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라는 차원의 문을 통과하면 달라지는 속도.
"환자에서 환(患)이 아플 '환'이잖아요. 자꾸 환자라고 하면 더 아파요.
게다가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호칭 싫어하는 분도 많아요. 그래서 은퇴 전 직함을 불러드리죠. 그러면 병마와 싸우려는 의지를 더 굳게 다지시는 것 같아요. 건강하게 일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바람이 가슴 한쪽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병원에서는 사람의 말 한마디가 의술이 될 수도 있어요."
_<언어의 온도>, 이기주
나는 눈썰미가 좋다. 그래서 사람의 변화를 잘 캐치한다. 주변 사람들의 머리스타일이나 색깔 변화는 물론이고, 몸무게 변화까지도 잘 알아챈다.
그런 내가 꽤 많은 경험을 통해 믿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은퇴를 하면 노화가 평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단순히 죽음에 이르는 가속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해, 현업에 종사할 때는 매일 신체와 뇌를 규칙적으로 사용했지만, 은퇴 후에는 그 사용 빈도가 줄어들면서 신체가 더 빨리 약해지는 느낌이다.
실제로 내가 겪어본 많은 어르신들은 은퇴 후 몇 년 안에 이전의 건강함을 잃고 눈에 띄게 말라가며 급속도로
노화가 진행되는 모습을 보였다. 매일 출근하고 활동하며 유지되던 근육들이 집안에서만 생활하거나 동네 산책 정도로 제한되니 근육량이 줄어들고, 회사에 다닐 때는 꾸준히 하던 운동도 소홀해졌을 것이다. 사람들과의 대화나 업무를 통해 매일 활동적이던 뇌도 점차 무기력해지고, 고독 속에서 더 적은 자극을 받게 된다.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뇌 활동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뇌로 공급되는 산소량도 감소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부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체감하기 전까지는 잘 알지 못한다. 특히 은퇴하는 당사자는 이를 더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은퇴 전 치열하게 일했던 시간이 '과로'로 인한 대가라면, 은퇴 후 그 대가를 한꺼번에 치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안타까운 현실일까? 아니면 자연스러운 현상일까? 자연스럽지만 안타까운 인생의 모습일까?
어떻게 보면 이 노화의 속도는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도 있다. 은퇴 후에도 꾸준히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현역 시절처럼 생활을 유지한다면 노화의 가속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미룰 수는 없다. 결국 신체와 정신의 피로는 점차 우리를 나태하게 만들 것이고, 이는 분명히 노화를 촉진시킬 것이다. 미룰 수는 있지만,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도 해본다. 우리가 늙어가는 속도에 맞춰 적당한 에너지를 사용한다면, 급속한 노화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노화가 가속되는 이유가 미래의 에너지를 미리 끌어와 써버린 결과라면 말이다. 마치 다음 주의 용돈을 이번 주에 미리 다 써버리면, 다음 주에는 돈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과 비슷한 것이라면?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에너지를 그때그때 맞춰 완벽하게 사용하는 계획을 세우며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은퇴 후 내가 급속히 늙어간다고 느껴진다면, 남은 에너지를 조금 더 천천히 사용할 방법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기주 작가님의 글처럼 말 한마디가 치료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부모님이 나이드는 것을 조금은 늦출 수 있다면, 내일 전화를 걸어 '회장님' '여사님'이라 불러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