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그 실체 없는 명사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많은 일을 만나고 더 넓은 세상과 부딪히게 된다. 그 속에서 좌절과 실망을 경험하고,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으며, 어른들이 그다지 힘이 센 것도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살아오면서 어른이 되었구나, 느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주민등록증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 꼬박꼬박 받던 용돈이나 세뱃돈이 뚝 끊겼을 때, 더 이상 학생이라는 말을 듣지 못할 때, 공중 목욕탕에서 욕조 안의 물이 시원하게 느껴질 때, 세상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어릴 적 꿈이 가물가물해질 때...
_김혜남,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내가 느끼는 어른이라는 단어는 인생이나 죽음 같은 단어와 닮아 있다.
분명 명확한 의미를 가진 명사이지만, 그 안에는 너무나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도 때로는 그 존재를 인정하기 어렵다. 어딘가 추상적이면서도 늘 가까이에 존재하는 그런 개념이다. 죽음이 우리 주변에 늘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자주 의식하지 못하듯이, 어른이 됨 역시 그렇다.
그렇다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회적 규율에 따라 직접 책임을 지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 단지 20대에 접어들었다고 모두를 어른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어른이야.'라는 말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나이를 먹으면서 그동안 인생의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깨지기도 하고, 생각의 변화를 마주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변화한 생각들은 잠시 진리처럼 여겨지다가도, 또 다른 경험을 통해 달라질 수 있다.
예전보다 생각이 많이 성장했다고 느끼는 나,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도 있는 나, 사회적으로 어느 단계에 올라있는 나는 과연 '어른'일까? '어른이라면 이렇게 행동해야 해.'라는 사회적 관념 속에 살아가지만, 개인의 다양성을 점점 중요시하는 시대에서는 그 기준조차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흔히 '철이 들었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 단어의 의미는 정량적이지 않고,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사용하기에 애매한 경우가 많다. 50대에게 철들었다고 말하면 이상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다. 어른이 되는 것, 철이 든다는 것이 특정 나이에 적용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께서는 점점 노쇠해지며 마음이 어린아이 같아지신다. 다른 어르신들과 비교하면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은데, 유독 아버지께서는 더 어린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모습을 많이 보이신다. 젊었을 때 유독 더 호탕하시고, 남성적인 모습을 많이 보이셨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어른이 되었다가 다시 아이로 돌아가는 걸까? 방송에서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해주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그분들은 분명 어른으로 느껴지는데.. 지금의 아버지는 어른이면서도 어른 같지 않게 느껴진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어른이 아니라고 잘못 배운 사회적 인식 때문일까, 아니면 아버지는 진짜 어른이 아니셨던 걸까? 그렇다면 어른이 아니라고 느끼는 것은 아버지를 무시하는 걸까? 그런 아버지는 기분이 나빠야 하는 걸까? 철들지 않았다는 건 생각이 깊지 않고, 부족함이 있다는 것일 텐데,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반드시 철들어야 하는 걸까? 인생의 종착점이 어른일까? 인생의 목적은 성숙해지는 것일까?
어른이라는 단어는 분명 명사인데, 이런 개념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명사다. 그래서 삶, 죽음과 닿아있다. 분명 존재하지만 만질 수 없는 그런 존재. 직접 닿을 수는 없는 단어다. 끝도 없는 질문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 그런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