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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가 나타난 날 (下)

미국 대통령의 책상은 무슨 나무?

by 도시 나무꾼 안톤

1854년 5월 15일. 매우 추움


온도계가 영하 51도를 가리키고 있다. 생전 처음 보는 온도다.

동료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면서도 갑판 아래서 서로 몸을 기대며 얼마 남지 않은 체온을 나누고 있다. 죽음의 신이 우리를 조만간 덮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배 전체에 극한의 공포가 감돌았다.

우리는 영국의 북서항로(북극해를 지나는 항로) 개척을 나갔다가 실종된 배를 구조하러 왔다. 그런데 이젠 우리 배가 커다란 얼음에 갇혀버렸다. 누군가의 구조를 기다려야 한다. 구조대가 얼어 죽으면 새로 구조대에 지원할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다.

드디어 켈렛 선장이 며칠을 고민하고 결심한 듯, 배 위로 나왔다.


"자! 이제 우리는 배를 포기하고 탈출한다"


선장의 명령에 덜덜 떨며 웅크리고 있던 선원들이 좀비처럼 일어난다. 동태 눈깔에 여기저기 마비가 온 몸을 일으켜 세운다. 정말 우리는 살아나갈 수 있을까?

탈출도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지만 그래도 배 안에 갇혀있다 죽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사히 아내 순이와 아이들 철수 영희를 만나고 싶다.


HMS Resolute와 HMS Intrepid 겨울 숙소, Melville Island, 1852-53. by 항해사 George Frederick McDougall


1854년 캐나다의 북극권 빅토리아 해협(Victoria Strait)에서 거대한 빙하에 갇혔던 영국의 탐험선 HMS Resolute 호 선원의 일기를 창작해 봤다. (HMS는 Her Majesty's Ship으로 영국 여왕의 배라는 뜻)

선원들이 모두 탈출한 후 배는 사람 없이 덩그러니 남았다. 그로부터 1년 후, 미국의 포경선 조지 헨리호가 바다에 홀로 둥둥 떠다니는 배를 발견하게 되는데 HMS Resolute호였다. 배를 만든 단단하고 질긴 나무가 얼음 바다의 거친 힘을 간신히 견뎌내고 있었다. 여름에 빙하가 녹아, 버려졌던 곳에서 1,000마일 떨어진 곳까지 해류에 밀려왔다.


당시 해양법으로는 버려진 배는 발견한 사람이 주인이 되므로 영국에 돌려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조지 헨리호 선주로부터 배를 사들여 수리를 마친 후 1856년 12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선물로 돌려준다. 영국에서는 배의 귀환을 크게 환영했고, 빅토리아 여왕과 남편 앨버트 왕자는 배에 직접 방문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HMS Resolute호는 미영전쟁 (1812-1815) 이후 양국 간 우정의 심벌로 자리잡게 된다.


빅토리아 여왕 폐하의 돌아온 HMS Resolute호 방문 (1856년 George Zobel, William Simpson)


그 후 20여 년간 사용되다 1879년 Resolute호는 해체될 예정이었다. 그 때 배를 분해해 책상을 만들라는 빅토리아 여왕의 명이 떨어진다. 그중 하나는 미국 대통령을 위한 답례 선물이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책상이 1880년 11월 23일 백악관에 도착한다.

Resolute는 "결의에 찬, 단호한"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현재 백악관 집무실 Oval office에서 미국 대통령이 쓰고 있는 책상이 1880년에 도착한 책상이고, Resolute호의 이름을 따 Resolute Desk (결단의 책상)라 부른다.


현재도 미국 대통령의 책상


1963년 10월, 케네디 대통령과 Resolute Desk에서 놀고 있는 아들 존 F. 케네디 주니어 photo by Alan Stanley Tretick


올해로 미국에 도착한지 150년이 되어가는 결단의 책상(Resolute Desk)은 케네디 대통령이 1961년 집무실 책상으로 사용하면서부터 비로소 대중적 상징이 된다. 대통령은 집무를 보고 아들 케네디 주니어는 책상 밑에서 놀고 있는 사진으로 확실한 유명세를 탄 것.

책상의 재료가 된 나무는 HMS Resolute 호의 선체 재료였던 나무다. 우리나라에서는 '로부르 참나무'라 부르는 English Oak (European Oak)로 목재로는 화이트 오크(White oak)에 속한다.


