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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가 나타난 날 (上)

참과 거짓의 나무가 있다

by 도시 나무꾼 안톤

옛날 옛적 TV 채널이 KBS, MBC, SBS만 보이던 때가 있었다.

난 그즈음 방송국에 TV-PD로 입사한 "옛날 사람"이다. 꽤 세월이 흘렀지만 추운 겨울, 합격자 발표를 보러 현재는 공원이 된 당시 여의도 광장을 가로지르던 내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바람막이 하나 없이 비행기 활주로를 닮은 아스팔트 광장은 겨울바람으로 매섭게 추웠다. 어쩌면 아직 결과를 알지 못해 바람이 더 매서웠는 지도 모르겠다.


KBS본관 앞 계단


나중에 <1박2일> 출연자들이 출발지로 모였던 장소가 되었지만 그때는 나처럼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러 온 사람들만 삼삼오오 보였다. 합격자 명단 앞에 있는 사람들은 멀리서 뒷모습만 봐도 합격여부를 알 수 있다. 템포가 빨라지는 사람과 템포가 느려지는 사람으로 나뉜다. 나는 어느 템포가 될지 아직 모른다. 두근 반 세근 반 뛰는 심장박동만큼이나 빠르게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 건물 로비밖 유리벽에 붙어있던 합격자 명단을 조심스레 살핀다.


있다. 내 이름(혹은 수험번호?)!!!


매섭던 겨울바람이 갑자기 시원하고 쾌적해졌다. 다행히 난 템포 빠른 그룹에 포함됐다. 템포가 빨라졌지만 이후에 뭘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쇼크를 받으면 생기는 단기기억상실이었을지도...

나중에 알게 되지만 우리 기수는 IMF 경제위기 전 대규모로 신입사원을 채용한 마지막 기수였고 이것은 동기들끼리는 틈만 나면 놀려대는 소재였다. "그때 아니면 너는 입사 못했어", "네가 문 닫고 들어온 거야"라고...

실제로 우리 다음 기수는 합격자가 1/5로 줄었다. 1년만 늦었다면 동기중 80%는 없었을 테니 운이 좋았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당시 KBS는 시청률 면에서나 영향력 면에서나 국내 방송국중 명실상부한 1위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MBC나 SBS에 비해 연봉은 조금 적어도 국내 최고의 방송사에 들어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30년 가까이 흘렀다.


나의 청춘을 바친 회사가 삐걱댄다.


넷플릭스(Netflix) 같은 글로벌 OTT나 유튜브(Youtube) 같은 디지털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방송사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위기를 맞았다. 입사 당시와 지금을 비교하면, 주식시장에서 최고가에 매입해 반토막 나있는 상태랄까? 시청률만 생각해도 1/5이 된 것 같다.

글로벌OTT 3플 형제, 넷플(Netflix), 쿠플(Coupang Play), 디플(Disney Plus)의 기세가 무섭다. 간혹 반짝하긴 하지만 예전의 명성은 쇠락하고 영향력도 예전 같지 않고 미래도 불투명하다. 방송사가 갖고 있던 판타지는 넷플릭스에게, 리얼리티는 유튜브에게 넘겨주고 있다.



초등학생시절 동네 친구 녀석들이 유치한 말싸움에서 이기려고 하는 말이 있었다. "나 이거 신문에서 봤어" 혹은 "나 이거 '테레비'에서 본거야". 이 말에 아이들의 팽팽하던 줄다리기가 한쪽으로 휙 기울어진다. 당시엔 신문과 방송에 나왔으면 진짜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당시의 신문과 방송은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었지만, 계몽시대 끝자락쯤 되는 분위기에 가르침이 무난히 받아들여졌다. <추적60분>이 고발하는 내용에 사람들은 같이 분노했고, <6시 내고향>이 여름 휴가지와 맛집을 소개하면 사람들은 그곳으로 달려갔고, <TV쇼 진품명품>을 보며 창고를 뒤지며 우리 집 숨겨진 보물을 꿈꿨으며,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보며 해외여행 계획을 세우고 <뉴스9>이 다루는 기사는 여론이 되었다.


하지만 신문과 방송이 진짜라는 믿음은 무너지고 있다.


