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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텔c Oct 07. 2024

[사색의 서, 7] 마주함

완주냐 중도포기냐는 중요하지 않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몸이 성할 날이 없었던 한 환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폭력적인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를 둔 여자가 알코올중독자인 남자를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과거'라는 우주복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도돌이표처럼 끔찍한 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사실 내면의 상처 입은 어린아이가 성장하고자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이다.

_김혜남,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이 문장을 읽으면서 아버지와 나를 생각했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가곤 했다. 성격의 형성에는 환경이 큰 영향을 준다고 한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과 나의 젊은 시절은 사회도, 환경도, 교육도, 친구도 모두 달랐지만, 나에게서 가끔씩 나타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면 성격 형성에 가장 중요한 건 유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타고난 기질.


3~40년의 간극이 있는 환경의 차이로는 유전적으로 타고난 기질을 극복하기가 어려운 것일까? 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록 몇몇 상황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닮은 행동을 할 때도 있지만, 나는 많은 변화를 이루었다.


어린 시절 나에게 화를 내고 매부터 들던 아버지를 닮지 않겠다고 수없이 생각하고 다짐했다. 그 결과 폭력적이지 않은 아빠가 되었다.


다정한 한마디, 사랑한다는 그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만큼 무뚝뚝한 아버지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자주 표현하고 다정한 말을 많이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표현을 잘하는 아빠가 되었다.


아버지는 연세가 드시면서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시는 듯하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 형제들과의 이별, 친구들과의 이별은 아버지를 점점 외롭고 고독하게 한다. 


몇년 전, 아버지의 큰형이신 큰아버지께서 급성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너무나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셔서 큰아버지 자신도, 가족, 친척들도 모두 경황이 없었다. 큰아버지는 '죽기 싫다.'며 어린 아이처럼 펑펑 우셨다. 그때 큰아버지 모습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80년을 넘게 살아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토록 클 수 있을까?아니면 갑작스럽게 다가온 죽음이었기에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으셨던걸까?


요즘 아버지께서는 근심을 안고 살아가신다. '인생이 이렇게 허무한 거다.'라고 말씀하시며, 늙어가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의미라고 생각하신다. 그리고 큰아버지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죽음을 두려워하고 계신다. 그런 두 분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죽음을 마주해보려 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당장 내일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당장 밖을 나갔는데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면, 나는 괜찮을까? 남겨질 가족들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며 죽어갈까? 아니면 큰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두려움에 펑펑 울까?


죽음을 마주보고 생각해보니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인생은 달리기 경주가 아니었다. 기록이 중요한 달리기가 아니었다. 인생은 마라톤이었다. 완주하면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는 마라톤.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오늘은 매 순간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다. 그 한 걸음에 충실하게 나아가는 게 결승선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그 결승선은 다른 의미로 죽음과 같다. 결승선을 통과하면 어떤 기분일까? '나 대단했어. 정말 잘 달렸어. 고생했어.'라고 말할 것이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나는 나에게 뭐라고 말해줄까 생각해보면, '내 인생 대단했어. 정말 잘 살았어. 고생했어.'라고 할 수 있을것 같다.


마라톤을 완주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에는 많이 아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상이나 어떤 이유로 더는 뛰지 못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면, 미련은 없을 것이다. 그때 역시 '고생했어. 잘했어.'라고 말할 수 있겠지. 그리고 이런 완주를 못한 상황이 갑작스러운 죽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완주하면 그 자체로 훌륭한 인생일 것이고, 중간에 멈출 수 밖에 없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훌륭한 인생 아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내가 내린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와 내가 유전적으로 같은 기질을 갖고 있다면, 아버지도 내가 생각한 것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은 덜어내고, 지금의 시간을 만끽하며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와 나의 유일한 차이는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가, 외면하고 있는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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