영국이 해군 군함에 화이트 오크를 쓴 것은 꽤 거슬러 올라간다.

1805년 영국 해군과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트라팔가 해전(Battle of Trafalga)에서 영국의 승리를 이끌었던 넬슨 제독의 배 HMS Victory호에도 이 나무가 등장한다. 배를 건조하는데 약 6,000그루의 나무가 소요되었다고 하는데 그중에 5,500그루가 '로부르 참나무'(학명 Quercus robur)였다. 이렇게 영국에서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였고 그래서 또 다른 이름 English Oak으로도 불렸을 것이다.



술과 오크


'진짜와 가짜' 이야기를 하면서 술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술은 양면성의 도구다. 진심의 도구이면서, 거짓의 도구이기도 하다.


고대 로마에는 “In vino veritas” (와인 속에 진리가 있다)라는 격언이 있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술자리에서 한번 논의하고, 다음날 맨 정신에 다시 확인했다고 전했다. 술자리에서는 ‘진심’을, 맨 정신에서는 ‘이성’으로 검증한다는 발상이다.

반대로 "the wine is in, the wit is out" (술을 마시면 지혜가 사라진다)이라는 영국 속담도 있고 “酒は本心を表し、また虚言を生む” (술은 본심을 드러내지만 거짓도 낳는다)라는 일본 속담도 있다.


술에 대한 상반된 격언을 알폰스 무하 (Alphonse M. Mucha) 스타일로 챗GPT를 통해 그려봤다


이렇게 진실과 거짓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술과 같이 해 온 나무 역시 참나무, 오크(oak)다. 와인이나 위스키를 숙성하는 데 사용한 오크(oak)통은 당연하게도 참나무다.

프랑스에서 전통적으로 오크통으로 사용한 참나무는 세실 오크(Sessilie oak, Quercus petraea)로부르 참나무인 잉글리시 오크(Quercus robur)다.

세실 오크는 나무의 밀도가 촘촘하다. 그래서 화합물을 천천히 배출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만들어준다. 풍성한 아로마가 강점이다. 안톤이 좋아하는 피노 누아(Pinot Noir) 품종에 많이 쓰인다고 하니 반갑다. 반면 잉글리시 오크(로부르 참나무)는 세실 오크에 비해 밀도가 덜 촘촘하다. 그래서 아로마(aroma)에서는 밀리지만 씁쓸함과 수렴성을 만들어준다. 수렴성(收斂性, Astringency)입 안에서 떫고 조이는 듯한 촉각에 가까운 맛을 말한다. 적절하면 "구조감이 있다"라고 하고, 과도하면 "거칠다(harsh)"는 말을 듣고, 부족하면 "밋밋하다"는 표현을 듣게 된다.

나무는 공기의 들고 남, 즉 통기성(通氣性)이 높아 오크통에 술을 저장해 놓으면 매년 3% 전후가 사라진다. 공기 중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매년 국가에 재산세를 내듯, 술은 매년 하늘에 3%의 세금을 낸다. 이것을 천사의 몫(angel’s share)이라고 한다. 스토리텔링 참 멋지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지점이다.

술이 세금을 충분히 내는 동안 천사는 오크에 들어 있던 탄닌, 페놀, 바닐린 등을 배출시킨다. 이 것이 와인과 위스키에 바닐라, 캐러멜, 스파이스 같은 풍미를 만들어 준다.


와인숙성을 위한 오크통 (챗GPT이미지)


유럽은 와인숙성을 위해 천사의 계시를 받아 참나무를 고른 것은 아니다. 와인은 저장이 필요했을 뿐이고 참나무는 주변에 많았던 나무였을 뿐이고 사용해 보니 결과적으로 훌륭했던 것뿐이다. 와인을 "신의 물방울"로 추켜 올리다 보니 오크통의 나무도 '신의 계시처럼 특별히 찾아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은 그냥 '주변에 흔히 보이는 나무'를 사용한 것이다.

'오크의 나라'라 할 만큼 참나무가 많은 미국도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다만 미국산 화이트오크 (학명 Quercus alba)는 프랑스산 참나무에 비해 바닐라 향이 더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달콤하고 부드러운 풍미를 내는데 적합하고 대중적 강점이 있다고 한다.

