 검사나 예방접종 같은 것은 공짜로 해주었다. 채변봉투를 학교에서 수거하는 것은 그나마 재미있는 추억이라도 있지만, 고학년이 되었을 때 등장한 신식 주사기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가축용으로 사용되는 대용량 총 주사기였다. 한 학년 전체가 복도에 줄지어 서 있으면 간호 선생님은 알코올 솜 하나로 한 반 전체 학생을 문지르고 지나가면 뒤따라 의사 선생님이 총주사기로 한 명씩 팔에 쏘면서 지나갔다. 주삿바늘 하나로 전교생이 예방접종을 한 것이다. 겁에 질려 움직인 친구들은 많은 출혈을 감내해야 했다.
그때 시계가 저녁 9시를 ‘땡’하고 알리면 뉴스 시작과 함께 TV 화면을 환하게 밝혀준 사람이 나왔는데, 그 사람이 군인 출신이라는 것은 나이가 좀 더 들어서 알게 되었다. 이는 국민학교 생활을 이해하게 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의 이야기 - 청소년기
나는 1987년 중학생이 되었고, 감천동에 있는 삼성중학교에 배정을 받았다. 괴정동과 감천동에 사는 친구들이 비슷하게 다녔다. 대체로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했지만, 감천동 친구들이 그 정도가 좀 더 심했다. 도시락을 가지고 오지 못하는 친구도 더러 있었고, 고아인 친구도 한 반에 두세 명씩 있었다. 그나마 숫기가 있는 친구들은 숟가락이라도 들고 다니며 친구 도시락을 뺏어 먹기도 했지만 그러지 않은 친구는 그냥 굶어야 했다. 난 항상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불만이었지만 굶어본 기억은 없다. 지금은 ‘감천문화마을’로 꽤 유명한 동네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감천문화마을(감천2동)에 사는 친구들의 가정형편이 제일 어려웠다.
사람은 힘들거나 여유가 없을수록 포악해지는 경향이 있다. 중학교 때 우리의 모습이 그랬다. 성(性)에 눈을 뜨기 시작한 나이이기도 했지만, 폭력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물리력도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거침없이 날아오는 귀싸대기를 무방비로 받아내야 했고, 끝없는 매타작을 견뎌내야 했다. 선생님들은 우리들의 자존감을 누가 더 잘 짓밟는지 경쟁을 하는 듯했다. 선생님의 일방적인 폭행은 우리들의 쌍방폭행으로 전이되었고 각종 무기와 출혈이 낭자한 싸움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가방에는 교과서 대신 이상한 그림책을 들고 다녔고, 싸움에 필요한 각종 무기나 시중에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환각 제품을 들고 다니는 친구도 있었다. 그냥 학교생활 자체가 거대한 카오스였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학교생활이 이어져 갔다.
학교 바깥도 카오스 같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민을 통제하려는 국가와 그 통제권에서 벗어나려는 국민이 수시로 싸웠다. 6월에는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결국 국민이 이겼고, 얼마 뒤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TV에 나와 6·29 선언이라는 것을 했다. 이제는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있다고 했다. 그해 연말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었는데, 유세할 때면 후보마다 누가 사람을 많이 모으는지 대결했다. 동네 어른들은 어떤 대통령 후보 측에서 누가 얼마 받았다는 이야기가 선거만큼 큰 화재였다. 우리 동네는 김영삼이 무조건 당선되어야 한다고 했고, 김대중은 빨갱이라 당선되면 큰일 난다고 했다. 결국, 둘 다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하고 전두환의 친구이며 ‘보통사람’이라고 외치며 돈을 많이 뿌리고 다닌 사람이 당선되었다.
1988년에는 올림픽이 열렸다. 우리도 이제 잘 사는 나라가 되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라가 되었다고 했다.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따며 종합 4위를 차지했다. 금메달 딴 사람은 국민 영웅이 되었고, 은메달 딴 사람은 욕을 먹었으며, 동메달 딴 사람은 그래도 잘했다고 했다.
그해 7월 노태우 대통령은 7·7 선언이라는 것을 했는데 앞으로는 우리보다 위쪽에 사는 나라들과 싸우지 말고 잘 지내보자는 내용이었다. ‘적’이라고 가르쳤던 북한과도 손을 잡자고 했고, ‘중공’을 ‘중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동구 공산권 국가인 헝가리와 처음으로 국교를 수립하더니 이후 다른 공산권 국가와도 손을 잡기 시작했다. 교과서 밖의 세상을 아직 잘 몰랐던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이 헷갈리고 어색했다.