지금 방송사의 위기는 여러 관점에서 분석이 가능하다.

정치권에 따른 내부의 정치화, 넷플릭스 등 대규모 자본과의 경쟁, 정부의 경직된 규제정책 등이 토론밥상에 오른다. 모두 하나같이 작은 일이 아니긴 하지만 대부분의 말은 원인을 방송사 외부로 돌리는데 주력한다. 원인을 밖으로만 던지고 나면 내부의 변화를 등한시하게 된다. 즉 "나만 빼고" 변화하기를 바란다. 실제로 오랜 기간 방송사들이 무수히 "변화"를 외쳤지만, 정작 스스로는 변화하려 했는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모두가 변화를 원하지만 자기가 변화하려는 사람은 없다는 내용의 카툰


사람들은 언제나 "진짜" (혹은 진짜라고 믿는 것)를 찾아다닌다. 과거엔 찾아다닐 대상이 몇 개 없었고 지금은 많아졌다. 급격한 하락을 겪은 방송사들은 "시청자가 달라졌다"라고 말하곤 하지만 "시청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선택지가 많아졌고 다른 선택지가 더 진짜 같아 보이기 때문"에 방송사가 외면받고 있다는 설명이 더 합당하다.


진짜와 가짜


언젠가 방송에서 "방송국 놈들"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방송국 놈 입장에서 꽤 불편하게 들렸다.

우리에게 "놈들"이라 욕해서 불편한 게 아니라, 이 말에는 '솔직하지 못하고 포장된 기술을 구사하는'이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즉 "너희들은 가짜"라는 말이다. 무술공연의 약속 대련처럼 디테일까지 미리 짜여진 '방송 스타일'에 "놈들"이 붙은 것이다. 방송사는 이 단어의 유행를 경고로 받아들여야 했다.


반면 유튜브에서는 '리얼함''솔직함'이 나래를 펼쳤다. "진짜가 나타난" 것이고 "찐"의 등장이다.

TV는 목공 하는 사람을 방송사가 시청자에게 '소개'하지만, 유튜브는 목공 하는 사람이 '직접 소통'한다. TV에서는 예측하지 못한 상황을 NG로 처리하고 "다시 갈게요" 외치지만, 유튜브에서는 진정성 폭발하는 실제상황이 된다. 또 TV에서는 음식을 다 맛있다고 하지만 유튜브에서는 맛없으면 맛없다고 한다(혹은 그래 보인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진짜냐 가짜냐’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사람들이 '찐'을 더 이상 "방송국 놈들"에게서 찾지 않고 있다. 유튜브라는 새로운 "찐"을 찾았다. 물론 유튜브 세상에는 "찐"이 아닌 "짭"이 더 많다. 하지만 "짭"을 골라내는 "찐"들 또한 활약 중이다. 스스로가 자연을 닮은 생태계를 만들었다. 온실 속에서 '우리가 골라주는 것이 "찐"이야'라는 방송국 스타일이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나도 졸지에 '옛날 방송국 놈'이 되었다.

퇴직하기 전에 나의 방송국은 '찐'의 일부라도 되찾아올 수 있을까?


“찐”과 “짭”

“찐”은 ‘진짜’라는 말을 줄여 표현한 인터넷 속어로, 진품임을 강조할 때 사용하고 가식이 없고 진정성을 지닌 사람이나 상황을 가리킬 때도 “찐”이라는 표현을 쓴다. “저 사람은 찐이다”라고 말하면, 그 사람이 겉치레가 아닌 진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짭”은 ‘짝퉁’에서 비롯된 말로,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가짜이거나 모조품일 때 사용된다. 진정성이 부족하거나 억지스러운 사람이나 상황을 풍자할 때 “짭”이라는 단어를 붙인다.


모든 것이 참 좋은 "진짜" 나무


지난 30년 가까운 변화를 떠올리다 공방의 난로에 나무를 던져 넣었다.

화목난로는 겨울밤엔 따뜻하고 포근하지만, 비 오는 여름밤에도 매력이 있다. 축축한 습도와 건조한 열기가 대립하는 얇은 공간의 매력이다. 그 공간에 앉아 호일에 고구마를 둘둘 말아 난로 안으로 또 던져 넣는다. 빨갛게 타들어간 나무가 밝아졌다 스러졌다를 반복하면 노랗게 익은 고구마가 구수한 향을 퍼트린다. 입으로 호호 불며 허기를 채우다가 나무 중의 "찐", "진짜" 나무를 만나기로 한다.