한때 프랑스산 참나무가 미국산 참나무에 비해 2~3배 가격이 비쌌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의 일부 지역에서 미국산 참나무로 만든 오크통에 와인을 숙성하자 프랑스 와인협회가 나서서 대소동이 나기도 했다. '와인을 프랑스 참나무가 아니라 미국 참나무에 숙성하다니'... 당시 프랑스인들에게는 난리가 날 만한 상황이었겠지만 자기들만이 정통이라는 자존심에 따른 열폭일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흘러 요즘은 오크통이 아니라 스테인리스 통에 숙성하면서 참나무조각, 오크 칩(Oak chip)을 통에 넣는 곳도 많아졌다 하니 '정통'이란 말이 허망하다 싶다. 향후에는 참나무로부터 나오는 탄닌, 페놀 등의 성분을 따로 추출해 분말로 넣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와인숙성에 쓰이는 오크칩(oak chip), 구워서 사용한다


술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 더 가보자. 크게 술은 발효주와 증류주로 나뉜다.

발효주(fermented liquor)양조주라고도 하는데 곡물과 과일 등에 있는 당분을 효모가 발효시켜 알코올을 만드는 술로 효모가 알코올 농도 15~18% 이상에서 죽기 때문에 알코올 도수는 대개 15% 전후가 한계다. 맥주, 막걸리, 와인 등이 해당된다.

증류(distill)는 더 ‘강한 것’을 추출해 내려는 인간의 욕망이 만든 기술이다. 증류주(distilled liquor)는 발효주를 다시 끓는점 차이를 이용해 증류하여 알코올 농도를 높인 술로 알코올 도수는 최대 60~70%도 가능하지만 대개 40% 전후다. 곡물 기반은 위스키, 보드카, 소주 등이 있고, 포도 등 과실 기반으로 코냑, 알마냑, 브랜디 등이 있다. (가게에서 파는 일반적인 소주는 증류식이 아니라 주정을 물과 섞은 희석식이다)


유럽 남부에서는 포도농사가 잘 되기 때문에 코냑, 알마냑, 브랜디 등의 과실기반 증류주가 번성했지만, 독일부터의 유럽 북부는 포도농사보다는 보리 밀 등을 중심으로 곡물 기반의 위스키와 같은 증류주가 발달했다. 포도주를 즐겨 마시던 로마의 시저가 갈리아 원정을 다녀와 북쪽지방 사람들은 "말 오줌 같은 술"을 마신다고 기록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맥주다.

과실기반의 코냑이나 곡물기반의 위스키 모두 오크통에서 숙성한다. 보통 숙성 3년 이상이면(스코틀랜드 법적 최소 숙성 기간) 거친 성분은 안정화되고, 6~8년 사이에 향·맛이 뚜렷이 원숙해지고 10년 이후부터는 오크 풍미가 깊어지며 “프리미엄” 감각이 나타난다고 한다. (대개 위스키 업체는 12년을 프리미엄 기준으로 삼고 있다)



'떡갈'위스키, '상수리'와인 그리고 '신갈'소주


안톤은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해 '알콜쓰레기'(줄여서 '알쓰')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막걸리 종이컵 한잔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상태 좋은 날에도 와인 2잔까지가 최대일 정도다. 이런 내가 사발식으로 유명한 대학을 견뎌내고 술 마시는 것으로 유명했던 직장을 다니고 있으니 지난 세월 잘 버텼다. 사실, 마시는 날 뿐 아니라 다음 날까지 망가트리는 술을 도대체 왜 마시는지 젊은 날엔 이해할 수 없었다.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즐길 수 있게는 되었다. 여전히 많이 마실 수는 없지만 술을 왜 마시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적게 마시는 만큼 좋은 술을 마시려 한다. 한 잔만에 끝날 수도 있으니까...

알콜쓰레기지만 이상하리만큼 술에 관심은 많았다. 남들은 '마시지도 못하면서 뭐 하냐'라고 빈정댔지만 상가의 술 코너에 가면 혼자 한참 시간을 들인다. 술에 담긴 이야기가 좋았고 그 스토리들이 몸체로 나타난 술과 술병이 좋았다. 하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랄까? 가질 수 없는 너랄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난 그래도 술의 매직에 빠져있다.


상상해 본다. 우리나라에도 참나무가 많으니 K-오크통에서 숙성한 떡갈위스키, 상수리와인, 신갈소주


와인을 한국의 떡갈나무, 신갈나무로 만든 오크통에 숙성하면?
소주를 증류해 우리 참나무, 오크통에 숙성하면 어떻게 될까?
위스키를 우리 참나무통에서 숙성하면 어떤 맛이 날까?