1990년에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대신동 구덕산 자락에 있는 경남고등학교에 다녔다. 뺑뺑이로 고등학교를 배정받던 시절이었는데 부모님은 입학통지서를 받아보고 매우 좋아하셨다. 부산에서는 제일가는 명문고이기 때문도 있었지만, 혹여나 살면서 학교 덕을 볼 수도 있지도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었을 것이다. 고교평준화 이전이었다면 꿈도 꿔보지 못할 학교이지만 그렇다고 살면서 학교 덕을 본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처음으로 교복을 입었다. 동복을 입고 다닐 때는 그런대로 볼만하다 생각했는데, 하복을 입고 다닐 때는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영화 ‘바람’에서 배우들과 모교 후배들이 입고 나온 교복으로, 셔츠는 진한 파랑에 바지는 하늘색인 일명 스머프 교복이 우리 학교의 하복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운동장을 밟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운동장은 야구부의 전유물이었고 축구를 한 번도 해 보지 못하고 졸업을 했다. 대신 체육관에 있는 농구대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운동장이 야구부의 전유물이긴 했지만, 우리도 간혹 운동장을 밟을 때도 있었다. 졸업생 중 좀 잘 나가는 선배가 방문하게 하면 모든 학사일정을 제쳐두고 일장 연설을 듣는 것이 연례행사였다. 경남고는 대한민국 삼부요인(三府要人)을 모두 배출한 학교이기도 하다. 김영삼·문재인 두 명의 대통령에 박희태 국회의장과 양승태 대법원장이 이 학교 출신이다. 각계각층에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한 사람이 수두룩 하지만, 그중 내가 제일 존경하는 선배는 영화 ‘울지 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이다. 우리들의 운동장을 빼앗았던 야구부 중 유명한 선수로는 최동원과 이대호가 있다. 실력만큼이나 인품도 훌륭한 선수들이다.
우리가 학창 시절을 보낼 때는 문과반은 줄어들고 이과반은 늘어나는 추세였다. 앞으로 먹고살려면 이과반을 가라고 모두 권유했다. 중화학공업이 정상궤도에 오른 시점이라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은 이공계 출신이었다. 개인의 적성과 장래희망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취업반도 생겼다. 당시 국가에서는 고급 노동력을 빨리 만들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중학교가 싸움터 같았다면 고등학교는 전쟁터 같았다. 하필 나는 사춘기가 늦게 찾아와 다들 공부할 때 시집과 소설책을 들고 다녔다. 성적이 내려갈수록 원하는 목표도 하향조정 해야 했다. 그래도 살면서 후회는 하지 않는다. 시험점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생활은 단조로웠다. 아침 7시에 엄마가 싸준 도시락 2개를 들고 등교를 해서, 밤 11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집으로 오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뉴키즈 온 더 블록’이 내한공연을 했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혜성처럼 나타나 가요계를 뒤집어 놓았다. 교련시간에 총검술을 배웠고, 마지막 학력고사를 치렀다.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져서 수능시험을 보면 큰일 난다고 해서 재수는 꿈도 꾸지 못하고 하향지원을 했다. 재수한 친구는 다음 해에 수능을 두 번 치르는 해괴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태어나서 학창 시절이 끝날 때까지 모두 군인 출신이 대통령을 했다. 군인 출신답게 학생인 우리에게도 국가에 충성을 요구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게 만들고 수시로 점검을 했다. 국가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해야 했다. 민족을 둘로 갈라놓은 반공은 어떠한 다른 생각과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국가에 따르지 않는 것은 곧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 되었고, 이는 빨갱이와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는데, 교과서와 학교는 변하지 않고 있었다.
나의 이야기 - 성년기
1993년 나는 성인이 되었고, 대학생이 되었다. 가족의 기대와 희생에 비해 다소 초라한 대학진학이었다. 부모님은 아들 대학진학을 위해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최대한의 지원을 했고, 누나들은 자신들의 꿈과 진로를 동생에게 양보해야 했다. 나는 등록금이 가장 싼 지방 국립대학을 선택했고, 어렵지 않게 입학할 수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고, 군 사조직인 ‘하나회’를 청산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기에 앞서 또 다른 한 명의 대통령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문화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의 노래와 패션에 열광했다.
