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찬양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권력의 질서는 어디에나 있다.
정치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회사에도 있고 집안에도 있다. 평등할 것이라 믿는 친구관계에서도 심지어 연인관계에서도 권력관계가 있다. 간혹 어느 한쪽 인내심의 임계점을 넘으면 심각한 파열음을 내 곤 한다.
나무에도 권력의 세계가 있다. 권력을 쥔 듯한 어떤 나무는 자라나는 나무를 억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오늘은 나무에 대한 찬양이 많은 상황에서 삐딱선 한번 타보려 한다. 선량한 줄만 알았던 나무의 어두운 뒷모습을 들여다 보고 강철 손위에 벨벳 장갑을 끼고 있는 나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어쩌면 그래서 나무는 더 인간을 닮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베르사유(Versailles) 궁은 프랑스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널찍하게 펼쳐진 프랑스식 정원에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1,400개에 이르는 분수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호화로움의 정점이 되는 궁전이다. “짐이 곧 국가"(L'État, c'est moi)라는 말로 유명한 태양왕(Le Roi Soleil) 루이 14세(1638~1715)가 절대왕정을 구축하기 위해 지었다.
그런데 이 베르사유 궁전의 원래 모델이 되는 궁전이 프랑스 내에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는 않다.
파리 남동쪽 50km 정도에 있는 보르비콩트 성 (Château de Vaux-le-Vicomte)으로 루이 14세 초기 재무장관이었던 니콜라스 푸케(Nicolas Fouquet)가 지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조경사, 정원사들을 총동원해 3년이 걸렸다.
마침 1661년 총리 마자랭이 죽자, 푸케가 총리가 될 것으로 모두가 예상할 때 루이 14세는 반대로 총리 자리를 없앨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푸케는 자신이 공들인 성에서 지상 최고의 연회를 열어 왕의 환심을 사기로 한다. 형식적으로는 성의 완공기념 축하연이었지만 내심 루이 14세를 모시기 위한 계산된 연회였던 것.
7개 코스로 준비된 만찬
프랑스에서는 처음 보는 동양요리
왕을 위해 특별히 작곡한 음악연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고 생각했던 푸케는 어이없게도 다음날 왕의 근위대장에게 체포된다. 그리고 석 달 뒤 국고횡령죄로 재판을 받고 유죄를 선고받은 데다 왕은 재량권으로 가중처벌한다. 그는 이후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있었고 다시는 살아 나오지 못했다. 재산도 모두 국고로 귀속되었다. 그가 횡령죄로 뒤집어쓴 돈은 사실 루이 14세를 위해 왕의 허락하에 빼돌렸던 돈이었다.
억울해도 죽을 때까지 하소연할 곳 없이 죽어간 푸케. 그가 열었던 보르비콩트 성 연회는 오히려 태양왕 루이 14세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 질투의 불씨를 지폈던 것이다.
루이 14세는 이후 푸케가 보르비콩트성을 지을 때 불렀던 루이 르 보(Louis Le Vaux), 르 노트르(Le Nôtre) 등 당시 최고의 건축가와 조경사를 다시 동원해, 보르비콩트 성을 모델로 더 웅장한 궁전을 지었다. 더 크고 화려한 완공기념 축하연도 열었다. 그렇게 탄생한 궁전이 베르사유 궁이다.
이후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Voltaire)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저녁이 시작될 무렵 푸케는 세상의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푸케에 반해 망사르(Mansart) 이야기도 있다.
베르사유 궁은 이후에도 증축을 몇 차례 하게 되는데 공사를 수주했던 건축가 쥘 망사르(Jules Mansart)는 루이 14세에게 설계도를 보여주면서 의도적으로 불완전한 부분을 포함시킨다.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실수가 있으면 전문성을 의심받기 때문에 비전문분야인 정원을 대상으로 했다. 이것은 망사르의 기획된 의도였다. 왕은 "예상대로 정확하게" 정원의 문제점을 짚어냈고 해결법까지 제안했다. 그 순간 망사르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감탄사를 연발한다. 자신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왕께서 금세 알아보셨다고, 폐하 앞에만 서면 자기는 일개 학생이 된다고... 커다란 목소리로 연신 감탄했다.
결국 망사르는 이후 국왕의 전속 건축가로 출세할 수 있었다.