이런 아이디어를 내며 스스로를 칭찬하다가 '자기 나라 참나무로 오크통을 만들어 위스키를 만든 나라'가 이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이쿠~ 일본이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으로 오크통 수입이 중단된다. 그러자 일본은 자국 내 참나무로 오크통을 만들기 시작하게 되는데 그 나무가 북해도와 혼슈 북부에 자생하는 '미즈나라 오크'(Mizunara Oak, 학명 Quercus crispula)다. 성장속도가 느려 목재로 사용하려면 200년이 걸리는, 일본에서만 자라는 나무다. 미즈나라는 "みず(물)+なら(참나무)"로 물참나무라 하는데 이 나무의 오크통에서 만들어진 위스키는 숙성이 길수록 "절·신사에서 맡을 수 있는 불교 사찰의 향내"가 난다고 한다. 이 향을 핵심으로 내세우며 일본 위스키를 만들어냈고 이젠 일본 위스키의 영혼이라 불린다.

산토리(Suntory)의 야마자키(Yamazaki Mizunara), 히비키(Hibiki Mizunara) 브랜드에서 사용 중이고 사용처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


일본 참나무 미즈나라(みずなら) 출처 : KAIYO Whisky
yamazaki.jpg 히비키 21년과 야마자키 12년과 18년


이미 일본에서 시도한 데다 상용화까지 성공해 수출까지 하고 있다고 하니 갑자기 김이 샌다. 하지만 찾아보니 우리나라도 이미 시도 중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처음 생각한 아이디어가 아닐까 하는 것은 이렇게 완전하고도 당연한 착각이 되었다.


2018년부터 이미 한국식품연구원 전통식품연구단이 ‘전통 증류주 현대화’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2020년에 우리나라 자생인 참나무 6형제(갈참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를 대상으로 여러 테스트를 했다. 게다가 한국산 오크통 샘플을 스코틀랜드로 보내 2년간 위스키 숙성 실험도 진행했다. 그 결과 우리 참나무들이 증류용 오크통으로 적합하다는 것까지 확인했다고 한다.

연구의 결과는 우리 참나무 6형제 중 신갈나무. 떡갈나무와 졸참나무가 주목할만하다고 알려준다.


Journal of Agricultural and Food Chemistry(2000)와 한국식품연구원 자료를 토대로 수정 (미국프랑스일본은 평균치)


오크통은 풍미를 담당하는 '오크락톤(Oak lactone)'이 중요하다. 쉽게 이해하기에는 시스-오크락톤(cis-Oak lactone)이 코코넛, 바닐라향을, 트랜스-오크 락톤 (trans-Oak lactone)이 우디함·허브·스파이스 느낌을 담당한다.

수치를 봐도 미국산 오크통이 바닐라향을 강하게 만들어 달콤하고 친화적으로 만들기에 적합하고, 프랑스 오크통은 스파이스하고 구조적이라는 평을 듣는 이유를 알 만하다. 물론 나무의 조직 밀도 등 더 따져볼 것들이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신갈나무, 떡갈, 졸참도 풍부한 풍미를 제공할 가능성이 높다. 수치만 보면 졸참나무는 일본의 미즈나라 오크와 비슷하고 신갈나무는 두 성분이 비슷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어 미국 오크의 달콤함 프랑스 오크의 우디 함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형 오크로 가능성이 있다.

아직은 우리나라 증류주들이 미국산 오크통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연구를 통해 앞으로 한국 참나무에 숙성한 새로운 한국 술 브랜드를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독도소주에 챗GPT를 이용해 이미지로 만들어 본 상수리와인, 떡갈위스키, 신갈소주


AI를 이용해 상수리와인, 떡갈위스키, 신갈소주의 이미지를 만들어봤다. 시중에 판매 중인 37도 증류주인 독도소주를 이용했다. 상수리나무 오크통에서 숙성한 상수리와인, 떡갈나무 오크통에서 숙성한 Quercus Dentata(떡갈) 위스키, 신갈나무 오크통에서 숙성한 신갈 소주를 상상해본다.

이런 술이 나오더라도 그때도 안톤은 한두 잔이면 더 못 마시겠지만... 이런 상상은 기분을 좋게 만든다. 딱 한두 잔 마시고 싶다.