소련이 붕괴(崩壞)되고, 연이어 공산권이 몰락하고 있었지만, 대학에서는 여전히 이념논쟁이 대단했다. 선배들은 PD니 NL이니 하며 서로 후배들을 교육(학습)시키려 혈안이 되어있었고, 때로는 죽일 듯이 싸우기도 했다. 세상의 변화에 비해 학생운동은 과거의 이념에 사로잡혀 점점 멀어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는 해를 거듭할수록 현실로 다가왔다. 서태지와 아이들·신승훈·박진영·윤종신·강산에 등 수많은 뮤지션이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대중가요의 전성시대를 이끌었으며, 서점에도 다양한 도서들이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었다. 페미니즘운동이 활성화되고, 환경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갔다. 새롭고 다양한 시도가 문민정부의 세계화·개방화의 바람과 함께 사회 여러 분야에서 표출되기 시작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을 했고, 주사파 논쟁이 사회를 뜨겁게 했다. TV에서는 연일 대형참사 소식과 함께 끔찍한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했다.
친구들이 한 명씩 군대에 가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술을 마셨고, 목이 터져라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다. 나도 겨울이 시작되기 전, 나의 20번째 생일을 이틀 앞두고 국가의 부름을 받았다. 자유의지와 무관하게 징집을 당한다는 것, 나의 인신을 국가에서 강제로 구속한다는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인생의 최악의 시기를 그래도 조금이라도 짧게 다녀오려고 육군에 입대했다. 온갖 부조리가 일상화되어 있었고, 구타가 난무했다. 군대에도 배울 것이 많다고 했지만, 배우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훨씬 많았다.
26개월간 세상과 등지고 사회에 나왔더니, 세상도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하늘을 찌르던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은 바닥을 헤매고 있었고, 나라는 점점 위기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었다. IMF라는 낮 선 국제기구의 이름이 연일 언론을 통해 회자되었고, 급기야 국가 부도를 막기 위해 IMF에 돈을 빌린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돈을 빌려준다며 내세운 조건이 내 삶과 우리 공동체를 이렇게 만들 줄은 몰랐다.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을 IMF는 잘 만들어 주었다.
나에게도 IMF 구제금융은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온 세상은 밀레니얼 분위기로 들떠 있었고 Y2K 문제로 국가 마비 사태가 발생할지 하지 않을지 갑론을박하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하려니 좋은 일자리는커녕, 일자리 자체가 없었다. 2000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IMF 모든 차관 상환 및 IMF 금융위기 탈출 공식 선언했을 때 나는 겨우 취업을 할 수 있었다. 졸업 후 1년간의 긴 방황 끝에 내가 원하지 않은 곳에서 첫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일은 평생 나의 업이 되었다. 빠른 속도로 대한민국은 정상화되어 갔지만, IMF가 만들어 놓은 신자유주의는 국민을 옥죄는 좋은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의 20대 마무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발굴하고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2002년 여름, 시민들은 새로운 광장문화를 보여주었고 그 에너지는 블랙홀보다 강렬했다. 나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를 위해 전 세대가 어우러져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시민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발굴하고 선출함으로써 새로운 대한민국을 예고했다.
한일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을 꺾고 처음으로 월드컵 16강에 진출하기 하루 전 14살 효순이와 미선이가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을 했다. 월드컵에 묻힐 뻔한 이 사건을, 시민들은 월드컵 4강으로 만든 광장의 열기를 촛불집회로 승화시켰다. 정치적 자산이 전혀 없었던 노무현을 발굴해 결국 민주당 대선후보를 만들었고, 대통령 자리까지 올려놓았다. 모든 것이 시민들의 욕망과 열기가 모아진 결과였다. 나의 20대 끝은 앞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는 곧 X세대는 새로운 대한민국의 첫 세대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1장에서는 세대론에 대해 알아보고, 세대론이 가지는 의미와 이 책의 세대 구분에 대한 이해를 도울 것이다. 조금 재미없고 지루할 수 있지만,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나침반 역할을 할 것이니 양해해 주길 바란다.
2장에서는 X세대를 만들어낸 철학적 고찰을 해 볼 것이다. 특히 X세대가 성장할 당시 X세대의 가치관에 다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다룰 것이다.
3장에서는 X세대를 만들어낸 역사적 고찰을 해 볼 것이다. 대한민국의 탄생과정과 주요 사건·정책, 그리고 국가지도자에 대해 다룰 것이다. 이 부분을 다소 비중 있게 다룬 이유는 이러한 대한민국의 토대 위에 X세대가 탄생한 것이며, 이는 이후 대한민국이나 X세대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4장은 X세대가 경험했던 사회·문화·사건 등을 위주로 저자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다.
이 책은 변화무쌍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같은 시대를 공유했던 벗들에게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이다. 더불어 X세대를 있게 해 준 이전 세대에 대한 감사와, X세대를 디딤돌 삼아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미래 세대에게도 전하고 싶은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