권력의 모습을 보면 말할 수 없이 유치하기도 하고, 한없이 냉정하고 비굴하다. 특히나 왕권신수설이나 절대왕정을 확립하려는 왕 앞에 펼쳐진 권력의 법칙은 한 발자국 더 유치해지고, 냉정해지고 비굴해질 수 있다.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피레네 산맥의 외딴 감옥에 갇혀 여생을 보낸 푸케의 한숨소리와 절대 왕의 기분을 잘 살펴 몸을 낮추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망사르가 던지는 아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예로부터 송백(松柏, 소나무와 측백나무)은 소나무(松)를 백수의 으뜸으로 삼아 나무 木에 ‘공(公)’을 붙였고, 측백나무(柏)는 나무 木에 백작 작위인 ‘백(伯)’을 붙여 위계가 있었다.
소나무를 최고 위상으로, 측백나무를 다음 가는 작위로 비유했다. 주나라 때는 왕의 능에는 소나무를 심고 왕족의 묘지에는 측백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조선의 왕릉 역시 주변을 소나무로 장식하고 있다.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사철 푸르른 나무라는 공통점이 있다.
유학의 사서(四書)중 하나인 <논어>(論語)의 자한 편에 공자의 말씀으로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는 문장이 나온다. ‘추운 겨울이 와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안다’는 말로 번역한다. (사실 잣나무는 같은 소나무과에 속하기 때문에 엄밀하게는 번역을 '측백나무'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계절과 관계없이 항상 푸르른 모습에서 성리학적 선비의 자세를 본 것 아닐까 싶다.
논어의 이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작품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다.
1844년 김정희는 59세의 늦은 나이에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누구도 찾지 않아 외로운 유배생활을 하는 상황에, 그의 제자인 역관 이상적(譯官 李商迪)만이 중국을 드나들며 서적을 구해 위험을 무릅쓰고 전해주곤 했다. 추사는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제자를 위해 조그마한 그림 한 장을 건넸고 그것이 바로 <세한도>(歲寒圖)다. 그림엔 송백(松柏, 소나무와 측백나무 혹은 잣나무)을 그려 넣었다. 추운 겨울이 된 자신을 찾아와 주는 사람은 너뿐이라고... 최대한의 고마움을 그린 것이다.
소위 '잘 나갈 때' 찾아오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무너졌을 때' 옆에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 정승이 죽으면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는 속담은 그러한 세태를 비꼰다.
동양과 서양, 옛날과 지금 가릴 것 없이 공통적인 현상이다. 권력과 이익의 속성이기 때문이고 이 둘은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0년 전 추사의 마음을 10여 년 전 에릭 클랩턴(Eric Clapton)이 대신 부른 노래가 있다. 꼭 들어보자. 곡 이름은 "Nobody knows when you are down and out" (빈털터리가 되면 아무도 널 아는 척하지 않아)로 1923년 지미 콕스의 곡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나 에릭 클랩턴의 <Nobody knows you...> 노래를 통해 권력과 부를 가졌을 때 다가오고,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을 때 떠나가는 게 세상이라며 모두가 한탄한다. 또 반대로 한탄의 양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존재"에 대한 갈망을 더욱 강화한다.
이러한 마음은 "사철 푸르른 나무"를 최고의 나무로 올려놓기에 충분한 명분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철 푸르른 나무"의 왕은 소나무다.
소나무에 대한 사랑은 지극하다 못해 유난스러울 정도다. 사계절 푸른 모습은 절개와 지조의 상징으로 여겨져 유교적 덕목과 엮어 소나무를 '숭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한국의 정신문화를 대변하는 나무로 지위가 높아져 왔다.
애국가 2절은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고 가곡 <선구자>는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로 시작한다.
조선 7대 왕 세조는 속리산 행차 때 어가가 나뭇가지에 걸릴 뻔했지만 소나무 스스로 가지를 들어 올려 무사통과했다는 이유로 소나무에게 정 2품 벼슬을 내리는데 천연기념물 제103호 정이품송(正二品松)이다. 7km 정도 떨어진 곳에 정이품송의 부인으로 여겨 '정부인송'(貞夫人松)이라 불리는 소나무도 있다. 천연기념물 제352호로 지정된 보은 서원리 소나무다. 수령도 600년 정도로 비슷하고 크기도 비슷하다. 정이품송은 곧게 자라서 남편으로, 서원리 소나무는 넓고 낮게 퍼져 부인으로 본 것 같다.
심지어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 종합토지세를 내고 있는 소나무도 있다. 경북 예천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294호 석송령(石松靈)이다. 성이 석(石) 이름이 송령(松靈)이며, 이 나무는 6600m² 토지를 예천군 토지대장 등록번호 3750-00248로 소유하고 있다.
우리나라 소나무는
철갑 옷도 입고, 결혼도 하고 높은 벼슬도 하며 세금까지 낸다. 죽으면 장사까지 잘 지내준다.