가짜 나무가 있는 진짜 나무


이름에 진짜와 가짜가 쌍을 이루는 나무가 있다. 참죽나무가죽나무다.

참죽나무의 '참'도 진짜라는 뜻이지만 가죽나무의 '가'는 '가짜'라는 뜻으로 '假'다.

원래는 스님을 뜻하는 '중'의 나무라는 설이 있다. 새순과 잎을 사찰음식으로 이용해 '중나무'가 되었고 생김새가 비슷한 두 나무가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로 진짜와 가짜가 갈라졌다는 설이다. 실제로 참죽나무를 眞僧木(진승목), 가죽나무를 假僧木(가승목)이라 한다. 또 다른 설은 대나무(竹)의 죽순처럼 순을 먹는다 하여 '죽'나무라고 이름 붙여졌다는 이야기다. 어느 쪽이든 참과 거짓이 한쌍을 이룬다.


왼쪽이 참죽나무, 오른쪽이 가죽나무. 잎과 꽃모양도 비슷해 구별이 어렵다 (출처: 국립수목원)


참죽나무(학명 Cedrela sinensis)는 남부지방에 주로 자라는데 한자 이름은 춘(椿), 향춘(香椿)이다. 여기서 춘(椿)은 장수(長壽)를 의미하는데 다른 사람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던 부장(椿府丈)이란 말이 참죽나무처럼 오래 사시라는 뜻이 된다. 참죽이 장수를 의미하게 된 것은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편에서 "팔천 년을 봄으로 삼고, 팔천 년을 가을로 삼았다"는 상상의 나무를 참죽나무로 지칭한 것에 기인한다.


목공을 하지 않는다면 이 나무는 새 순으로 만든 '나물'로 만난다. '가죽나물'이 그것인데 이름 때문에 가죽나물을 가죽나무의 새 순인 줄 아는 사람이 많다. 가죽나무의 새 순은 식용으로 먹을 수 없으므로 가죽나물은 (가죽나무가 아니라) 참죽나무의 새 순과 잎으로 만든 나물이다. 나무가 워낙 생김새가 비슷해 혼동하기 쉬운 데다 남부지방에서는 참죽나무를 가죽나무라 부르고, 가죽나무는 개가죽나무로 부르고 있으니 더 헷갈린다.


참죽나무의 새 순, 가죽나물 (수연아빠님 사진 제공)


사진을 제공해 준 수연아빠는 나물도 싫어하고 고수도 싫어하는 전형적 나물 포비아(phobia)를 가진 분이지만 이상하게 유독 가죽나물만 좋아한다고 한다. 가죽나물은 봄에 새 순을 데쳐 먹거나 참쌀풀을 앞뒤로 발라 기름에 튀겨 튀각으로 먹고, 다른 계절엔 장아찌로 먹는다. 수연아빠의 향과 맛에 대한 평은 이렇다.


첫 향은 라면수프의 느낌인데 씹으면 구수한 된장느낌이 나거든요.
향은 인스턴트느낌. 맛은 된장베이스 구수한 맛!!
안 어울릴 것 같은 향과 맛인데 두 가지가 묘하게 잘 어울리는 느낌이요^^


또 다른 지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흙의 맛, 땅의 맛
두릅이 순한 나무의 맛이라면 가죽나물은 터프한 나무의 맛
가죽나물 장아찌 진짜 맛있어요


입이 짧은 분에게도 매력적인 맛을 주는 가죽나물의 맛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평소 싫어하던 것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최고의 요리이고, 평소 나물을 싫어하는데 맛있게 먹은 나물이라면 최고의 나물일 테니...

안톤도 분명 먹어본 나물인 것 같은데 향과 맛에 대한 평을 들어보니 먹어봤는지 자신이 없어진다. 조만간 먹어보기로 한다.



참죽으로 무엇을 만들까?


목재로써의 참죽나무는 가장 큰 특징이 "붉다"는 것이다. 붉은색이 강해 호불호가 생길 수 있지만 목재 자체의 기름이 느껴지는 윤기가 있다. 영어로는 Korean Mahogany로 한국의 마호가니라 불리고 중국산 목재는 Chinaberry라 불린다. 목공에 진입하면 비교적 자주 보게 될 나무다.