고구마를 호일에 감아 화목난로에 굽고 있다


나무는 탄소만 남기고 나머지를 태워 없애면 숯이 되고, 탄소가 타버리고 나머지를 남기면 재가 된다. 숯은 탄소 덩어리로 남아있는 상태로 다시 불을 붙이면 처음보다 화력이 더 좋아진다.

예로부터 우리는 참나무로 만든 ‘참숯’을 최고로 쳤다. 다른 나무의 숯보다 연기가 적고 향이 좋으며 오래 잘 탄다. 우리나라에서는 참나무를 일부 건축재로 사용하긴 했지만 가구재보다는 숯으로 많이 애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도 참숯 장작구이를 간판으로 내건 음식점은 자주 볼 수 있다.


이렇게 숯으로 태워왔던 참나무가 수많은 나무 중에 "진짜" 나무다.


참나무의 '참'은 참/거짓 할 때의 참(眞)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진짜' 나무라는 뜻이다.

자칫 말장난처럼 들리지만 흥미로운 것은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는 점이다. 참나무의 학명엔 공통적으로 라틴어 쿠에르쿠스(Quercus)가 들어가는데 이 또한 ‘진짜’ 혹은 '진리'라는 뜻이다. 동서양 모두가 참나무를 "진짜"로 봤다면 정말 진짜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참’은 아무 데나 붙이는 이름이 아니다. 목질이 단단하고 질겨 용도가 많은 데다 도토리라는 먹거리까지 제공해 주고 자기 몸을 태워 참숯을 만들어 끝까지 인간을 이롭게 만들어 준 나무이기 때문에 붙은 금메달 같은 이름이다. 나물 중에 진짜는 참나물이고, 깨 중에 진짜는 참깨이고, 두릅 중에 진짜도 참두릅이고, 나무 중에 진짜는 참나무인 것이다.


유럽의 로부르 참나무 (European Oak) by ideogram


참나무를 영어로는 오크(Oak)라 한다.

오크는 대표적인 고가의 가구재로 온대지역이라면 전 세계 어디에나 있는 나무다. 전 세계 수많은 오클랜드(Oakland)라는 도시는 모두 참나무의 땅이라는 뜻이다.

참나무는 충분히 단단(hardness)하고 충분히 질겨서(toughness) "버텨내는 힘"을 상징한다. 질기고 단단한 참나무는 신이 화를 낼 때, 즉 번개로만 쪼갤 수 있다는 믿음을 고대인류는 갖고 있었다. 그래서 참나무는 번개를 다루는 그리스 제우스(Zeus)의 나무이고 북유럽 신화에서는 토르(Thor)의 나무다. 실제로 수분을 많이 머금고 있는 참나무는 가장 벼락을 자주 맞는 나무이기도 하다. 제우스 신전 터에는 반드시 참나무가 있고, 제우스의 신탁을 받는다는 것은 참나무 잎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참나무는 유럽의 대항해시대도 가능하게 했다. 즉, 유럽의 세계 식민지화를 가능하게 한 나무이기도 하다. 당시 범선 건조 시 선체 재료로 참나무를 사용했고 튼튼하고 질긴 참나무는 지구 반대편까지의 항해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신의 나무, 대항해시대를 열어준 나무인 참나무는 그때마다 예찬의 대상이 되었다.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버티고 서 있는 모습과 충동적이지 않으며 역경에 굴하지 않는 이미지로 찬양을 받는다. 인간에겐 여러모로 모든 것이 참 좋은 참나무다.