얼마 전 서울 마포구청은 마포대교 북단부터 공덕역까지 마포대로 구간 가로수를 플라타너스(양버즘나무)에서 소나무로 교체했다. “외국 정상이 서울을 방문할 때 이용해 '귀빈로'라는 별칭을 얻은 마포대로에 전통 나무인 소나무를 심어 한국의 자연미와 휴식공간을 제공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과연 그럴까? 아무튼 17억여 원을 들여 양버즘나무 82주가 사라지고, 소나무 189주가 새로 들어섰다.
기사를 보자마자 마포대로로 달려가 봤다. 마포구청이 말하는 '휴식공간은 어디?'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무성하던 플라타너스는 모두 사라지고 앙상한 소나무 아래에 무슨 휴식공간이 있다는 것일까?
8차선 도심 대로에 공해와 병충해에 약한 소나무를 심을 만큼 우리나라의 소나무에 대한 사랑은 (집착일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유별나다. 외국정상이 자주 지나가니 '한국의 대표 나무, 소나무'를 차창밖에 보이도록 가로수로 심자는 의도였을까?
소나무의 생태적 의미는 사라지고 '한국의 전통나무'라는 상징적 의미만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
고백하자면 나는 소나무에 삐딱하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소나무를 지나치게 떠받드는 사람들에게 삐딱하다.
나는 소품이나 작은 가구를 만드는 소목(小木)이기 때문에 비중이 낮아 가볍고, 밀도가 낮아 단단하지 않은 소나무에는 손이 잘 안 간다. 살아서는 "왕의 나무"였는지 모르겠지만 죽어서 목재가 된 소나무는 너무 가볍고 너무 약하다. 태권도 격파시범에 송판을 쓰는 이유도 가볍고 잘 부서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격도 비교적 저렴하다.
하지만 살아있는 소나무는 권력을 닮았다
소나무가 왕의 권력을 닮은 것은 타감작용 (Allelopathy, 他感作用)을 들 수 있다. 식물에서 나오는 화학물질이 다른 식물의 생존을 막거나 성장을 방해하는 작용을 말하는데 소나무가 방출하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주변의 다른 식물을 죽이는 것이다.
피톤치드는 나무 스스로 자연치유를 위해 내뿜는 항균물질이지만 주변의 다른 식물들도 씨를 말린다. 소나무 숲에서는 소나무 묘목조차 잘 자라지 않는다. 세력이 비슷해, 서로를 죽일 수 없는 동급의 소나무끼리만 자라는 특성 때문에 송림을 동령림(同齡林)이라고 하는데, 수령 차이가 나지 않는 숲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성장해 오는 세력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루이 14세의 권력을 많이 닮았다.
소나무가 태양왕 루이 14세에 닮았다는 것은 태양빛을 많이 필요로 하는 나무라는 것도 한몫한다. 유식한 말로 광보상점(light compensation point)이 높은 나무다.
광보상점(光補償點)이란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얻는 양분과 호흡으로 소비하는 양분이 같아져 광합성이 ‘0’이 되는 빛의 세기다. 쉽게 말해 광보상점이 높으면 태양 빛을 많이 필요로 하는 양수(陽樹)고. 낮으면 태양 빛이 적어도 되는 음수(陰樹)다.
소나무는 대표적인 양수로 태양 욕심이 매우 많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다시 떠오르는 지점이다.
양수(陽樹)와 음수(陰樹)
광보상점(光飽和點)에 따라 나무는 양수와 음수로 나눈다.
양수(Sun tree)는 광보상점이 높아 강한 햇빛에서 광합성을 잘하는 나무. 그늘에서는 호흡량이 광합성량보다 많아 성장하기 어렵다. 소나무, 은행나무, 아까시나무 등이 여기에 해당.
음수(Shade tree)는 광보상점이 낮아 약한 빛에서도 광합성을 유지할 수 있는 나무. 잎이 얇고 엽록소 함량이 높아 빛을 효율적으로 이용. 전나무, 단풍나무, 서어나무 등이 대표적인 예.
나무를 심을 때 양수는 햇빛이 하루 종일 많이 들어오는 곳에 심어야 하고, 음수는 그늘진 곳에 심어도 된다. 반대로 심으면 나무들이 '이유 없이' 죽어간다.
절대권력은 수식어가 많다. 소나무도 이름이 많다.