참죽나무. 붉은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가죽나무는 소태나무과, 참죽나무는 멀구슬나무과(Meliaceae)에 속하는 나무로 과(family)가 다르다. 생김새가 너무 비슷하지만 목재로는 참죽이 월등하다. 멀구슬나무과에 속하는 마호가니 계열의 특징이 심재(heartwood, 나무의 중심부)가 검붉은 루비빛을 띤다는 것이다. 적당히 단단하고, 샌딩 하면 촉감이 따뜻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을 만들어 준다. (단단한 정도는 느티나무에 살짝 밀리지만 무난하게 단단하다)


참죽으로 무엇을 만들까 다시 고민에 빠졌다가 이내 '고풍스러움'이란 말에 꽂힌다. 참죽의 검붉은 색상과 짙은 나이테 무늬는 고풍스러움을 만들어내기 좋다. 자그맣고 고풍스러운 나무상자를 만들기로 한다.


참죽나무 박스 만들기 (테이블쏘의 각도를 45도로 기울여 깍아냈다)


먼저 가로세로 100mm짜리 6개 판재를 만들고 테이블쏘(Table Saw)의 각도를 45도 기울여 각 면을 비스듬하게 깎아나간다. 그렇게 6개의 정사각형 참죽 조각을 만든 후 각 면을 목공본드로 접합한다. 접합 후 클램프(clamp)로 조이고 고정시킨 후 기다린다. 이 때 6개의 면중에 눈에 주로 보이는 윗면과 정면으로 사용할 판재는 미리 정해놓는 것이 좋다. 그 면이 이 상자의 얼굴이 되니까...

반나절 정도 기다려 접착이 끝나면 트리밍(trimming), 샌딩(sanding) 그리고 오일링(oiling)이 남는다. 모서리를 둥글게 트리밍 한 후, 사포질이라는 샌딩을 한다. 사실 각 단계 하나하나가 지난하고 지루한 작업일 수 있고 여러 가지지만 목공 기술의 내용은 글로 옮기기 어렵고 재미도 없어 바로 건너뛴다.



'참죽나무'는 오일을 바르고 나면 붉은색이 강하게 올라온다. 너무 강렬해 사람에 따라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다. 고급스러운 붉은 색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너무 자극적이서 피하는 사람도 있다. 이번에 만든 나무상자는 상판의 무늬가 '고풍스러운' 느낌을 무난히 만들어 낸 것 같다. 얼핏보니 꽤 옛날 물건처럼 보인다.

오일이 스며들기를 기다리며 지켜보다 이 나무상자는 선물용으로도 좋겠다 싶다.



가짜를 위한 변명


참죽나무에 비해 가죽나무는 취춘(臭椿)이라고 하는데, 향기가 아닌 냄새나는 나무로 여겼다. 나물도 먹을 수 없고, 저목(樗木)이라며 쓸모없는 나무의 대명사로 취급받았다. 게다가 가죽나무의 꽃말이 '누명'이다.

가죽나무는 억울하다. 사람을 속일 생각도 없다. 자기 생리대로 살고 있을 뿐인데 '가짜'라는 '누명'을 쓰고 있다. 한편, 가죽나무를 판매한 미국의 어느 회사가 마케팅으로 붙인 이름도 알려져 있다. "천국의 나무"(Tree of Heaven)란다. 어쩌면 이렇게 극과 극일까?

늘 느끼지만 나무는 나무대로 살고 있을 뿐인데 사람들이 들었다 놓았다 한다. 가죽나무는 이렇게 "가짜나무"에서 "천국의 나무"까지 오르락 내리락한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편은 가죽나무를 다룬 부분도 있다.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오히려 큰 가치를 지닌다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의 고사다.


장주(=장자)의 지인인 혜시의 집에 있던 커다란 가죽나무가 있는데, 목질이 변변찮아 어떤 목수도 하나같이 외면했다. 혜시는 장주의 말이 그 가죽나무처럼 크기만 하고 쓸모가 없다며 비꼬았으나, 장주는 오히려 이렇게 받아쳤다.


“대저 족제비란 놈은 기민하고 약삭빨라서 동서로 오가고 위아래로 날뛰지만 덫이나 그물에 걸려 죽는다네. 저 검은 소는 크기는 하늘에 구름이 뜬 것 같으나, 쥐 한 마리 잡지도 못하지. 그러니 나무가 크다고 걱정할 게 무언가? 어떤 인위도 없는 고장에 옮겨 심고 그 그늘 위에서 노닐면 되겠지. 도끼로 찍힐 일도 없고 아무도 해치지 않을 것인데 어찌 무용함을 괴롭다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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