어떤 겨울 폭풍에도, 강풍에도, 비에도 뿌리 뽑히지 않고 흔들림이 없으며, 여러 세대와 시대에 걸쳐 사람들보다 오래 살고 그들이 지나쳐가는 동안에도 버텨 낸다.
- 베르길리우스 (기원전 1세기)


용감한 남자가 부유해졌다고 갑자기 우쭐하지도 역경 때문에 풀이 죽지도 않는 것처럼 참나무는 태양이 다가온다고 신록을 뽐내지도 않고 태양이 떠난다고 바로 떨어뜨리지도 않는다
- 윌리엄 셴스턴 (1714-1763)



참나무는 '도토리'나무


참나무(Oak)가 무슨 나무인지 글로는 알기 어렵다. 주변에서 우연히 도토리를 발견하면 그 나무가 참나무라고 생각하면 된다. 참나무는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참나무 6형제는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다.


“수피를 잘라내어 굴피집 지붕으로 썼다는 굴참나무, 떡을 상하지 않게 감싸주었다는 떡갈나무, 예전에 신발 깔창으로 대기 좋았다는 신갈나무, 묵을 쑤어 먹기에 가장 맛있는 열매를 맺는다는 졸참나무, 거기서 열린 도토리로 임금님 수라상에 올라갈 도토리 묵을 쑤었다는 상수리나무... 한마디로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가 다 참나무라는 거야.....”
- 공지영 <높고 푸른 사다리>중에서


공지영 작가의 글에 나오는 우리나라 참나무에 대한 서술이다. 빠르고 쉽고 이해하기에 이 만한 글이 없는 것 같다. 물론 늦가을 참나무, 혹은 거친 참나무라는 뜻의 갈참나무, 잎과 열매가 제일 작아서 졸참나무라는 설도 따로 있다. 하지만 참나무에 대해 전해져 오는 말이 유독 잎사귀와 나무껍질, 도토리 열매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목재로써의 기록은 목조건축물의 상수리나무 기록만 보이고, 가구재로써 참나무 기록도 의외로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참나무 목재를 숯으로 많이 사용하고 가구재로는 덜 사용한 것이 아닌가 싶은 대목이다. 최근에서야 우리나라에 떡갈나무 가구를 전문으로 파는 곳이 생겼다.




짚신의 깔창으로 잎을 대서 썼다는 신갈나무(Mongolian oak)를 우리 동네 공원에서 발견했다. 동네 작은 공원이지만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제는 잘 살펴보면 참나무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으니 공원이나 뒷산에서 일단 '도토리'를 찾아보자.


서울 목동 파리공원의 신갈나무
신갈나무의 잎. 가운데 앙증맞은 도토리가 보인다


사이즈를 보면 신발깔창으로 충분해 보인다. 사이즈뿐 아니라 충분히 질겨야 가능했을 것이다. 앙증맞은 도토리도 가운데 보인다.

굴참나무는 나무껍질 안쪽이 코르크처럼 되어 있어 굴피집 지붕으로 사용하기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굴참나무의 영어이름이 Cork oak (Quercus variabilis)로, 와인병의 마개로 쓰인 유럽남부와 아프리카 북부의 코르크참나무(Cork oak, Quercus suber)만큼 코르크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지붕에 얹기엔 적합했을 것이다.


화이트 오크(White Oak), 레드 오크(Red Oak)


살아있는 참나무는 제각각 이름을 갖고 있지만 목재로써의 참나무는 크게 화이트오크(white oak)와 레드오크(red oak)로 나눈다. 굳이 구별하는 이유는 먼저 화이트 오크가 더 비싼 목재기 때문이다. 물에도 더 강하고, 수축과 팽창이 적으면서 부패에도 잘 버틴다. 와인이나 위스키를 숙성하는 오크통은 그래서 화이트 오크로 만들어진다. 물과 늘 접촉해야 하는 선박의 몸체도 화이트 오크로 만들었다.

화이트오크는 판재가 갈색이나 황토색, 레드오크는 색상은 황갈색에 전체적으로 붉은빛을 띤다고 하지만 원목은 자생 지역에 따라 다른 색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 색상만으로 구별하는 것은 어렵다.

잎사귀 모양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화이트오크(White Oak)는 끝부분이 둥글둥글한 형태를 띠는 반면, 레드오크(Red oak)는 끝부분이 뾰족한 단풍잎 같은 형태를 띤다.


왼쪽이 화이트오크 계열의 동글동글한 잎, 오른쪽이 레드오크 계열의 뾰족뾰족한 잎


목재로써의 참나무(Oak)를 표로 정리해 본다.