소나무는 색깔에 따라 적송, 흑송, 홍송, 백송, 생김새에 따라 남송, 여송, 장송, 솔송, 위치에 따라 육송, 해송 등등 따로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소나무는 주로 수피가 붉어 적송(赤松), 몸이 구불구불해 여송(女松)이며 주로 내륙에 자라서 육송(陸松)이고 해외에서는 Red Pine이라 부른다. 모두 같은 나무다.
또 '검은 솔'이라는 뜻의 '곰솔'은 바닷가에 있어서 해송(海松)이고, 거칠고 직선으로 자라 남송(男松)이며, 수피가 까만 편이라 흑송(黑松)이라 부른다. 해외에서는 Black Pine이라 부른다. 다 같은 나무다.
적송(赤松)=여송(女松)=육송(陸松)=Red Pine
곰솔=해송(海松)=남송(男松)=흑송(黑松)=Black Pine
소나무는 한반도 전역 어디에든 널리 자생하고 있어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나무다.
못 먹던 시절 보릿고개를 넘기는데 소나무의 속껍질과 솔잎은 큰 역할을 했다. 험하고 거친 음식을 뜻하는 초근목피(草根木皮, 풀뿌리와 나무껍질)의 음식이기도 하다. 부작용도 있어 소나무의 섬유질과 송진이 소화되지 않아 치열이나 변비를 일으킨다. "×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소나무가 한국의 전통으로 인식된 큰 이유는 예로부터 궁궐이나 사찰건축에 많이 쓰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궁궐 등 가장 중요한 건축물에는 소나무중에서도 금강산 일대의 금강송, 경북 울진, 봉화일대의 춘양목을 주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금강송과 춘양목은 이름만 다를 뿐 적송과 같은 나무다. 대개 구불구불 자라는 소나무(적송)중에서 금강산일대와 태백산맥 줄기에서 유독 곧게 자라는 녀석들이 발견되어 사용된 것이다.
조선시대 궁궐에는 소나무가 쓰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럼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국립산림과학원에서 2000년부터 5년에 걸쳐 우리나라 국보 및 보물급 목조 문화재의 수종구성을 조사한 바 있다. 눈에 띄는 부분은 고려시대의 현존하는 대표적인 건축물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의 기둥으로 사용된 목재들이다. 중고등학생시절 국사 시간에 4지 선다형으로 달달 외웠던 고려시대 목조건축 3형제는 무슨 나무로 지어졌을까 궁금했다.
먼저 경북 영주에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18호)의 배흘림 기법으로 유명한 24개의 기둥이 소나무가 아니라 모두 느티나무다. 1308년에 창건한 충남 예산 수덕사의 대웅전(국보 49호)의 기둥 중 가장 많은 나무 역시 느티나무다. 경북 안동에 있는 봉정사 극락전(국보 15호)의 기둥 16개 중 15개는 소나무, 1개는 가문비나무 (모두 소나무였는데 1개는 보수과정에서 가문비나무로 교체된 것으로 추정)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사찰이나 궁궐의 기둥을 소나무로 쓴다고 알고 있지만 고려시대까지는 소나무(40%)보다 느티나무(55%)를 더 많이 사용했던 것을 보여준다. 조선초기는 비슷하게, 조선중기부터는 소나무가 월등히 많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소나무를 전통나무로 인식하는 것은 조선시대 초기를 거치면서 중기부터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결과를 토대로 유추하면 고려의 궁궐에는 느티나무가 많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목재로써 느티나무는 소나무보다 더 견고하고 변형이 적다. 느티나무는 소나무보다 뛰어난 목재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24개 느티나무 기둥은 700년을 교체 없이 원래의 나무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느티나무와 소나무의 기능적 차이는 확연하다.
얀카지수에 따르면 느티나무는 1,040 파운드포스로 소나무 560의 두 배 가까운 수치를 보여줄 정도로 단단한 나무다. 단단한 데다 변형까지 적다. 신라의 천마총이나 가야 무덤에서 출토된 관은 거의가 느티나무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내구성도 좋다.
첫 번째 가능성은 느티나무가 부족해졌을 수 있다는 점이고, 두 번째 가능성은 조선이 성리학을 중심에 두면서 소나무가 선택되었을 것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느티나무가 조선 초에 부족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목재로 사용하기까지 긴 세월이 필요한 나무이기 때문이다. 다만 소나무의 사철 푸르름을 지조와 절개로 인식하는 성리학적 대의명분은 현실의 논리를 크게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후자의 가능성을 나는 더 높게 본다. 느티나무가 조선초에 부족해진 것이라면 조선후기에는 다시 느티나무 사용이 증가했어야 하지 않을까?
소나무를 한국의 전통나무로 보는 것은 '조선시대에 성리학이 만든 전통'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전통나무'는 소나무로 획일화할 것이 아니라 느티나무, 상수리나무(참나무의 일종)를 포함해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비교적 자주 거론되는 소나무과(Pinaceae) 목재를 한번 정리해 본다.
소나무과에 속한 나무들은 서로 경도와 성질, 허용응력 등이 유사해 사실상 목재로써는 큰 차이가 없다. 가볍고 연하며 대체로 가격이 저렴한 목재란 점도 비슷하다.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가문비나무 등이 소나무과에 포함된다. 이외에도 솔송(Hemlock)과 낙엽송(Larch)라 불리는 나무도 있다. 목재로는 얀카지수가 300대에서 700대까지 있지만 모두 1,000 이하로 예외 없이 무른 나무다. 소프트한 목재들이고 거의 모두가 연한 밝은 색이다.
한국 고유종들도 있는데 홍송(紅松)이라는 불리는 잣나무로 Korea Pine이 있다. 또 구상나무라 불리는 Korean Fir도 있다. 다만 구상나무는 보호받고 있어 목재로 만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세계적 인기를 얻은 한국 고유종, 구상나무(Korean Fir)는 한라산, 지리산 등 고지대에 자생하는데 수직으로 솟는 솔방울이 특징이다. 2100년이면 기후 때문에 한반도에서 멸종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목재로 나오는 나무가 아니라서 나의 큰 관심은 아니었지만 멸종위기라고 하니 한라산을 방문하면 일부러라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심의 공원을 걷다 보면 잣나무나 소나무 모두 뾰족하고 가는 잎을 갖고 있어 구별 못하는 사람이 많다. (사실 구별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만) 이 글을 읽고 나서 공원에 가면 한번 구별해 보자.
소나무와 잣나무를 구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잎의 개수다. 소나무는 2개의 잎이 붙어 있고, 잣나무는 대개 5개의 잎이 붙어있다. 식물 생태학자나 나무의사가 아니라면 딱히 구별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많은 사람들이 소나무는 목재도 고급으로, 가격도 비싸고, 목질은 단단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로 소나무는 원목 중에 저가형 목재다. 목질이 부드럽고 가벼워 가공이 수월한 편이고 무난한 크림색으로 대중성이 높다고 해야 할까? 소나무 목재는 이 '무난함'이 특징이다. 그래서 목공에서는 주로 책장이나 상자 등의 무난한 기능형 가구를 만들 때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상대적으로 가격도 저렴해 사이즈가 큰 가구를 만들기 좋지만 목재가 약한 편이라 자주 긁히는 책상은 추천하지 않는다.
가볍고 밝아 목재가 된 다음에는 왕의 권위가 사라진다.
소나무류를 "고급"가구나 "고급"목기로 사용하는 예는 드물다. 공방 회원들이 소나무로 만들었던 가구들도 대부분 기능에 충실한 것들이었다. 큰 특징은 없어도 되지만 부피는 큰 가구를 만들 때 주로 사용했다.
추운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아 소나무를 강한 나무로 많이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연약한 나무다.
살아있을 때도 가지치기로 손이 많이 가는 데다 공해 병충해에 약해 잘 키우려면 비용을 많이 들여야 한다. 사철 푸르름을 지조와 절개로 받들어, 살아서는 우리나라에서 '나무 중의 왕'의 권위를 받지만, 죽어서 목재가 되면 평민으로 떨어진다.
권좌에서 최고의 권위를 누리다 정치게임에서 탈락하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권력의 세계와 이것도 닮은 것일까?
소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푸른 나무를 보여줘 사람들에게 훌륭한 미덕을 보여주고 있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소나무는 자기 생리대로 살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들었다 놓았다 할 뿐이다. 소나무의 품성을 존중하되 지나치게 숭배하지 않고 약점을 지나치게 비난하지 않으며, 소나무에 가려 관심을 받지 못하던 우리 나무들에 골고루 애정을 가져보는 것이 좋겠다.
지나친 숭배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일 수 있다. 공해와 병충해에 약한 소나무를 가로수로 심거나 산림녹화를 위해 산불 이후 소나무류를 집중적으로 심는 것은 과연 숲과 나무를 위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나는 비록 죽은 나무인 목재를 다루지만 새삼 깨닫는 것이 "알맞은 땅에 알맞은 나무를 심는 것이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소위 적지적수(適地適樹)다. 그리고 사철 푸르름에 대한 과도한 기대보다는 자연의 흐름을 받아들여 단풍 들고 잎이 떨어지고 새로운 잎을 준비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더 아름답지는 않은가?