훨씬 더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있지만 우리 주변에서 들어봤거나 볼 수 있는 나무들로만 추려본다. 역시 모든 참나무의 학명에는 "진짜"를 뜻하는 Quercus가 들어가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크게 화이트 오크와 레드 오크로 나누고 우리나라 참나무에 대해서도 기입했다. 기재된 우리나라 참나무는 목재로는 화이트오크에 속한다.


우리나라 참나무의 얀카지수 데이터가 없다


목재의 단단한 정도를 표시하는 얀카(Janka)지수가 모두 1,000을 넘고 있어 충분히 단단한 나무임을 알 수 있다. 특이하게도 미국 남동부에 자생하는 버지니아 참나무(Live oak)는 정말 별종이다. 얀카지수가 무려 2,680 파운드포스를 보이고 있어 다른 참나무에 비해 월등한 경도를 보이고 있다. 비중도 1.00으로 엄청 무겁다. 버지니아 참나무로 만든 미 해군 창설 초기 함정인 컨스티튜션(USS Constitution)는 조지 워싱턴이 '헌법'이라 이름 지었는데 1797년부터 사용되고 있어 현존하는 해군 함정 중 가장 오래된 배다. 참나무의 어마어마한 내구성을 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USS Constitution 호 (1797~현재)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


우리나라 참나무들은 얀카지수 정보가 없으나 비중이 0.8을 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해 보면 대략 1,600~1,800 파운드포스로 예상해 볼 수 있다. 국내에 자생하는 나무중엔 박달나무를 제외하면 가장 튼튼한 나무다.

"오크(Oak)는 충분히 단단하고 질겨 모든 것이 적당해서 좋은 나무"로 정리할 수 있겠다. 오크로 만든 가구는 무늬도 단순하지만 우아(simple but elegant)해서 꽤 비싼 고급가구다.




참나무는 이제 도시안으로 많이 들어와 있다.

서울 경의선 숲길에서 레드오크인 대왕참나무(Pin oak)를 볼 수 있다. 최근엔 가로수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나무다. 미국이 원산으로 1936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기념으로 히틀러가 선물한 나무이기도 하다. 손기정 선수가 받았던 참나무 묘목은 그의 모교인 양정고등학교에 심었는데 학교가 이전하면서 지금은 손기정 체육공원에 있다. 베를린 올림픽 때는 월계수가 아닌 대왕참나무 잎(Pin oak)으로 월계관을 대신했다고 한다.


공덕역 인근 경의선 숲길의 대왕참나무 (Pin oak). 레드오크라 잎이 뾰족하다


살아있는 나무는 잎으로 레드오크(Red oak)와 화이트오크(White Oak)의 구별이 가능하지만 목재가 되면 잎이 없기 때문에 엔드그레인(end-grain, 마구리면)을 보며 구분한다.

레드오크(Red oak)는 물과 공기의 통로인 기공(pore)이 뚜렷하고 실제로 구멍이 열려있는 반면, 화이트오크(White Oak)는 기공이 보이지만 막혀있다. 화이트 오크는 기공이 막혀있어 내구성이 좋아 고급가구로 제작하고 방수에 유리하기 때문에 와인을 숙성시키는 오크통이나 선박 혹은 보트를 만들 때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왼쪽이 레드오크(Red oak), 오른쪽이 화이트오크(White oak)의 엔드그레인 10배 확대



엔드그레인(End grain)이란...


우리말로는 마구리 면(面)이라고 한다. 나무의 줄기를 섬유 방향과 직각으로 잘라낸 단면이다. 마구리 면에서는 나무의 섬유가 끝단으로 드러나 모세혈관처럼 작은 기공들이 가득 퍼져 있으며, 촉감은 거칠고 흡수성이 강하다. 오일을 바르면 많이 빨아들이며, 색도 진하게 나온다. 도마나 블록 패턴 가구처럼 단면의 점묘적인 무늬와 내구성을 활용할 때 일부러 노출시킨다. 최근엔 마구리 면으로 만든 '엔드그래인 도마'가 유행중이다.



Face grain은 나무 섬유가 위로 자라온 방향을 따라 켜낸 면이다. 이 면에서는 나이테가 선이나 물결 같은 패턴으로 이어지며, 전체적으로 크고 연속적인 결이다. 촉감은 매끈하며 안정적이다. 오일을 바르면 표면이 균일하게 흡수되고 고르게 마감된다. 가구, 바닥재 등에서 외부로 가장 흔히 드러나는 면이다.



참나무로 무엇을 만들까


난로에서 갓 구워낸 고구마를 먹으며 나의 목재칸에서 '진짜 나무'인 오크 판재를 꺼내왔다. 언제 사놓은 건지 목공을 그만둔 회원이 주고 간 것인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다행히 오크가 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노려본다. 무엇을 만들까 고민한다. 생각보다 판재가 작아 고민이다. 350*420(mm) 22T (22mm 두께 thickness) 정도 되는 것 같다. (목공에서는 주로 mm단위를 쓰고 두께는 T를 붙인다)


화이트 오크 판재


'대항해시대의 범선을 만들까?'
'책상이나 테이블을 만들어볼까?'
'와인을 숙성하는 오크통?'
'이도저도 아니면 태워서 숯으로?'


판재의 크기가 작아 범선, 책상, 오크통은 현실성 없음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깨닫는다. 하지만 놓칠 수 없는 것은 '오크 스토리'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 무언가를 계속 떠올려본다.

작은 판재와 타협해 내린 결론은 테이블 위 작은 와인랙(Wine Rack)을 만들기로 했다. 그마저도 목재가 부족하니 조금 남아있는 티크(teak)를 가져온다. 오크와 티크, 괜찮은 조합 같다. 이렇게 부족한 재료를 합리화한다.

와인 랙은 원형으로 구멍을 파내야 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그래서 컴퍼스처럼 생긴 첨단 특수장비(?)를 동원했다.


와인을 끼우는 홈을 위해 원형구멍을 파내는 첨단(?)장비. 드릴프레스에 끼워 회전하면서 깍아 내린다.


이 장비는 스피커 인클로저를 만들 때 스피커 구멍을 위해 처음 사용했던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꺼내 가운데로부터 4.5cm씩 좌우로 띄워 티크(teak) 집성목에 지름 9cm짜리 구멍을 내기로 한다. (아주 두꺼운 와인병이 아니면 대개 9cm 원안에 다 들어간다) 회전하면서 내려올 때 나무를 잡고 있는 손을 조심해야 한다. 회전 중인 금속에 손을 맞으면 골절이상의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다.

생각보다 기계의 힘을 위대하기 때문에 목공은 안전을 늘 우선으로 해야 한다. 공방에서 작업하다 병원으로 달려가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늘 서두를 때 사고가 난다.

특수장비(?)를 드릴프레스에 끼워 돌리면서 조심스레 손잡이를 잡아 내린다. 천천히 내리면 지름 9cm짜리 원이 동그랗게 깎여나간다.


오크(oak) 판재는 와인랙 좌우의 벽으로 사용한다. 가장 많은 면적이 드러나는 부분이므로 오크 판재의 가장 무늬가 좋은 부분을 살린다. 그리고 "木器時代 urban woodworker Anton"을 레이저로 각인해 넣었다. 결합하고 오일을 바르고 나니 작지만 제법 그럴듯한 와인랙이 만들어졌다.



앞뒤로는 티크(teak), 양옆으로는 오크(oak)인 와인랙이다.

오크판재가 작아서 티크를 추가했지만 재료가 티크와 오크로 크자 형제가 되었다. 크크 와인랙이라 이름붙인다.


최근에서야 좋아하기 시작한 Textbook이라는 미국 와인과 신입사원 시절 집으로 와인이란 것을 처음 사갔던 프랑스 와인 Chablis를 꽂아놓았다. 그러고 보니 이 두 와인 사이에도 내게는 25년 정도 시간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집에 와인랙을 가져가니 아내가 좋아한다.

이렇게 안톤 부부는 와인랙을 가져 온 첫날, 와인의 교과서라는 Textbook 와인을 열었다. 아내는 맛있다고 했고 나는 "버터를 첨가한 와인"같다고 했다. 기분이 그러했는지 몰라도 이 날 밤도 "버터 바른 밤"이었다.



이번 편은 2부로 작성합니다. 참과 거짓의 나무 2편은 다음 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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